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Razer 창업자 겸 CEO 민량 탄, 누구보다 앞서가다¶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十八 Razer创始人兼CEO Min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5년 11월 20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0355163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1998년 Razer의 첫 마우스 Boomslang이 나온 뒤로 지금까지, Razer의 제품은 게임의 거의 모든 영역에 닿았다. 디자인은 언제나 남보다 앞서 있었고, 수많은 주변기기 업체가 앞다퉈 따라 하는 대상이었으며, 많은 e스포츠 선수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기도 했다.
Razer가 내놓은 수많은 혁신 가운데 처음으로 선보인 숨쉬기 조명, 곧 밝기가 숨을 쉬듯 천천히 오르내리는 조명은 이제 마우스 업계의 기본 사양이 되었다. 그리고 이 혁신 뒤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민(Min)은 자주 한밤중에 부모 몰래 게임을 했는데, 마우스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우스에 불을 하나 달면 해결되지 않을까. 그렇게 민이 마우스를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숨쉬기 조명이 태어났다. 조명이 밝아졌다 어두워지는 주기도 디자이너가 초시계를 들고 민의 호흡을 재서 계산해 낸 것이다.
17년이 지나 Razer는 전 세계 게이머용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이끄는 브랜드가 되었다.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를 위해 일하는 데 매달린 민도 그 과정에서 세계 게임계, e스포츠계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중에는 역사에 남길 만한 것도 적지 않다.
민, 곧 민량 탄(Min-Liang Tan, 陈民亮)은 1977년 11월 5일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바깥에서는 민이 부잣집 아들이라는 말이 오래 돌았지만 사실은 소문과 다르다. 아버지 쪽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고, 아버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야 학업을 마친 국비 유학생이었다. 그 뒤로는 스스로 애써서 자식 넷을 다 키워 냈다.
민은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지만 집에 새 컴퓨터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형과 함께 286에 해당하는 2세대 애플 컴퓨터 한 대로 게임을 해야 했다.
민의 집안은 아주 전통적이어서 부모는 어릴 때부터 그의 앞길을 짜 놓았다. 그는 싱가포르 국립대학 법학과를 나왔고, 싱가포르 변호사협회의 자격 인증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해 아시아 최고 수준의 기술법 로펌 가운데 하나인 키스톤(基斯通)에 들어갔다. 그렇게 기술법과 지식재산권을 다루는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게임 주변기기를 바꿔 놓겠다는 꿈이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1995년, 민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변호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친한 친구와 함께 맨바닥에서 Razer를 세웠다.
민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막내라서 다행이었다, 형과 누나들이 집안의 몫을 다 해 놓은 덕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1998년, 아직 e스포츠 선수이던 민은 Razer의 또 다른 창업자 로버트 크라코프(Robert Krakoff)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곳은 레이저 스캐닝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Karna라는 회사였는데, 스캐닝의 주파수와 정밀도를 몇 배로 끌어올릴 수 있는 새 기술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민은 그 기술로 게이밍 마우스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민과 로버트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로 Boomslang을 만들어 냈다. 같은 종류의 다른 제품보다 정밀도가 5배 높았고, USB 단자를 썼으며, 최고 해상도는 1,800dpi였다.
처음에 민은 그저 자기가 대회에서 유리해지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e스포츠판 친구들이 이 소식을 알고는 저마다 말을 옮기며 앞다퉈 주문을 넣었다.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전했다. 그렇게 마우스의 새 시대가 열렸고, 뒤이어 Razer가 정식으로 세워졌다.
완전히 새로운 제품은 기술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시장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당시 수석 디자이너이자 수석 플레이어였던 민의 첫 번째 계획은 Razer를 프로 대회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생각은 단순했다. Razer는 프로 게이머를 위한 브랜드이고, 그때 세계에서 e스포츠 프로화가 가장 뜨거운 곳은 한국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역사의 빈칸을 메우는 이야기다.
WCG의 전신이 2000년의 WCGC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WCGC의 전신이 Battle Top이라는 대회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대회는 Battle Lee라는 한국 사람이 열었다. 민은 1998년 Razer를 위해 혼자서 한국으로 날아갔다. 경비를 아끼면서 동시에 한국의 주변기기 환경을 알아보려고, 그는 호텔에 묵지 않고 PC방에서 먹고 자는 쪽을 택했다.
민이 나타나자 Battle Lee는 몹시 놀랐다. 협력을 이야기하러 찾아온 외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대회 쪽 협력 말고도, 민은 2000년에 퀘이크 시대의 최정상 선수 Fatal1ty를 찾아가 그의 첫 후원사가 되었다. Fatal1ty도 그해 퀘이크 선수를 위해 따로 개량한 Boomslang의 도움으로 수많은 큰 상을 받았다.
Razer는 이 일로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핵심 스타 지대에서 퍼져 나간 입소문은 아주 좋은 보답으로 돌아왔다. Razer 마우스의 판매량이 계속 올라갔고, 회사도 e스포츠라는 홍보 노선을 굳게 잡았다.
2001년, e스포츠라는 개념이 아직 초기 형태에 지나지 않던 단계에서 Razer는 과감하게 10만 달러를 내고 CPL 대회의 타이틀 스폰서가 되었다.
지금과 견주면 많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전에 없던 역사적인 액수였다. 게다가 그해 Razer는 넉넉한 회사가 아니었다. 제품군도 단출했고, 2000년 타이완 지진으로 장비와 재고를 크게 잃어 회사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다행히 이때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2년의 숙성을 거쳐 퀘이크를 대신했다. 관객층이 더 넓고 한 세대에 영향을 끼친 FPS e스포츠 종목이 된 것이다. 민은 카운터 스트라이크라는 종목의 잠재력을 앞서 내다봤고, 종목이 막 시작된 시기에 이미 카운터 스트라이크 대회를 후원했다.
이 무렵 Razer는 생산 기지를 중국 본토로 옮겼고, 해상도 2,100DPI의 Boomslang을 내놓으며 FPS 플레이어의 요구에 맞춰 설계를 계속 다듬었다.
2004년은 민에게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 Razer라는 회사는 이름은 아주 났지만 재무 상태는 늘 좋지 않았다. 회사는 전문 경영인들이 맡아 운영했는데, 민이 보기에 당시 회사 제품의 설계와 홍보는 게임을 하는 사람의 손에 있지 않았다.
실적 앞에서 전문 경영인들은 차례로 떠났고, 민과 로버트가 다시 회사를 맡기 시작했다. 로버트가 사장을, 민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두 사람이 힘을 모은 끝에 2004년 민이 설계한 Razer Diamondback이 세상에 나왔다.
Razer Diamondback의 영광¶
이것은 Boomslang 시리즈를 진짜로 대신할 수 있는 주력 제품이었다. 광학 마우스로 580만 화소를 지원했고, 초당 6,400회가 넘는 이미지 캡처 속도와 초당 40인치가 넘는 이동 속도를 갖췄다. 겉모습도 아주 빼어났다. 고무를 입힌 큼직한 미끄럼 방지 버튼을 써서 손 크기가 어떻든 잘 맞았다.
2004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Razer는 처음으로 WCG를 후원했다. 그전에는 재무 상태가 좋지 않아 민도 방법이 없었다. 이제 제품이 있고 방향이 있으니 민은 자신이 넘쳤고, 망설임 없이 Diamondback과 직원 서너 명을 데리고 왔다. 컴퓨터를 200대 넘게 깔았는데, 대회가 끝날 때 보니 마우스 100개 남짓이 없어져 있었다. 사람이 적어서 도저히 다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각국 e스포츠 선수들이 슬쩍 가져간 그 마우스 100여 개가 나라마다 열린 창문이 되었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이 놀라운 마우스를 동료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었고, Razer는 이때부터 세계로 나아갔다.
2005년, Diamondback이 크게 성공한 뒤 그 경험을 충분히 흡수한 세계 최초의 레이저 마우스 Razer Copperhead가 시장에 나와 게임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Razer Copperhead라는 명작¶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Copperhead를 그리워하는 플레이어가 많다. 성능과 손맛이 같은 시대의 마우스를 너무 크게 앞질렀고, 플레이어들에게 좋은 기억을 그만큼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워크래프트 3가 가장 번성하던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이 마우스를 쥐고 몇 번이고 승리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두 제품이 크게 팔리면서 "게이머에게서 시작해 게이머에게 힘을 준다(For Gamers. By Gamers.)"라는, 플레이어를 한가운데 두는 민의 설계 철학도 이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같은 해 이미 예순이 넘은 장난기 많은 창업자 로버트가 은퇴하자, 민이 그를 이어 Razer의 CEO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2006년, 날개가 여문 Razer는 제품군을 넓히기 시작했다. 매크로 설정과 안티 고스팅을 지원하는 Razer Tarantula 키보드에서, 세계 최초로 5.1채널 위치 음향 시스템을 지원한 Razer Barracuda 게이밍 헤드셋까지, 민은 정말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2006년 말, 새로운 마우스 시리즈가 다시 한번 시장 전체를 흔들었다. Razer DeathAdder 게이밍 마우스가 시장에 나온 것이다.
그 뒤로는 제품이 점점 많아지므로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겠다. 대신 민이 한 다른 일 하나를 짚어 두겠다. 그는 Razer가 전 세계에 디자인 센터 세 곳을 세우도록 밀어붙였다. 각각 샌프란시스코, 타이베이, 싱가포르에 있다. 여기에 앞으로 3년에서 10년 뒤의 기술을 살피는 기술 센터도 하나 세웠다.
이 연구 조직들은 아주 비밀스럽다. 민은 세상에서 전체 프로젝트 목록을 아는 사람이 셋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연구원들이 주변기기만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인기 없고 주류가 아닌 기술도 연구하는데, 그 안에는 긱 문화가 가득하고 별난 사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영국인 디자이너는 책상 밑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고, 씻지 않았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남이 고기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인도로 수행을 떠났다고 한다. 또 민은 온갖 분야에서 사람을 뽑는다. 한번은 YouTube에서 사람을 데려와 영상 스트리밍 기술을 연구시킨 적도 있다. 별생각 없이 벌인 일처럼 보여도, 그것이 회사를 끝없는 가능성으로 채웠다.
초박형 게이밍 노트북 Razer Blade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전까지 시장에 나온 게이밍 노트북은 하나같이 두껍고 무거웠다. 민은 플레이어에게 필요한 것은 성능과 가벼움을 함께 갖춘 게이밍 노트북이라고 봤고, 연구원들을 데리고 그것을 만들러 갔다.
그러나 접촉한 공급사 대부분이 그에게 당시 기술로는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Powerbook, OQO 같은 전문 노트북 제조사를 사들였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관련 연구 인력을 모아 3년을 들여 직접 팀을 이끌었고, 정해진 틀을 깨고 끝내 세계에서 가장 얇은 고성능 게이밍 노트북을 만들어 냈다.
민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 자기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 몰두할 기회를 주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이 돌아온다고.
지금도 그렇다. Razer라는 브랜드가 이미 사람들 마음에 깊이 자리를 잡았는데도, 그들은 해마다 캠퍼스 투어에 많은 공을 들이고 게임 대회와 프로 선수를 후원한다.
민이 "For Gamers. By Gamers."를 Razer의 뿌리이자 샘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멈춰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된다.
누구보다 앞서간 사람, Razer CEO 민량 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