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인생이라는 카드 게임, 820 쩌우이톈¶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十二 820的人生牌局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28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25947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인생은 카드 게임과 같다. 어떤 패를 받을지는 자기가 정할 수 없지만, 손에 들어온 패로 이길 수 있느냐는 치는 사람의 실력에 달렸다.
2011년 9월 8일, 세계 챔피언 여섯 번과 주요 대회 우승 서른 번 가까이를 따내며 "8라오반(8老板)"으로 불리던 820이 이름을 다 이룬 자리에서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라오반은 사장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그는 도타(Dota) 프로 선수 생활에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다.
키가 크고 마른 820이 내 앞에 앉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인터뷰는 시점이 아주 좋다, 예전에는 지난 일을 꺼렸는데 지금은 완전히 내려놓았으니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다, 물어보라.
그래서 이어진 다섯 시간 동안 나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위로 기어오른 e스포츠 이야기를 들었다.
1989년 4월 13일, 820의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본명이 쩌우이톈(邹倚天)인 820은 상하이시 칭푸구(青浦区)에서 태어났다. 여섯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집안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가까이 살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함께 돌봐 준 덕분에 근심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820의 어머니는 생각이 아주 보수적이었다. 그녀가 그린 820의 앞날은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해서 이른바 쓰진(四金), 곧 양로 보험과 의료 보험과 실업 보험에 주택 적립금까지 나오는 안정된 직장을 잡은 다음,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한 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820도 얼마간은 그런 궤도를 따라가는 듯했다. 어릴 때 그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으며 자신이 없고 잘 참았다.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큰 야심도 없었다. 아주 평범한 아이였고 성적도 평범했다.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기술학교에 들어가 전기기계를 전공했다. 집에는 돈도 연줄도 배경도 없었으니 820은 자기 앞날이 정말 캄캄하다고 느꼈다.
대다수 사람과 견주면 820이 받아 든 패는 분명 좋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던 e스포츠라는 작은 패 한 장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로 이름 없이 한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게임과의 인연¶
820도 어릴 때부터 게임을 접할 기회는 적지 않았다. 친구 집의 패미컴, 《열혈고교(热血高校)》, 《삼국군영전(三国群英传)》, 《스타크래프트》까지 두루 해 봤다. 2003년 워크래프트 3의 《혼돈의 지배》 버전이 나온 뒤에는 대전 모드를 해 봤지만 너무 어렵다고 느껴, 좀 더 느긋하게 즐기는 방식인 워크래프트 3 RPG 지도 쪽으로 옮겨 갔다.
그때 인터넷에는 워크래프트 3 RPG 지도가 아주 많았고 820도 이 지도 저 지도를 계속 갈아 가며 했다. 그러다 제법 재미있는 지도를 하나 찾았는데 《푸자톈샤(富甲天下)》였다. 주사위를 굴려 수를 내는, 《모노폴리》 같은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조작이 너무 복잡해서 결국 그들 자신도 손을 놓고 말았다. 마침 그 무렵 타이완 사람이 만든 워크래프트 3 지도 《진삼국무쌍(真三国无双)》이 중국 본토에서 뜨고 있었다. 그래서 820은 푸자톈샤를 함께 하던 친구 몇과 조작 비중이 훨씬 큰 진삼(真三)으로 넘어갔다.
《진삼》 3.7 버전¶
말이 나온 김에 짚자면, 지금의 도타 최상위 스타 상당수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진삼》 3.7 버전이다. 왜 그런가.
이 버전은 영웅의 공격력이 아주 낮아서 라스트 힛이 상당히 어려웠고, 초반에 성장 우위를 쌓으려면 아주 정밀한 조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 뜻 없이 시작한 이 게임 경험이 그 세대 진삼 플레이어들에게 단단한 조작 기본기를 깔아 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뒷날 이들이 도타로 옮겨 가서 보니 도타 영웅은 공격력이 이렇게나 높아 라스트 힛이 무척 쉬웠고, 그야말로 제 세상을 만난 듯했다. 그래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진삼 무리에서 도타 프로 고수가 여럿 나왔다.
쩌우이톈은 왜 820인가¶
2005년 무렵 진삼을 하던 사람들은 같은 시기의 다른 e스포츠 종목과 비교하면 아주 소수였다. 판도 작았다. 대부분 하오팡(浩方) 플랫폼에서 게임을 했고 U9 포럼에 모였다. 820이 성격이 불같고 털털한 LongDD를 알게 되어 친구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LongDD는 당시 이미 진삼 판에서 아주 유명했다. 그는 이름난 진삼 숫자 팀의 주력이었다. 선수들이 숫자를 이름으로 쓰던 팀이다. 처음 진삼 숫자 팀의 1군은 다섯에서 열 명뿐이었다. 성격 좋은 357이 주장이었고, 비교적 알려진 선수로 상하이 마차오(上海马超, 257), LongDD(520), 286이 있었으며 뒤에 820이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덧붙이자면 820은 중국어로 발음하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不爱你)"와 비슷하게 들리는데, 8라오반은 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라고 했다.
진삼 시절에는 대회도 별로 없었고 상금도 없었다. 다들 e스포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그저 게임을 할 뿐이었다. 도타는 6.27 버전이 나오고 나서야 버전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전 버전은 버그가 많았다. 그래서 6.27부터 도타가 조금씩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820이 넘어간 것이 바로 도타 6.27 버전 때였고, 그는 진삼 숫자 팀에서 가장 먼저 도타로 옮긴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에 하오팡 플랫폼의 도타 채널에는 100명 남짓밖에 없었다. 도타를 하는 분위기는 아주 좋아서 날마다 GL 팀의 후이야오(辉耀), 천룬(沉沦), 샤오슝마오(小熊猫), 완바오루(万宝路), 니(逆) 같은 이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다 차츰 사람들이 제법 잘하는 820이라는 청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820은 자연스럽게 GL 팀에 들어갔다.
2006년, U9가 연 제1회 도타 대회에는 열 몇 개 팀이 참가했다.
GL의 두 팀과 Mage 팀, ifnt 팀 등이 나왔고, 최종 우승은 820이 팀 동료 니, 다수(大叔), 403 등과 함께 꾸린 GL 2팀이 차지했다. 상금은 아주 적었지만 무척 기뻤다. 820과 니가 GL의 쌍둥이별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덧붙이자면 니는 그 뒤 도타 프로의 길로 가지 않고, 820이 하마터면 걸을 뻔했던 그 길, 곧 출근해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사는 길을 골랐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선택이 있다.
U9의 제1회 도타 대회가 끝난 뒤 LongDD가 820의 추천으로 GL 2팀에 들어왔고, 또 다른 강팀 HTML의 Snoy도 GL에 합류했다. 이때의 GL2는 어느새 중국 최고 수준의 도타 팀이 되어 있었다. 다만 그때의 도타는 아직 아주 작은 판 안에서 더디게 자라고 있었을 뿐이다.
2006년 CPL 청두 대회.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이르게 열린 오프라인 도타 대회로, 중국 도타판의 첫 세대가 모두 모였다. 그런데 820은 이 대회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예선 단계에서 820과 니가 Hust 팀의 대리 선수로 뛰어 결승에 올려 준 것이다. 그 덕에 Hust는 오프라인 무대에 오른 네 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결승에서 820과 니가 속한 GL이 그 Hust에게 졌다. 두 사람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초기 중국 도타판은 아주 미숙했고 좋지 않은 풍조도 많았다.
여기서 도타판의 대리 출전 풍조를 짚어 둬야겠다. 남의 팀 대신 뛰어 주는 이 관행은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들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익숙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 나쁜 습관은 몇 해 뒤 큰 사건의 도화선이 되어 전성기의 EHOME 팀을 무너뜨리고 도타판 전체에 상처를 남겼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2006년 CPL 청두 대회는 820이 처음으로 멀리 나간 여행이었다. 서른 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대회에 갔고, 늘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던 도타 전우들을 많이 만났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아이에게 이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다만 그 대회에서 GL은 아쉽게도 두 팀이 3, 4위전에서 서로 만났다.
대회가 끝난 뒤 GL은 두 분대를 합쳤다. LongDD와 DC가 GL 1팀에 들어갔고, 이후 1년 남짓 여러 차례 조정을 거쳐 마침내 WCG 베이징 지역 우승을 차지한 그 진용이 만들어졌다.
820, 니, DC, LongDD, Snoy
GL이 뒤에 싱가포르에서 ACG 우승을 차지한 대목은 이면사의 "DC" 편에 이미 나와 있으니 그 장을 보면 된다. 여기서는 그 대회에 대한 820의 기억을 적어 둔다.
당시 820의 가족은 아직 그가 게임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나가는 해외였는데도 그는 가족 몰래 증명서를 만들었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고 가방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싱가포르로 갔다. 조직위원회는 날마다 선수 한 명에게 밥값으로 20싱가포르 달러를 줬는데, 그는 그 돈으로 6싱가포르 달러짜리 새우 국수를 사 먹으며 아주 맛있다고 생각했다.
대회에 대해 820이 기억하는 것은 이렇다. 싱가포르 대회는 키 설정 변경이 금지였다. 경기 방식은 16강 조별 승점제로 8강을 가린 뒤 8강부터 단판 토너먼트였다. 게다가 GG를 쳐도 항복으로 치지 않았다. 국내 대회 규칙과 다른 점이 많았지만, 동남아시아의 도타가 비교적 느긋한 분위기였던 반면 국내 도타는 안정적이고 승부욕이 강했으며 전략의 폭도 동남아 팀들보다 넓었던 덕분인지 GL은 아주 수월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820은 그 덕분에 인생 첫 목돈인 8,000위안을 나눠 받았다. 당시 프로 대회에서는 가장 높은 상금이었고, 820에게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GL의 해체¶
귀국한 뒤 GL은 프로화가 막혔다. 반면 오랜 맞수 HTML은 먼저 후원을 얻어 820에게 와서 프로로 뛰어 달라고 했다. 당시 820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e스포츠에서 드러난 재능은 캄캄한 인생의 밑바닥에서 본 한 줄기 빛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빛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그 일로 GL이 해체되어 820은 오랫동안 미안해했지만, 선택 또한 혹독한 삶의 일부다.
2007년 말, 귀국하고 두 달 뒤 820은 월 1,500위안을 받고 HTML에 들어가 온라인으로 훈련하며 자신의 도타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820은 자기가 이 팀에 끝내 녹아들 수 없다고 느꼈다.
마침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e스포츠인 fashao가 프로 팀 CaNt를 만들었다. 이 팀은 상하이에서 오프라인으로 훈련해 실력을 끌어올리기에 더 유리했다. 같은 상하이에 살던 820은 신중히 생각한 끝에 CaNt에 들어가기로 했고, fashao는 당시 도타판에서는 아주 높은 편이던 월 2,500위안을 제시했다.
그때의 진용은 이랬다.
820, 357, 양자자(杨佳佳, YJJ), McGroSs, 팡쓰(放肆)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가는 듯했고, 820도 마침내 앞날에 얼마간 희망을 품게 되었다.
갈피를 잃은 CaNt¶
처음에 CaNt의 기세는 아주 좋았고 훈련 수준과 대회 성적 모두 눈에 띄게 올라갔다. 그런데 두 달 뒤 회사 경영 쪽에서 영문 모를 문제가 생겨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 지급되기는 했다. 팀 훈련도 흐트러져 다들 DNF만 했다. 이어진 몇 경기에서는 옛 동료 DC와 LongDD와 Snoy가 있는 EHOME에 연달아 졌고, 차이나조이에서 EHOME을 이겨 하오팡이 연 CIG 우승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다. 820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환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세등등한 7예, EHOME 단장 71¶
이때 EHOME의 단장 71이 상하이로 820을 찾아와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도 CaNt의 훈련 기지로 곧장 찾아와서 한 이야기였다. 71은 820이 EHOME에 와 주기를 바랐고, 820은 357도 함께 데려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그때 선수 2009가 은퇴했고 EHOME은 성격 문제로 LongDD를 내보내 자리가 둘 비어 있었다. 그렇게 820과 357이 EHOME에 들어가 2008년 모두가 무적으로 인정한 황금 진용이 짜였다.
820, 357, DC, GK, Snoy
그러나 이렇게 널리 퍼진 자만 탓에 선수들은 제대로 손발을 맞추지도 않고 전장에 나섰다. 새로 짜인 EHOME은 곧바로 참패를 당해 MGC 1라운드에서 Fnatic에게 탈락했다. 이 대회에서 EHOME은 LongDD가 이끄는 CaNt와도 만났는데, LongDD는 퀸 오브 페인으로 16킬 0데스를 기록하며 복수에 성공했고 EHOME을 완전히 정신 들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EHOME은 오만을 거두고 맹훈련을 시작해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는 SMM을 준비했다. 이 팀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실력이 나왔고, 동남아시아에서 무난히 우승했다.
SMM에서 돌아온 뒤 EHOME 선수 여럿이 은퇴했다. DC 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낮은 급여와 상금을 구단이 많이 가져가는 배분이 그들이 팀을 떠난 주된 이유였다.
820은 자기가 아직 어리고 더 많은 성적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남았고, 새 EHOME이 짜이기를 기다렸다.
EHOME의 내분¶
2009년 새 EHOME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820, 357, 다이다이(呆呆), 팡쓰, 상하이 마차오
그런데 이 구성은 이상적이지 않았고 서로 자리도 계속 바뀌었다. WCG 예선에서 진 뒤 다시 조정이 이뤄져 이렇게 바뀌었다.
DGC, GK, 820, 357, 다이다이
그때부터는 거침없이 내달려 WCG, EOG, G리그 세 개 큰 대회 우승을 연달아 가져갔다.
2009년 WCG 중국 지역 대회를 앞두고 EHOME 경영진 안에서 내분이 터졌다. 71과 허추(何秋), 곧 앞 장에서 언급한 《전자경기(电子竞技)》 잡지의 초대 집행 편집장 사이의 권력 다툼이 중심이었다. 당시 허추는 EHOME 팀의 운영권을 쥐려 했고, 그 무렵 EHOME의 인사 요동과 부진한 성적을 권력을 빼앗을 지렛대로 삼았다. 고위층에 막다른 곳까지 몰린 71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WCG 우승을 못 하면 물러나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래서 그해 WCG는 정말 처절했다. EHOME은 예선에서 뜻밖에 탈락했고, 급히 진용을 바꿔 패자부활전에서 다시 올라와 끝내 WCG 우승을 차지했다. 그 내분의 결과로 71은 남았고 허추는 떠났다.
여기서 지기 싫어하고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71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이 성격은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건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EHOME 쇠락의 도화선, IEM 대리 출전 사건¶
2009년 중반 이후 EHOME은 다시 왕자의 기세를 되찾아 거침없이 나아가며 여기저기서 우승을 쓸어 담았다.
그때 EHOME은 CH 팀이 남의 팀 대리 선수로 뛰는 방식으로 EHOME을 저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무렵 도타판의 대리 출전 풍조는 이미 몰래 하던 짓에서 대놓고 하는 짓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사안이 컸다. 소문을 들은 71은 곧바로 화가 나서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기로 했다. EHOME도 다른 팀의 대리 선수로 뛰어 CH를 저격했고, 저격은 성공해 CH를 꺾었다. 그런데 누군가 대리 출전을 신고했고, 조직위원회는 여러 조사를 거친 끝에 재경기를 판정했다. 사실 이때 EHOME은 대리 출전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런데 71은 계속 대리 출전을 밀어붙였고, 조직위원회는 작정하고 이 재경기를 IP 주소를 기록할 수 있는 GG 플랫폼에서 치르게 했다.
EHOME은 경기 전에는 그것을 몰랐다. 경기가 끝난 뒤 IP 기록은 또렷했고 증거는 명백했다. 대리 출전 사건이 완전히 드러났고 여론은 들끓었으며 EHOME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EHOME도 그제야 이 공공연한 비밀이 밖에 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9년 IEM 대리 출전 사건은 EHOME의 모든 면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영향을 남겼다. 먼저 IEM에서 출전 정지를 당했다. 당시 IEM의 상금은 5만 위안이었고 이미 결승에 올라 있었으니, 눈 감고도 챙길 수 있던 돈이 날아간 데다 욕까지 먹었다. 팀 전체의 사기가 크게 꺾여 두 달 동안 훈련도 하지 않았고, 그 탓에 뒤이은 큰 대회 두 개의 우승도 놓쳤다. 그중에는 상금이 가장 높았던 SMM도 있었다. 짚어 둘 것은 그해 IEM 우승과 SMM 우승을 차지한 팀이 바로 2009가 이끄는 FTD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운명이다.
개성 강한 7예, 그리고 EHOME의 재기¶
2009년 말, GK와 DGC가 떠났다.
대리 출전 사건 뒤에 71은 선수 다섯 명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고, 주장이던 820은 줄곧 선수들을 다독이며 모두를 다시 하나로 모았다.
2010년, 820은 FTD의 KingJ와 CH의 BurNing을 데려와 EHOME을 다시 꾸렸다.
820, 357, BurNing, KingJ, 다이다이
처음에는 다들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 계속 손발을 맞추는 중이었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 WCG 베이징 지역 대회 때 EHOME이 패자조로 떨어졌는데, 승자조에 있던 Deity의 선수 차오메이(草莓)에게 조롱을 당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시절의 차오메이와는 다른 사람이다. 화가 난 71은 외부 내기로 5,000위안을 걸었다. 이긴 쪽이 우승 상금 말고도 5,000위안을 더 가져가는 판이었다. EHOME 선수들은 그 경기를 이겼고, 그때부터 사기도 되돌아왔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7예(7爷), 곧 71은 정말이지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는 손윗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ESWC,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820¶
그 뒤 2010년 ESWC 온라인 선발전에서는 FTD에 졌지만, ESWC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전승으로 우승해 프랑스에 갈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의 디즈니랜드에서 열린 ESWC 결승에서 EHOME은 역시 전승으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820은 영웅 벤지풀 스피릿(VS)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활용으로 단숨에 이름을 알렸고, 도타를 만든 아이스프로그(IceFrog)가 게임 속 영웅 하나에 820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십관왕 EHOME, 정점 뒤의 쇠락¶
귀국한 뒤 EHOME의 기세는 더욱 막을 수 없어 크고 작은 우승을 단숨에 열 개나 쓸어 담아 십관왕으로 불렸다. 그런데도 2010년 말까지 820의 급여는 여전히 2,500위안이었고, 팀 안의 불만은 계속 커졌다.
사실 820도 불만이었다. 다만 그는 다섯 명이 떠난다면 함께 떠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때 벌어진 일이 그를 크게 놀라게 했다. BurNing과 KingJ가 DK 팀에 1인당 6만 위안의 이적료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된 것이다. 이 일은 820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누군가 몰래 떠났다는 데 몹시 화가 났고, 그 분을 삼킬 수 없어 오히려 끝까지 남았다.
820은 당시 인터넷에서 자기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BurNing이 떠난 것은 820이 그의 주력 자리를 빼앗으려 해서라는 말이었다. 사실 820은 그때 여러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는 BurNing이 떠난 이유가 한편으로는 대우가 낮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BurNing이 자기 팀을 직접 이끌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820과 자리를 다퉈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11년, EHOME은 또 새 진용을 짰다.
궈스우솽(国士无双), LongDD, 820, 357, 다이다이
820은 주력으로 뛰고 싶었지만 잘 풀리지 않아 서포터 자리로 갔다. 그 뒤 EHOME의 성적은 계속 좋지 않았고 큰 대회에서 서너 번 준우승에 그쳤다. 이 기간에 인터넷에서 820을 향한 욕설이 또 끊이지 않았고, 820은 무척 억울했다. 팀이 그렇게 큰 변고를 겪고도 이만큼 해낸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계속 욕을 먹으면서도 820은 여전히 힘겹게 팀을 떠받쳤다.
상금 100만 달러의 도타 2 쾰른 초청전¶
2011년, EHOME의 성적이 좋지 않자 팀 안에서 820의 권한은 점점 줄었고 71의 결정권이 여러 방면에서 계속 커졌다. 경기 중 지휘부터 선수 교체까지 크게 손을 댔고 팀 내 갈등은 계속 커졌다. 820은 팀이 곧 해체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상금 100만 달러가 걸린 독일 쾰른의 도타 2 초청전을 만났다.
820은 그때 운이 비교적 좋았다고 했다. 2011년에는 국내 도타 강팀들이 모두 내부 조정 중이었고 다들 갈등을 겪고 있었다. 820은 팀이 강해지려면 마음이 하나여야 한다고 봤고, 그래서 모두에게 갈등은 일단 내려놓고 이 대회에 전력을 쏟자고 했다.
2011년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독일 쾰른 게임쇼에서 《도타 2》 시범 대회는 우승 상금 100만 달러를 걸고 전 세계 최정상 프로 팀 열여섯을 불러 모았다. 마지막 날인 21일 결승에서 EHOME은 우크라이나의 Na'Vi(Natus Vincere)에 1대3으로 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820은 그 경기를 아주 아쉬워한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열 경기 남짓을 연달아 치르면서 전략도 거의 다 써 버렸고 체력도 따라 주지 않았다. 진 것은 진 것이다.
준우승 상금은 25만 달러였고 820의 몫은 30만 위안이었다. 그전 몇 해 동안 번 상금까지 더하면 충분했다.
귀국한 뒤 71이 820을 따로 불러 좀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820은 곧바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다만 얼마간 서운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쌓인 EHOME에 대한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움과 어쩔 수 없음을 안고, 그는 여러 해 싸워 온 EHOME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고 떠났다.
2012년 820은 도타 전업 해설자로 방향을 바꿨다. 지금은 이름난 e스포츠 해설자로 큰 대회마다 모습을 보이고, 자기 타오바오 가게도 제법 잘 꾸리고 있다.
이 카드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820은 그저 탁자를 옮겨 계속 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