제1장.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一 从星际争霸说起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12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11097
이 번역은 2026년 8월 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2004년 무렵, 신문 《CBI 컴퓨터 상업정보》의 전 게임 주간이던 춘인(纯银)이 운영하던 비공개 포럼에서 나는 스타크래프트 판의 이름난 필자 [AOQ]cat을 알게 되었다. 우수이더예차, 곧 '낮잠 자는 야차'라는 이름의 그 포럼에는 게임 업계의 무대 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샤오싼사오(笑三少), 스타크래프트 소설 《융왕즈첸》, 곧 '앞으로 나아가라'를 쓴 카만터우(卡馒头, commando) 같은 선배 고수들이 즐비했다.
그때 나는 이미 CCSK를 떠나 CGA 뉴스팀으로 옮겨 카운터 스트라이크 관련 일만 하고 있었다. 나는 늘 게임판 전체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당시 내 상사이던 하오팡 플랫폼의 마케팅 총괄 양천(杨晨)이 얼굴을 익히라며 나를 그곳에 데려갔다. 포럼 안에는 나이와 항렬의 높낮이가 있었지만 다들 결국 게임을 하는 젊은이였고, 그래서 금세 가까워졌다.
가까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AOQ]cat이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우리 둘이 같이 중국 e스포츠 역사를 써 보자, 자기는 스타크래프트를 쓸 테니 너는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써라. 나는 잠시 멍했고, 농담인 줄 알았다. 그때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이미 《미르의 전설 2》나 《뮤 온라인》 같은 온라인 게임에 플레이어를 빼앗기며 내리막을 타기 시작한 참이었고, 스타크래프트는 진작에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사람을 뺏겨 소수 종목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e스포츠가 어디로 갈지 몰라 막막했고, 앞으로도 e스포츠를 계속할지조차 말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AOQ]cat과 이야기를 더 해 보고서야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졸업 논문에 매여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의 e스포츠가 너무 아득하고 너무 어려서 역사로 쓰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렇게 이야기는 흐지부지되었다.
지금 [AOQ]cat이 쓴 《중국 스타크래프트 역사 회고》를 보면 몹시 후회된다. 그는 1998년부터 2002년 이전까지 스타크래프트가 중국에서 누린 영광을 적어 두었고, 동시에 그 시대의 막막함도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 그 과거를 연구할 자료를 갖게 되었다.
자, 스타크래프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아직 기억한다. 1997년 인터넷 요금은 시간당 20위안이었고, 그나마 30분이 지나도 웹페이지 하나 열리지 않는 일이 흔했다. 1998년이 되자 전화 접속 요금은 크게 내려갔고 속도도 많이 올랐지만, 인터넷에 접속해 게임을 하는 것은 여전히 사치였다. 그런데도 그 무렵 이름난 스타크래프트 원로인 red-apple, lan.yf와 lan.yq 형제, caoyong, ss.glacier, kulou 왕인슝(王银雄) 같은 사람들은 이미 배틀넷에서 미국 플레이어들과 겨루고 있었다.
이 무렵 해외에는 이미 팀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이름 앞뒤에 공통 태그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래서 caoyong이 이름난 POC 팀을 만들었는데, 꽤 이른 축에 드는 팀이었다. 팀장의 아이디는 caoyong[POC]였다. 멋지지 않은가. 이런 통일된 군단식 관리는 수많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를 끌어들였다.
그 시절 팀 운영 방식에는 군벌 같은 구석이 있었다. 사람 열몇에 총 일고여덟 자루 수준인데도 외무부와 내무부가 있고, 계급이 있고, 군관구가 있고, 군단장이 있고, 지부와 분회가 있었다. 열몇 살짜리 아이들이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굴렸다. 게다가 이름이 조금만 나면 발전 속도가 상당히 빨라서, 전국에 편제와 계급을 가진 구성원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르렀다. 지금 같으면 다단계 조직으로 오해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군대식 운영은 델타 포스와 퀘이크 시절부터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대에 이르러 웹 기술 인력이 합류하면서 정점에 닿았다. 반듯하게 짜인 대형 웹사이트에는 정식 팀원 명단이 전부 올라 있었고, 사진첩과 포럼, 뉴스와 다운로드 게시판이 있었다. 이런 사이트들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기울면서 대형 팀이라는 개념도 점차 시들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의 워크래프트 3 시대에는 대군단의 수가 이미 아주 적었고, 지금은 이름난 e스포츠 구단조차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것은 그 시대의 열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왕인슝(kulou.csa)이 쓴 회고 글을 보면, 1999년 아마추어 플레이어 조직이 프로화로 나아가려 할 때 큰 논쟁이 한 번 있었다. 같은 시기 카운터 스트라이크 판에서도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다. 게임은 여가로 즐기는 것인가, 아니면 진지하게 파고들어 e스포츠로 만드는 것인가. 당시 많은 사람이 e스포츠에 반대했다. 지금 보면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실제로 e스포츠라는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프로화가 사람 사이의 정을 앗아 간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았다. 예를 들어 원래 왁자지껄하던 PC방이 조용해졌다.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당시 대회 규칙이 마이크를 쓰지 않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금지했고, 다들 규칙을 모른다고 비웃음을 살까 봐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 이야기다. 1999년, 네트워크 요금의 하락과 속도의 상승은 이 두 해 사이에 반비례로 빠르게 움직였다. 한순간에, 예전에는 랜으로 레드 얼럿과 스타크래프트,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하던 컴퓨터방이 PC방으로 탈바꿈했다. 컴퓨터방은 PC방의 전신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컴퓨터 대수가 늘고 값이 싸졌으니 게임 플레이어 수도 당연히 크게 늘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열기는 정말로 막을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늘고 팀이 늘자 연맹이 생겼다. 무술 문파가 많아지면 자연히 무림대회가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왕인슝(kulou.csa)이 만든 CSA, 곧 중국 스타크래프트 연맹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대를 관통했고 뒷날 ESWC 중국 지역 총판까지 맡은 훙저푸(洪哲夫, hongzf)가 만든 둥베이 하얼빈 게임 대본영도 있었다. 당시 고수가 가장 많던 후난 배틀넷도 있었다. 중국 e스포츠에는 지역색이 아주 뚜렷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뒤에 따로 한 편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접어 둔다. 이렇게 온갖 큰 조직이 잇따라 나타나기 시작했다.
FSGS 플랫폼 기술이 나오면서 플레이어가 직접 서버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중국 안의 서버도 따라서 늘기 시작했다. 먼저 우저우 전신이 세운 우저우 배틀넷이 나왔고, 다음이 후난 배틀넷, 그다음이 263 배틀넷이었다. 시나와 263도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시나 게임의 전 편집장이자 이 글을 쓰는 시점에 178의 대표인 먀오신위(苗新雨)는 그저께 새벽 3시에 몹시 들뜬 채로 휴대폰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내가 오래 연락이 끊겼던 e스포츠 원로 여러 명을 찾아 주기도 했다. 다들 중국 게임 업계의 여러 층위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모두 마음이 놓였다. 그때는 경쟁 상대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옛 친구가 다시 만나 웃으며 서로를 알아보는 사이가 되었다.
대회가 많아지자 개인 미디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것은 전적 리포트 제작과 전술 분석이었다. 그중에서도 stoneman, 그리고 충칭의 스타크래프트 챔피언 한위량(寒羽良)과 아차이(阿蔡) 남매가 가장 이름났다. 이들은 해외의 최신 전술과 전적 리포트를 자주 연구하고 번역했고, 스타크래프트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한국에서 영상 전적 리포트가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뒤에는, 뒷날 알려진 마린 세 기가 풍차처럼 돌며 러커를 잡는 식의 믿기 힘든 기술이 수많은 새 플레이어를 끌어들였다. 게다가 1999년 무렵에는 고를 수 있는 게임도 적었으니, 스타크래프트는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경로를 눈여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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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선구자, 곧 스타들이 모여 핵심 소집단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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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와 제품 자체의 뛰어남이 게임 플레이어와 조직의 확대를 밀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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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사이의 대회가 늘어나고 갈수록 정식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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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리포트를 쓰는 개인 미디어와 대회를 보도하는 전문 미디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미디어는 팀 같은 조직의 노출과 관심도를 키우고, 그것이 후원과 그 밖의 것들을 불러와 다시 각 부분의 자원을 최적화하고 다듬는다.
여기까지 오면 경쟁 게임의 초급 사슬이 하나 완성되고, 미약한 선순환이 시작되며, 눈덩이가 앞으로 몇 바퀴 굴러간다.
핵심 > 확산 > 대회 > 미디어 > 핵심의 확대, 그리고 반복.
14년이 지난 지금도 새 경쟁 게임이 판을 이루려면 이 길을 간다. 다만 중간 과정이 더 짧아지고 더 능숙해졌을 뿐이다.
당신이 무대 뒤의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잘 알고 손에 쥔 채 시기마다 핵심 단계를 제대로 밀어 주면 적은 힘으로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반대로 그다지 잘 풀리지 않은 경쟁 종목을 보면, 이 사슬이 균형을 잃었거나 끊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부분은 살이 쪄 있고 어떤 부분은 굶어 죽기 직전이다. 아마 이것이 잘 풀리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경쟁 게임은 아주 특수한 종이다. 사슬 전체가 잘 자라야 A에서 A+로 갈 수 있다. 중국은 사람이 많아서 A까지 가기는 쉽다. 그러나 게임 하나를 고전으로 만들고 한 세대의 기억으로 만들려면 큰 그림이 필요하다. 더 높은 자리에 서서 사슬 전체의 지원과 운영을 봐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관건은 결국 당신이 A를 하고 싶은지, A+를 하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