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I-Rocks 다한, 다 걸어서 얻은 인생 전설¶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二十三 I-Rocks大韩 豁出来的人生传奇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2월 13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36641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한보한(韩伯翰), 업계 친구들은 모두 그를 다한(大韩)이라고 부른다. 성인 한(韩)에 클 대(大)를 붙인 별명으로, 큰 한씨라는 뜻이다. 1983년 1월 허베이(河北)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자랐고, 게임과 주변기기에 미친 사람이며, 독일의 이름난 기계식 키보드 브랜드 Cherry의 중국 총판이자 I-Rocks의 공동 창업자다.
다한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수염을 말끔히 깎은 리쿠이(李逵) 같다는 것이었다. 리쿠이는 소설 《수호전(水浒传)》에 나오는 검고 우락부락한 호걸이다. 검고 다부지고 단단한 몸에 눈빛은 횃불 같았고, 두 손에 도끼만 들면 그대로였다.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술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그날 인터뷰가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끌려가 밤새 술을 마셨다. 눈이 풀릴 무렵 그가 갑자기 음악을 껐다. 웃음기를 거두고 돌아앉아 차가운 불이 이는 눈으로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인터뷰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2011년 다한은 먼저 나서서 WE e스포츠 클럽과 맞춤 브랜드 유통 방식을 만들었다. 3년 뒤 그는 I-Rocks 주변기기 시리즈의 연 매출을 열 배로 키웠을 뿐 아니라, 중국의 많은 e스포츠 클럽과 해설자와 미디어에게 관심도를 돈으로 바꾸는 가장 곧고 효과적인 길을 열어 줬다.
오늘날 다한 모델의 성공으로 하드웨어 주변기기 업체는 e스포츠 업계에서 더는 후원사에만 머물지 않고 협력 파트너가 되었다. e스포츠인들도 후원을 가만히 기다리는 처지에서 벗어나 업체의 제품을 앞장서서 파는 스포츠 문화 상인이 되었다. 이것이 중국 e스포츠의 발전에 남긴 영향은 대단히 깊다.
당신은 다 걸 수 있는가? 걸 수 있는가?¶
그날 다한이 한 이야기는 e스포츠와 관계가 없으므로 옮기지 않겠다. 다만 술자리에서 헤어질 무렵 다한은 나를 붙잡고 한 마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다 걸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 걸 수 있는가? 걸 수 있는가?
나는 그가 스스로를 위해 한 번 증명해 보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중국에서 말하는 훙싼다이(红三代), 곧 혁명 세대의 손자 대이자 장군 집안의 후손이므로, 남들 눈에 그는 굳이 다 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치른 값은 오히려 남보다 컸다.
항일 전쟁 시기에 다한의 할아버지도 별명이 다한이었다. 그는 본래 바오딩(保定)의 지주였다. 일본군이 쳐들어와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고 빼앗자,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집안 장정들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장자커우(张家口)의 산간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장자커우 지역의 지방지에는 당시 일본군이 했다는 말이 한 줄 적혀 있다. 다한과 샤오한은 한 해를 넘기지 못한다. 샤오한(小韩)은 작은 한씨라는 뜻으로 그 지역의 또 다른 유격대원을 가리키고, 다한은 한보한의 할아버지다. 뒤에 샤오한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죽었고, 다한은 끝내 버티며 유격전을 이어 가 해방을 맞았다. 다한의 외할아버지는 제4야전군(四野)의 정규군이었고 항일 전쟁과 해방 전쟁, 곧 국공 내전, 그리고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겪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모두 군인이었으므로 다한의 아버지도 어려서부터 그것을 보고 자라 자연스럽게 군인이 되었고, 지금은 군의 고위 장성이다.
집안 배경은 대단해 보이지만, 군인 가족으로 부대를 따라다녔으므로 그의 어린 시절은 끊임없는 이사로 채워졌다. 농촌, 산골, 적의 정찰이 닿지 않는 외진 주둔지까지 다한은 다 겪었다. 부대가 가는 곳이면 그도 따라갔다. 중학교를 마칠 때 현에서 2등 안에 들어 칭화대학 부속중고등학교(清华附中)에 붙고 나서야 베이징 생활이 겨우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컴퓨터 게임에 빠졌다. 다만 게임을 좋아한 이유는 남들과 달랐다. 다한은 여럿이 함께 게임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어린 시절 내내 옮겨 다니며 붙박이로 살 곳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친구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느낌을 남보다 아꼈다. 이것은 뒷날 그가 사업을 하면서 남과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은 밑바탕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그는 게임 쪽으로 완전히 걷잡을 수 없이 나갔다.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놀았다. 컴퓨터를 침대에 올려 두고 날마다 일어나 앉으면 곧바로 게임이었고, 화장실 가는 것 말고는 침대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 카운터 스트라이크, 워크래프트 3를 모두 잘해서 기숙사 건물에서는 자주 그가 최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한이 같은 학교 친구 하나와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했는데 상대에게 졌다. 그것도 아주 크게 벌어진 차이로 졌다. 그는 몹시 뜻밖이었고, 그래서 마침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 친구에게 배우러 갔다.
뜻밖에 침대에서 내려온 그 한 번이 다한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줬다.
다한은 그 친구가 아주 별난 마우스를 쓴다는 것을 알았다. IE3.0이었다. 볼이 없는 광 마우스가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움직임을 잡아낸다니. 그때의 다한에게 이것은 머리가 확 트이는 깨달음이었다. 좋은 주변기기 하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뒤 몇 해 동안 다한은 온갖 주변기기를 미친 듯이 모으기 시작했다. 국내외에서 새로 나온 이름난 브랜드 제품을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구해다 연구했다. 대다수가 Razer와 Cherry라는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에 그는 이미 두 회사의 최신 장비를 갖고 있었다.
대학 4년을 다한은 주변기기 포럼에 붙어 살고, 주변기기 자료를 찾고, 주변기기 리뷰를 쓰며 보냈다. 게임과 주변기기를 깊이 알수록 이것이 앞으로 일을 낼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앞날을 두고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
졸업할 때 다한은 아버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서는 그가 군에 들어가기를 바랐고 길도 이미 다 깔아 두고 있었다. 집안의 인맥과 배경을 생각하면 군은 다한에게 그야말로 고속도로였다. 그러나 다한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다툼 끝에 그는 차분하게 아버지에게 물음 하나를 던졌다. 군인은 나라의 땅을 넓히든가 나라와 집을 지키든가 둘 중 하나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기이니 앞의 것은 있을 수 없고, 뒤의 것도 제 차례까지 오겠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다한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가장 강한 집단은 군대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전장에서 한번 겨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잠자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더는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지만 다한이 스스로에게 지운 짐은 가볍지 않았다. 친척과 친구들이 보기에 훙싼다이가 마우스와 키보드를 판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은 그가 장난을 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자기 손으로 뭔가를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중관춘(中关村)으로 달려가 매대에 섰다. 온갖 주변기기를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판매대 일자리는 금방 구했다. 그때부터 날마다 온갖 손님을 상대하며 사람의 낯빛을 읽는 법을 익히고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갔다. 그렇게 자신을 갈면서 시장과 유통을 다루는 법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이 그에게 다 걸어 볼 기회를 한 번 줬다.
2005년 다한은 어머니와 홍콩 여행을 갔다. 남들은 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샀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Cherry의 홍콩 지사를 찾아냈다. 그때 중국 본토에서 기계식 키보드라는 물건은 아직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골수 마니아들이 모이는 포럼에서나 소개 글 몇 개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한은 짐을 풀자마자 그 이름을 좇아 찾아갔다.
그러나 약속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한은 Cherry 안내 데스크에서 한참을 설명하고 나서야 자기가 온 까닭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홍콩 사람들은 장사에 밝기는 해도 서비스 의식이 강해서, 다한을 문 앞에서 돌려보내는 대신 레이먼드(Raymond)라는 마케팅 담당자를 불러 그를 맞게 했다. 바로 이 레이먼드가 다한의 빛나는 길의 시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다. 레이먼드도 그때는 다한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도무지 몰랐지만, 그래도 다한에게 Cherry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고 여러 제품을 참을성 있게 설명해 줬다.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다한이 키보드를 몇 개 사고 싶다고 하자 레이먼드는 홍콩 지사는 도매만 하고 소매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1차 대리점을 상대로 대량 도매만 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다한은 물러서지 않고 그러면 최소 몇 개부터가 도매냐고 물었다. 최소 열 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한은 멍해졌다. Cherry 키보드는 늘 값이 비쌌다. 한 개에 800위안 남짓이면 지금 대학생에게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값인데 하물며 8년 전이었다. 그러나 다한은 그 자리에서 이를 악물고 사 버렸고, 그때까지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이 전부 들어갔다. 다 거는 것 아니냐, 그러면 걸면 된다.
그래서 남들이 홍콩에서 옷과 가방과 화장품을 한 아름씩 안고 돌아올 때, 그는 죽도록 무거운 기계식 키보드 열 개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다한은 짊어지고 오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 열 개를 어떻게 팔지 궁리하는 것에 견주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키보드 값에 운임까지 붙어 이미 가격이 아주 높았는데, 그때 중국에서는 다들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고 있어 기계식 키보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건을 판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고달픈 개념 보급의 길이 시작되었다. 다한은 스스로를 몰아붙여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번역하고 사진을 붙여 포럼에 글을 올렸다. 그 시절 이름난 카운터 스트라이크 포럼인 ESAI와 GZ 같은 사이트에는 모두 다한이 다녀간 자취가 남았다.
어릴 때 할아버지는 다한에게 유격전 이야기를 자주 해 줬다. 적의 강한 쪽을 피해 새 전장을 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가 고되기는 했어도 다한은 기계식 키보드라는 길이 통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멤브레인 키보드 시장은 큰 업체들이 이미 거의 나눠 가진 뒤였고, 기계식 키보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자 블루 오션이었기 때문이다. 전략에서 다한은 길을 제대로 잡았다. 여기에 포럼에서 벌인 개념 보급이 효과를 내면서, 하늘 같은 값이 붙은 그 기계식 키보드 열 개를 그는 끝내 다 팔았다.
마침 그때 홍콩의 레이먼드가 고객 사후 관리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그저 궁금해서 사정을 물어본 것이었는데, 다한이 다 팔았다고 하자 몹시 놀랐다. 그러고는 다한에게 Cherry의 본토 지정 판매상을 맡을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키보드 한 개당 10달러씩 값을 내려 주겠지만 다한이 훨씬 큰 규모의 물량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걸 것인가, 말 것인가. 물음이 다시 한 번 다한 앞에 놓였다.
다한이 보기에 위험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될 만한 장사였으므로 이를 악물고 돈을 빌려 걸기로 했다. 다한은 받아들였다. 물러설 곳 없이 맞붙으면 담이 큰 쪽이 이긴다. 운도 그의 편에 섰다. 뒤에 대금을 치를 때 마침 달러 금리가 떨어져 그는 작게나마 이득을 봤다.
초기에는 키보드 장사만으로 먹고살 수 없었으므로 다한은 국유 기업에도 들어갔다. 큰 회사가 일하는 방식을 배우면서 한편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팔았다. 키보드와 마우스 장사가 커지면서 포럼에서 파는 것만으로는 주된 판매 통로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2008년 초 그는 중관춘에 20제곱미터짜리 작은 가게를 열었다. 임대료가 아주 비쌌다. 다한은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일 두 가지를 동시에 뛰는 나날을 시작했고 주말은 온통 가게에서 살았다. 그는 그때가 고되기는 했어도 국유 기업에서 배운 프로젝트 경험은 대단히 값진 것이었다고 말한다. 뒷날 Cherry 같은 큰 회사를 상대하는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운명은 용기와 준비를 갖춘 사람만 반긴다¶
2008년 독일 Cherry 본사에 있던 중국인 한 사람이 다한의 귀인이 되었다. 그의 친척이 베이징 중관춘에서 다한이 벌이던 Cherry 홍보를 보고 광고와 마케팅이 제법이라고 여겨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알린 것이다. 이 이야기에 Cherry 독일 본사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중국 본토에서 홍보에 단 한 푼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누군가가 자기네 제품을 이렇게 뜨겁게 만들어 놓았는가?
온갖 궁금증과 복잡한 마음을 안고 이 중국인 직원이 다한에게 연락을 해 왔고, 이어서 독일인 제품 매니저 한 사람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날아와 다한을 만났다. 그 뒤의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렸다.
왜 순리대로라고 하는가. 그것을 말하려면 먼저 Cherry의 역사를 짚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때와 그 뒤에 벌어진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Cherry는 1953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크게 보면 Cherry는 스위치를 만드는 회사다. 그러나 독일인이 스위치 하나를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스위치 만드는 솜씨를 하나의 예술로 만들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Cherry의 제품은 주로 군수 분야에 쓰였다. 대형 컴퓨터와 연구 장비와 제어 시스템도 모두 Cherry의 제품을 썼다.
냉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군은 Cherry의 가장 큰 구매자였다. 덕분에 Cherry는 처음부터 생산 라인을 넓힐 자금이 넉넉했고, 1980년대에 상용 컴퓨터가 빠르게 자라는 단계에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Cherry에는 생산 라인이 모두 24개 있었고 해마다 MX 스위치 2억 4,000만 개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생산 라인들은 지금도 그대로 쓸 수 있다. 다시 말해 Cherry는 이 라인들의 원가를 이미 오래전에 뽑았다는 뜻이다. 이 분야에서 그들은 기술과 원가 모두에서 절대적으로 앞서 있고, 그것을 넘어서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멤브레인 키보드 같은 새 기술이 나오면서 기계식 키보드의 비싸고 무겁다는 약점이 점점 두드러졌다. Cherry의 기계식 키보드는 기울기 시작했고 생산 라인도 계속 멈추고 줄어들었다. Cherry 자신도 다시 일어설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다한이 중국 본토에서 기계식 키보드라는 개념의 새 혁명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독일 Cherry 본사가 그토록 놀란 것이다. 다한은 멤브레인 키보드라는 주전장을 피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그 용기와 능력에 Cherry는 크게 감탄했고, 누구나 탐내던 중국 총판 자리는 자연스럽게 다한의 손에 떨어졌다.
다한은 기계식 키보드 시장에 남긴 두드러진 공로로 중국 기계식 키보드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한의 이 시기를 돌아보면, 몇 번의 고비마다 다 걸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성공을 가른 열쇠였다. 그는 위험과 압박을 견뎌 내고 결실을 얻었다. 여기에는 날카로운 판단력과 강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 뒤 몇 해 동안 Cherry의 판매는 차츰 자리를 잡았지만 다한은 멈추지 않았다. 기계식 키보드라는 영역도 언젠가 레드 오션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새 전장을 열 때가 온 것이다.
WE 클럽과 맺은 인연¶
다한은 워크래프트 3 시절부터 이미 WE e스포츠 클럽의 팬이었다. 충실한 e스포츠 애호가로서 중국 e스포츠를 위해 뭔가 하는 것은 늘 그의 꿈이었고, 손에 가장 익은 주변기기 업계는 e스포츠와 이렇게 가까웠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2010년 차이나조이(ChinaJoy)가 끝난 뒤 다한은 친구의 소개로 WE의 창립자 KING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사귄 사이 같았고, 함께 뭔가 해 보기로 했다. 뜻은 정해졌지만 중국 e스포츠는 여러 해 동안 시장은 눈앞에 있는데 돈 버는 법을 모른다는 말을 들어 온 판이었다. 다한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먼저 다한은 상업 브랜드와 전통 스포츠의 협력이 성공하는 열쇠는 두 가지라고 봤다. 모수(基数)와 숭배(崇拜)다. WE 클럽은 업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이름난 e스포츠 클럽이므로 숭배도 모수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WE와 손을 잡으려 했다. 다만 사업 방식은 바꿔야 했다.
그전의 사업 방식은 후원 형태였다. e스포츠인들이 업체에 후원을 구걸하다시피 했고, 그나마 대부분은 제품만 받았을 뿐 현금 후원은 아주 드물었다. 큰 업체라 해도 광고와 후원은 몹시 불안정해서 있다가도 없었다. 다만 예전에는 e스포츠 시장 규모가 작았으니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한에 이르러 이 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가 맞닥뜨린 첫 문제는 독일 Cherry 본사가 게임 쪽을 통한 그의 홍보 방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원조차 승인을 받기가 몹시 어려웠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한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전장이 막혔다면 다른 전장을 하나 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한은 또 한 번 다 걸었다.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 I-Rocks를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다한이 I-Rocks를 만든 것은 전적으로 e스포츠 때문이었다. 이곳은 멤브레인 키보드의 영역이고 그가 처음에 피했던 전장인데 그가 이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I-Rocks 시리즈를 e스포츠 영역에 자리매김했다. e스포츠판에서 가장 정상급인 클럽과 선수와 해설자를 찾아 손을 잡고, 모수와 숭배에 대한 자기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2010년부터 다한과 WE의 첫 3년은 돈이 되지 않았다. 첫해에 그는 WE에 중국 e스포츠 업계에서 가장 높은 분배 비율을 줬다. 구체적인 수치는 영업 비밀이라 밝히기 어렵지만, I-Rocks가 해마다 브랜드 구축에만 적어도 200만 위안을 들였다고는 말할 수 있다. 첫해에는 이 마케팅 비용이 I-Rocks의 매출을 훨씬 웃돌기까지 했다. 돈을 아끼지 않는다, 결정이 빠르다, 팀과 묶어서 판다. 이 세 가지가 I-Rocks가 그 3년 동안 한결같이 지킨 원칙이 되었다. 그래서 I-Rocks의 팀 타이틀 후원과 I-Rocks 캠퍼스 투어, I-Rocks WE 주변기기 시리즈 일습이 나왔다.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뿐 아니라 헤드셋과 마우스 패드와 케이블 클립 같은 WE 주제 제품도 만들었고, 시장 반응에 따라 가장 빠른 속도로 고치고 손봤다. 그렇게 I-Rocks는 마침내 2013년에 거두는 계절을 맞아, 그동안 들인 돈을 회수했을 뿐 아니라 큰 보답까지 얻었다.
중국 e스포츠 역사의 혁명적 돌파¶
e스포츠를 아무도 좋게 보지 않던 상황에서 다한은 e스포츠인과 후원비와 판매 분배를 함께 두는 방식을 용감하게 시도했다. e스포츠인을 이 장사의 한 부분으로 만든 것이고, 그리고 성공했다. 이것은 중국 e스포츠 역사에서 용감한 시도이자 하나의 혁명이었다.
I-Rocks 모델이 성공하자 다른 주변기기와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들이 곧바로 자극을 받았다. 전에는 제품 후원만 하려 하던 업체들이 잇따라 이를 따라 했고, 모두 진짜 돈을 들여 각 팀과 클럽과 해설자들과 묶음 판매 방식을 만들려 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e스포츠인이 자기 영상과 그 밖의 모든 통로에서 업체의 제품을 팔고 평판을 쌓는 일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 길이 옳았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타오바오 가게에서 e스포츠 부자가 하나둘 나왔다.
오늘날 중국 e스포츠가 스스로 피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역사상 가장 좋다. 후원이 없어도 e스포츠 클럽과 e스포츠인들은 자기 경기 성적과 제품 운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 e스포츠가 처음으로 스스로 안정되고 건강한 생태 순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에서 I-Rocks와 중국 기계식 키보드의 아버지 한보한의 공은 적지 않다.
I-Rocks가 자리를 잡았지만 다한은 자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장사꾼이란 흐름을 다루는 사람이며 앞으로의 흐름은 모바일 인터넷이라고 본다. 그는 모바일 게임 회사를 하나 만들었고 거기서 개발한 경쟁형 모바일 게임이 곧 나온다. 게다가 휴대전화용 주변기기 게임패드까지 만들어 뒀다. 전화기 양쪽 끝에 꽂으면 바로 게임을 할 수 있고, 여기에 WiFi와 게임 앱 내려받기 기능까지 붙어 있어 편하고 쓸모가 있다.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까지 그는 이미 다 생각해 두고 실물로 만들어 냈다. 새 전장이 다시 한 번 열린 것이다. 이번에도 다한은 다 걸 준비를 하고 있다.
I-Rocks 다한, 다 걸어서 얻은 인생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