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촨밍징(吉川明静) '장밍징'과 일본 게임의 인연¶
저자 BBKinG(류양, 刘洋)이 계획했으나 끝내지 못한 두 번째 책 《중국 게임의 이면사》 중 한 장.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一 吉川明静“张茗靖” 的日系游戏情缘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4년 9월 11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845155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장밍징(张茗靖)은 친구들이 모두 '지촨(吉川)'이라고 부른다. 1977년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국유기업 간부, 어머니는 공장의 시험 분석원이었다. 지금은 성다게임즈(盛大游戏) 산하 메이위(美娱)의 프로덕트 디렉터로 《체인 크로니클(锁链战记)》의 운영을 맡고 있다. 매출 규모가 천만 위안급인 일본계 모바일 게임으로, 애플 앱스토어의 매출 순위 10위 안에 적어도 두 번 들었다.
지촨은 일본 게임과 일본 역사에 두루 밝은 일본통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의 이름난 역사 소설 여러 권을 번역해 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하나노 게이지(花之庆次)》, 《량촨샹커(两川相克)》, 《웨이신밍원자이부(维新名文摘补)》다. 아마 많은 사람에게는 그의 필명이 더 익숙할 것이다. 지촨밍징(吉川明静)이다. 친구들이 부르는 '지촨'은 이 필명의 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아 먹고 입는 걱정이 없었고, 정보가 편하게 오가는 대도시에서 태어난 덕에 어린 시절 그에게는 정신적 양식 쪽에서 선택지가 많았다.
그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상하이에는 도쿄 아키하바라에 견줄 만한 만화와 게임의 성지가 있었다. 원먀오(文庙)다.
원먀오에서는 주말마다 책 시장이 섰다. 중고 책과 만화를 잔뜩 살 수 있었고 이름난 게임 가게도 많아 최신 게임 카트리지를 살 수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인터넷이 퍼진 뒤로는 점점 시들해졌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상하이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즐거운 기억을 많이 남겼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세인트 세이야(女神的圣斗士)》의 새 단행본을 가장 먼저 살 수 있었고, 닌텐도 패미컴(Family Computer), 곧 흔히 FC 또는 훙바이지(红白机)라고 부르던 그 기기의 게임 카트리지도 살 수 있었다. 1988년에 나온 세가 메가 드라이브(중국에서는 리티지 立体机, 줄여서 MD라고 불렀다)와 1990년에 나온 슈퍼 패미컴(Super Famicom, SFC)의 온갖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 원먀오는 지촨의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다니던 상하이 다퉁 중학(上海大同中学)은 원먀오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방과 후에 친구들과 걸어가 만화와 게임을 뒤지는 것이 거의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당시의 만화와 게임은 거의 다 일본 것이었고 게임은 대개 번역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게임을 하려면 일본어가 먼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것이 그가 일본어를 배우게 된 첫 동기가 되었다.
지촨의 청소년기에 큰 영향을 준 또 하나는 주간 일기 쓰기였다.
학교 다닐 때 일기나 주간 일기를 쓰라는 요구를 받아 본 사람은 많다. 그런데 장밍징이 겪은 것은 조금 달랐다. 그들의 주간 일기는 선생님이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끼리 서로 고쳐 주는 것이었고, 선생님은 마지막에 훑어보기만 했다. 이것이 학생들 사이의 글로 하는 교류를 크게 북돋웠고, 그들의 반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하나 생겨났다.
하드커버 노트(硬面抄)
여럿이 하드커버 노트 한 권에 함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앞쪽은 이어 쓰기 연재였다. 앞사람이 써 놓은 줄거리에 맞춰 각자 한 장씩 쓰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뒤쪽은 각자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자리여서 온갖 종류가 다 있었다. 연애물, 무협, 타임슬립물, 심지어 학예회 대본까지 있었고 서로 돌려 읽으며 평을 달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쓴 이 하드커버 노트 세 권을 지촨은 지금도 집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끝까지 함께 써 온 몇 사람은 절친한 벗이 되었고, 그 우정은 아주 단단해서 지금도 자주 연락한다.
게임하기, 일본어 배우기, 그리고 글쓰기.
이 세 가지가 뜻하지 않게 그의 첫 꿈을 만들어 주었다. 자기 손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학 입시에서 일본어과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그는 처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 일본어 야간 학교에 등록했고, 자기가 다니던 상하이 사범대학(上海师范大学) 도서관에서 일본 책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서가를 찾아냈다. 잘 번역된 일본 소설도 많았고 일본어 원서 소설도 많았다.
지촨은 말한다. 게임 속 일본어는 비교적 쉽지만 게임 배경에 깔린 일본의 옛이야기는 대단히 복잡해서, 이 게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내려면 일본 역사와 문화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일본 역사 소설을 대량으로 읽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독학하는 그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역사 소설은 이야기는 복잡해도 외래어가 현대 소설만큼 많지 않았고 한자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읽으면서 짐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지촨은 일본 책을 300권 가까이 기어이 다 읽어 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 시바 료타로가 일본 센고쿠 시대의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성 전투를 그린 소설 두 권, 《세키가하라(关原)》와 《조사이(城塞)》다.
일본 세가의 《사쿠라 대전》
지촨이 대학 시절에 한 이 게임은 그 뒤 그의 운명을 여러 번 바꿔 놓았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사쿠라 대전》 이야기가 나오면 지촨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물 설계가 대단히 풍부한 게임이고 인물마다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어서 누구든 한 캐릭터는 좋아하게 된다고. 게다가 이 게임은 SLG 전략 게임과 RPG를 혁명적으로 잘 결합해 몰입감이 대단히 강하다고. 그는 수백 시간을 들여 모든 캐릭터의 이야기를 끝까지 봤다.
1998년 졸업한 뒤 그는 자기 취향과 특기를 결합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동인 소설, 그리고 게임과 역사를 주제로 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중국 간행물에 동인 소설을 발표한 첫 사람이 그라고 한다. 《뎬나오상칭바오(电脑商情报)》 같은 종이 매체에도 오래 원고를 실어서 원고료로 먹고살아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그 생각은 곧 현실의 온갖 불안정함에 깨졌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2000년, 그는 베이징에서 IT 잡지 편집자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도 그는 게임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당시 게임 업계 분위기가 가장 좋은 곳이 베이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갔다. 지하실 방에 들어가 살면서 베이퍄오(北漂), 곧 베이징을 떠도는 외지 사람이 되었다.
운명은 때로 이렇게 극적이다.
그 IT 잡지는 석 달 만에 문을 닫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회사로 옮겨 게임 웹사이트 편집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회사가 곧바로 일본 세가의 게임을 퍼블리싱하겠다고 발표했고, 그중에 지촨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아는 《사쿠라 대전》이 있었다. 이 회사는 그때부터 게임 퍼블리싱과 운영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갈수록 커졌고, 장밍징이 떠난 뒤에는 이름난 온라인 게임 《모젠(魔剑, 서구권 출시명 Shadowbane)》까지 퍼블리싱했다.
이 회사의 이름은 톈런 인터랙티브(天人互动)다.
톈런 인터랙티브가 중국 게임 판에 남긴 영향은 대단히 깊다. 나중에 지금 게임 판의 거물급 인물도 여럿 이곳에서 나왔다. 소후 창유(搜狐畅游)의 CEO 왕타오(王涛), 퍼펙트 월드(完美时空)의 SVP 리하이이(李海毅) 같은 사람들이다.
지촨이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그때 톈런 인터랙티브에서는 마케팅부의 평범한 직원 하나였을 뿐이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들 한다. 사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기회는 준비가 되어 있고 게다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에게 온다.
장밍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회사가 세가의 《사쿠라 대전》 PC판을 들여왔다는 것을 알자 그는 먼저 나서서 거들었다. 사실 그때 이미 타이완 쪽 회사가 《사쿠라 대전》의 중국어화 작업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장밍징이 꼼꼼히 살펴보니 타이완 쪽 번역과 대륙의 언어 습관 사이에 차이가 컸다. 그래서 프로젝트 책임자를 찾아가 중국어화를 다시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회사는 그가 제법 진지한 것을 보고 한번 해 보라고 했다.
그 뒤 두 달 남짓 동안 장밍징은 자기 본업을 해내면서 남는 시간을 전부 써서 오륙십만 자에 이르는 문서를 번역했다. 밤낮없이 번역하고 자료를 찾았다. 힘들었지만 그는 대단히 즐거웠다. 자기 꿈에 직접 참여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2001년 8월, 톈런 인터랙티브가 낸 중국어 정품 《사쿠라 대전》은 10만 세트가 팔렸고 염가판과 TV판도 나왔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영향이 대단히 컸다. 불법 복제가 미쳐 날뛰던 그 시절에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성적이었다.
베이퍄오 시절 이야기를 하자면, 지촨은 게임 원고를 쓰면서 절친한 친구도 몇 명 알게 되었다. 춘위(村雨), Salala, cOMMANDO, 상디폔아이부빙(上帝偏爱步兵)이다. 마지막 아이디는 신은 보병을 편애한다는 뜻이고, 그 부빙(步兵)이 바로 CSCHINA의 창립자다. 이들도 대단히 이름난 게임 필자였다. 당시 이들은 아시아게임(亚联游戏)에서 일하며 베이징 간루위안(甘露园) 단지에 함께 집을 얻어 살았다. 장밍징은 주말마다 거의 빠짐없이 건너가 함께 게임을 하고 활을 쐈고, 밤에는 그들 거실에서 잤다. 대학 기숙사 같은 느낌이 났다.
나중에 지촨은 역시 아시아게임에서 일하던 또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그의 인생에서 귀인이 되었고 스승이자 벗이었다. 나중에 텐센트 상하이로 가서 부사장이 된 천광(陈光)이다.
2003년, 장밍징은 상하이로 돌아와 텐센트 상하이 법인에 들어가 해외 사업을 맡았고 일본 게임을 들여오는 일을 했다.
여러 해를 돌고 돌아 마침내 자기 손으로 게임을 만드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2004년, 일본 세가가 다시 찾아와 텐센트와 게임 퍼블리싱을 논의했고 지촨은 자연스럽게 정식 창구가 되었다. 텐센트를 대표해 세가와 접촉하는 자리에서 지촨은 두터운 일본 문화 소양과 세가 게임을 하나하나 꿰고 있는 모습으로 일본 쪽 대표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같은 해에 세가가 게임 플랫폼 전략을 펴려고 중국 법인을 세울 때 지촨은 정식으로 초청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세가 게임을 하며 자란 사람에게 이것이 얼마나 꿈에 그리던 일이고 더없는 영광이었겠는가. 지촨은 거의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다. 세가 네트워크 차이나(世嘉网络中国)에 들어간 뒤에는 게임 프로듀서를 맡아 《사쿠라 대전 온라인》과 그때 막 제안된 《세인트 세이야 온라인》을 담당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촨은 이때 회사를 옮긴 것이 옛 친구 천광에게 조금 미안하다고 여긴다. 다행히 천광은 개의치 않았고, 여러 해 뒤에 다시 한번 그의 귀인이 되어 주었다.
지촨은 세가 차이나에서 일한 날들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시절은 그가 가장 말하기 꺼리는 시기가 되었다.
그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한마디로 그 2년을 요약했다. 중국을 모르는 일본인 한 무리가 중국을 모르는 한국인 한 무리를 데리고 중국 직원들에게 시장 전략과 게임 콘텐츠 개발을 지시했으니 참패는 정해진 결말이었다는 것이다.
2006년 중반, 지촨은 실망과 분노 속에 사표를 냈고 세가 네트워크 차이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 뒤 몇몇 매체가 내막을 보도한 적이 있는데, 현지 사정에 맞추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그렇게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롤러코스터 같은 기복에 지촨은 한동안 아주 가라앉아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 그는 작은 회사를 하나 차려서, 그동안 쌓아 온 중국과 일본 게임 판의 인맥을 밑천으로 사람과 일을 이어 주는 중개, 게임 퍼블리싱 알선, 인재 헤드헌팅을 했다. 버는 돈은 많지 않았지만 지촨은 묵묵히 쌓아 가며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렸다.
2010년, 애플 아이패드가 나왔다
지촨은 모바일 게임이 앞으로 주류가 될 것이라고 봤고 이쪽에서 파고들 계획을 세웠다. 모션 코믹을 실마리로 삼아 자기 지식재산권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들어 놓으면 그다음에 게임 개발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자체 게임 개발로 가는 제법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촨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택한 방법이었다. 그때는 게임 개발의 비용 문턱이 여전히 높아서 직접 만들고 싶다면 투자를 받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기 도굴 소설 《구이추이덩(鬼吹灯)》의 만화 판권을 사서 모션 코믹 앱을 만들었고 사람을 구해 음악까지 따로 붙였다. 투자에 막 가닥이 잡히려던 참에, 개발을 끝낸 또 하나의 풀 모션 코믹이 애플 심사에 걸려 좀처럼 통과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바로 뒤이은 투자 유치의 실패로 이어졌다.
여러 해 쌓아 온 것이 그렇게 또 한 번 물거품이 되었다. 예전처럼 작게나마 넉넉하던 생활로도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내와 딸이 생긴 뒤로 그는 운명 앞에 더욱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자기 꿈을 위해서도, 서른다섯의 지촨은 다시 한번 나가서 부딪쳐 보기로 했다.
2012년, 천광은 이미 성다게임즈의 부사장이었고 지촨을 다시 불러들였다. 지촨도 곧 일본 세가 쪽과 연락이 닿았는데, 마침 세가가 새 게임 몇 개를 들고 중국의 차이나조이에 참가하려던 참이었다. 그중에 일본에서도 아직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은 《체인 크로니클》이 있었다.
지금 지촨은 자기 꿈을 이룬 셈이다. 게임을 만들고 있고 깨달은 것도 많다. 모바일 게임도 그가 예상한 대로 대단히 치열한 경쟁 단계에 들어섰다. 특히 최근 2년 동안 카드 게임이 크게 유행하면서, 지촨은 일본계 게임에 쌓인 성숙한 카드 게임 경험을 엮어 자기 생각을 담은 글 세 편을 썼다. 《카드 게임 총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카드를 뽑게 할 것인가》, 《카드의 거래 시스템》이다. 이 글들은 게임 업계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게임을 운영하며 알아낸 것도 여럿 내놓았다. 예를 들어 게임 안의 판촉 행위는 양날의 검이어서 어떻게 쓸지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지촨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중국 사람이 직접 개발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외국 게임에 장점이 많기는 해도 국내 시장의 습관과 수요에 완전히 맞지는 않으니 그들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일본계 게임의 높은 제작 수준만이 아니라 서구 게임의 큰 판을 보는 시야까지 받아들이고, 거기에 중국 문화와 플레이어의 수요를 결합해야 운영에서 더 빠르게 반응하고 조정해서 제품이 오래갈 수 있다고.
지촨밍징 '장밍징'과 일본 게임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