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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중국 e스포츠 해설의 원로 Alone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十六 中国电竞解说元老Alone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5년 2월 20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919216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언젠가 누군가 Alone(얼룽, 二龙)에게 물었다. 중국에서 가장 이른 e스포츠 해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요즘 새 해설자들이 방송에서 물을 마시고 티팬티를 입는 것으로 자기보다 수입이 높은 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Alone은 e스포츠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가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했다. 존재하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막 시작한 단계라 업계에 어지러운 구석이 있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성숙해질 것이라고 했다. 온갖 시도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환경에서는 여러 시도를 품어 줄 필요가 있고, 새로 생긴 것에는 자라날 시간을 줘야지 서둘러 부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이 모든 것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고, 그 선은 다 같이 더듬어 찾아야 한다고 했다.

Alone의 본명은 류칭(刘青)이다. 자(字)는 얼룽, 호(号)는 China ToP Zerg다. 1980년 10월 20일 쑤저우(苏州) 성쩌진(盛泽镇)에서 태어났다. 예로부터 비단이 나는 넉넉한 고장이지만 류칭의 집안은 평범했고, 게임에 대한 재능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대학 입시를 치를 때 Alone은 밖에 나가 세상을 좀 보고 싶어서 지원서를 전부 북방 지역 대학으로 채웠다. 결국 지린대학(吉林大学)에 붙었다.

1999년 중국에 인터넷이 일어나면서 Alone은 스타크래프트와 QQ를 동시에 접했다. 갑자기 세상이 훨씬 넓어진 것 같았다. 그는 그 느낌이 아주 좋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둥베이의 스타크래프트 열기는 대단히 뜨거웠고 고수도 즐비했다. 지린대학에도 교내 팀이 있었고, Alone은 그 팀에 들어가려고 훈련에 많은 것을 쏟았다. 그런데 나중에 팀 전체가 밖에 나가 다른 팀과 붙었을 때는 거의 이기지 못했다. 아마 Alone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2002년 Alone은 졸업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당시 국내에서 제법 이름 있던 대회 GOC에 별생각 없이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강했던 SVS 팀의 부주장 zealot을 꺾어 버렸다. SVS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SVS는 그때 중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팀이었고, zealot은 그 팀에서 가장 강한 선수이자 WCG 전국 준우승자였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SVS 팀은 밥을 먹으러 갔고, 팀 주장 UFO와 관리자 Friend, 곧 천치둥(陈琦栋)이 Alone도 불렀다. 밥상에서 SVS 사람 일고여덟 명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Alone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몹시 어색해하고 있을 때 종업원이 후이궈러우(回锅肉) 한 접시를 그의 앞에 놓았다. 삶은 돼지고기를 다시 볶아 내는 쓰촨 요리다. 그가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집고 막 먹으려는 참에,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Friend가 갑자기 물었다. SVS 팀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Alone은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싫다고 하면 이 고기는 못 먹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Alone은 어,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그는 e스포츠판에 들어왔다.

이런 시구가 있다. e스포츠에 한번 발을 들이면 바다처럼 깊어서, 그날부터 지조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

다만 그 뒤 Alone의 대회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차츰 팀 리더로 자리를 옮겼고, SVS를 이끌고 온라인 전국 대회 우승도 몇 번 따냈다. 그 덕에 Friend는 그에게 조직과 관리 능력이 제법 있다고 봤다.

2002년 어느 날 Friend가 Alone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지금 중국 e스포츠의 가장 큰 문제는 힘 있는 조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대회 부정행위를 다스릴 방법이 없고 상금을 떼먹는 일 같은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플레이어 길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풀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Alone은 동의했다. 그렇게 중국 플레이어 길드가 만들어졌다. China Player Union, 줄여서 CPU다.

이름이 우스갯소리 같아 보여도 Alone과 동료들은 이 일을 아주 진지하게 했다. 길드를 세운 뒤 Alone이 맡은 첫 번째 일은 길드 강령을 기초하는 것이었다.

그러려고 그는 따로 일주일을 들여 다른 업계의 강령들을 뒤져 읽었다.

강령을 다 쓰고 나서 Alone은 Friend를 따라 상하이시 정부에 갔다. 길드를 정식으로 등록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정부 직원은 두 사람의 설명을 다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어리둥절해하며 한마디를 물었다. 이 길드에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Alone은 온라인에 몇만 명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없었다.

만담 배우 궈더강(郭德纲)의 말처럼, 그때는 서럽던 옛일이 지금 이야기하면 우스갯소리가 된다.

그 시절의 e스포츠 사람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e스포츠의 살길을 찾고 있었다.

정부 쪽에서 벽에 부딪혔지만 Alone과 동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상금을 주지 않는 대회들을 물고 늘어졌고, 스타크래프트 대회의 경기 규칙도 정리해 기준을 세웠다.

특히 2003년 삼성이 WCG의 스타크래프트와 FIFA 등 종목을 온라인으로 옮겨 치르자, 플레이어 길드는 온라인으로 하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많다고 봤다. 부정행위, 대리 출전, 접속 끊김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 WCG는 중국 플레이어들의 마음속에서 제법 신성한 것이었고 아무도 거기에 조금의 결함도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길드는 100여 개 팀과 수천 명의 이름을 모아 WCG에 연명 청원서를 올렸고, 삼성 중국 지사까지 직접 찾아가 전달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Alone과 동료들은 CPU에 다른 조직을 구속할 만한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약한 연결이어서 상대가 무시해 버리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는 e스포츠 환경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다들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자기 영향력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그길로 e스포츠 사이트와 자체 대회 SIM을 만들러 갔다. SIM은 PLU 시리즈 대회의 전신이다.

그때 그들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했다. 스스로 권위 있는 e스포츠 매체가 되어 여론의 힘으로 e스포츠 업계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많은 e스포츠 사이트가 품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미디어의 자리에서 e스포츠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다.

이 목표 아래 Alone과 동료들은 가장 새로운 전달 기술을 여럿 시험했다. 초기에는 사진과 글로 된 1차 경기 리포트를 대량으로 만들었고 음성 생중계도 해 봤다. 2004년, 스트리밍 방송 플랫폼이 막 등장하고 PPS 라이브 클라이언트의 전 플랫폼 동시 접속자가 300명 남짓에 지나지 않던 때, PLU의 기술자 Oldman은 이미 PPS 직원 룬쯔(轮子)와 함께 P2P 기술로 생중계를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2004년 SIM 결승에 이르렀을 때는 9,000명 넘는 사람이 온라인으로 지켜봤다. e스포츠는 한 걸음씩 앞을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2005년 CPU는 PLU로 이름을 바꿨고, Alone도 GamesTV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해설을 했다. 그전까지는 PLU의 안자(安佳)와 Friend가 카메라에 나왔고, 경기에 들어가면 Alone과 Friend의 해설 음성으로 넘어갔다.

Alone은 PLU가 처음 몇 해 동안 아무 수입도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주 몇 사람의 열정 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판이 커졌다. 2006년에는 전 세계 이름난 대회의 80퍼센트를 중계했고, PLU도 자체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부담이 점점 무거워졌다.

수입 쪽은 이따금 나타나는 후원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로 쌓아 올린 그 많은 관심도를 돈으로 바꿀 방법이 없었고,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2007년 PLU는 자금줄이 끊겼다. 여덟 달 동안 급여가 나오지 않았고 인원의 3분의 2가 떠났다.

Alone은 집이 상하이에 있어서 하루 지출이라고는 지하철비와 밥값뿐이었다. 그래도 집안에서 오는 압박은 엄청났다.

Alone의 어머니는 어느 날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하루에 열몇 시간을 일하는데, 남들은 1만 위안 넘게 벌고 너는 2,000위안을 버니?" 그 말에는 원망도 있었고 애정도 있었다.

막다른 곳에 몰려야 살길이 열린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은 다 떠밀려서 하게 되는 법이다.

살아남기 위해 PLU에 남은 열몇 사람은 새로운 생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차이나텔레콤과 손잡고 고화질 OB 카드를 내놓았다. 매달 15위안이면 PLU의 고화질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순전히 플레이어들의 지지에 힘입어 매달 1만에서 2만 위안의 수입이 생겼다.

기계식 키보드도 팔았다. PLU 기계 폭풍(机械风暴)이라는 제품을 밀면서, 홍보를 위해 기계식 키보드라는 개념을 알리는 영상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기계식 키보드의 내구성을 거듭 강조했고, 이미 포화된 멤브레인 키보드 시장을 피해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웹 게임 《별의 제국(星际帝国)》의 공동 운영도 맡았다. 이것이 그 뒤 PLU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었다.

시작하기 전에 이 게임의 책임자가 PLU 쪽에 이 게임이면 한 달에 10만 위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Alone은 깜짝 놀랐다. 10만 위안? 그러려면 고화질 OB 카드를 몇 장이나 팔아야 하나?

나중에 보니 이 웹 게임은 정말로 돈을 많이 벌었다. Alone은 감회가 깊었다. "우리는 반평생을 e스포츠에 바쳤는데, 마지막에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 준 것이 웹 게임일 줄은 몰랐다."

웹 게임이 돈이 되기는 해도 그 기간은 대개 길지 않다. 이때 회사의 형편은 그럭저럭 조금 나아졌지만 오래 끄는 싸움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2011년 PLU는 우시(无锡)로 옮겼다. 정책 혜택과 지원을 줄 수 있는 개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는 타이창(太仓) 정부의 초청을 받아 타이창으로 옮겼다.

Alone은 이 무렵 여러 해에 걸친 e스포츠의 시장 개척이 보답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차츰 정계와 재계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부모 세대가 e스포츠를 받아들이기 훨씬 쉽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상업적 투자도 많이 생겨났다.

타이창으로 간 뒤로는 형편이 점점 나아졌다. 큰 행사도 여럿 치렀는데, 특히 TGA를 맡아 치르면서 회사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팀의 경험과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