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e스포츠 뉴스 사이트의 혁신¶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 电子竞技新闻网站的革新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16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14594
이 번역은 2026년 8월 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중국의 오래된 e스포츠 조직과 그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미디어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도타 시대 초기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EHOME 팀은 중국어 이름이 이자였는데, 이들은 e스포츠 웹사이트 Esai에서 나왔다. 그리고 Esai의 전신은 2000년 청두에서 시작한 이름난 중국어 카운터 스트라이크 사이트 Ccsk.net이다.
CCSK가 2003년 베이징으로 옮겨 갈 때 주요 구성원 몇 명이 떨어져 나와 상하이의 하오팡으로 갔고, 거기서 중국 게임 연맹 웹사이트 CGA를 만들었다. 2004년 이후 중국 e스포츠의 무대 뒤는 북쪽의 Esai, 남쪽의 CGA라는 판이 되었다.
CGA가 성다에 인수되고 몇 해 뒤, 그때의 주요 구성원 몇 명이 다시 떨어져 나와 원래 하오팡의 투자자였던 리리쥔(李立均)을 따라 치판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치판이 자리를 잡은 뒤, 주요 구성원 몇 명이 또 독립해 11 대전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중국 e스포츠의 무대 뒤 판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이리저리 돌고 돌아도 앞장서서 뛰는 사람들은 예전에 e스포츠 뉴스 매체를 하던 그 무리다.
이건 다 나중 이야기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왜 미디어가 e스포츠 무대 뒤의 초기 형태가 되었을까?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998년 네트워크 기술이 전면적으로 일어나면서, 그전까지 각자 오락실과 PC방을 주름잡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여기에 스타크래프트와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함께 힘을 보태면서, 전적 리포트 사이트와 게임 BBS가 중국 e스포츠 미디어의 가장 이른 원형이 되었다. 모여야 조직이 생긴다. 자발적인 잡담과 도배에서 상업 조직이 되기까지 e스포츠는 꽤 긴 시간을 걸었다.
1999년 무렵,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아직 그리 편하지 않던 시기에 초기 e스포츠 미디어는 여전히 전통적인 형태로 나왔다. 《컴퓨터 신문》과 《CBI 컴퓨터 상업정보》는 막강한 유통망을 무기로 중국의 2선, 3선 도시와 더 외진 지역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 신문들에서 배틀넷에 접속하는 법을 배웠다. 그중 《CBI 컴퓨터 상업정보》에서 활발히 활동한 전적 리포트 작가 한위량(寒羽良) 같은 이들은 많은 e스포츠 팬의 기억에 아직 또렷하다.
초기 스타크래프트에는 리플레이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사이트에서 가장 먼저 인기를 끈 것은 여전히 글로 쓴 전적 리포트였다. 그중 이름난 것으로는 TS 팀 JOJO의 사이트, 쓰촨의 =A.G= 팀 사이트, 지금의 WE.KinG이 당시 LION.KinG이던 LION 팀 사이트, 중국 야오위안 스타크래프트 리플레이 다운로드 사이트, CSA 중국 스타크래프트 연맹 사이트 등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가장 뜨거웠던 BBS는 8DA였다. 당시 충칭의 바다(8DA) 컴퓨터가 만든 이 포럼에서 이름을 날린 8da.BOAT, 그리고 중국 최초의 반프로 팀인 8DA 팀의 주장 8da.ZK는 그때 8DA 포럼에 드나든 사람이라면 다들 기억할 것이다.
8DA BBS가 뜬 이유는 충칭 현지에서 충칭 반프로 스타크래프트 리그를 열어 그해 중국의 스타크래프트 고수와 팀을 대거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논쟁과 말다툼, 잡담과 도배, 그리고 충칭 미녀들(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유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처럼 소통 창구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8DA 포럼은 당시 중국에서 대단히 떠들썩하고 사람이 몰린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e스포츠 무대 뒤 조직의 발전은 대부분 현지에 갇혀 있었고, e스포츠 미디어도 여러 객관적 조건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서로 도배하고 잡담하고 소문을 흘리는 BBS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CS 미디어의 변혁¶
2001년 이후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조작이 쉽고 팀에 참여한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이유로 스타크래프트를 넘어 중국 e스포츠의 주류 종목이 되기 시작했다. CS 미디어가 스타크래프트 미디어의 바통을 이어받아 다음 단계의 발전을 시작했다.
CSchina와 창립자 상디폔아이부빙¶
상디폔아이부빙(上帝偏爱步兵, 리샹 李翔)은 지금 소후 창유에서 일한다. 아이디는 신은 보병을 편애한다는 뜻이다. 그는 중국 CS 역사에서 중요한 웹사이트 하나를 혼자 힘으로 세웠다. 도메인 가운데에 china가 들어간 것을 눈여겨보자. 이런 도메인은 중국 인터넷 초기에만 신청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검색 엔진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도메인이 외우기 쉽고 정보가 분명한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CS와 China의 조합보다 더 분명한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CSchina는 그전의 스타크래프트, 델타 포스(DF), 퀘이크 같은 사이트의 큰 틀을 이어받아 전적 리포트와 포럼을 주요 구성으로 삼았다.
CSchina가 나온 시점은 대단히 좋았다. CS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널리 퍼지면서 플레이어들이 CS 경기의 전적 리포트와 뉴스를 찾는 수요가 점점 커졌다. 게임을 하면서 전적 리포트를 보는 습관도 이미 자리 잡아 CS 전적 리포트 작가가 많이 나왔지만 다들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CSchina가 나오자마자 포럼에는 국내외의 전적 리포트 작가가 대거 모여들었다.
당시 CS가 가장 발전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CS는 규율과 팀워크를 따지는데, 이 부분에서 독일인의 타고난 강점은 견줄 데가 없었다.
여담을 하나 하자면, 많은 e스포츠 종목이 막 일어날 때는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상태다. 다들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인은 늘 남보다 먼저 체계적인 플레이 방식을 찾아내 선두가 된다. 이것은 사고 습관이 만들어 낸 재능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들 게임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유럽과 북미 지역 플레이어가 앞서간다. 이들은 전략과 전술을 깊이 파고들기를 좋아하고 사고가 자유롭게 뻗어 나가 창의적인 플레이를 많이 개발하며, 독일인처럼 딱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한국인이 앞서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략과 전술도 중시하고 섬세한 조작도 중시하며, 유럽과 북미 사람들처럼 거칠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늘 중국인과 한국인이 1위를 다툰다. 중국인의 학습 능력이 정말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CSchina는 때와 자리의 이점, 그리고 CSchina 초청전을 발판으로 2000년 무렵 이미 중국 최대의 CS 사이트가 되어 있었다. 중국의 주요 팀들은 모두 CSchina에 자기 팀 게시판을 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요즘 말로 하면 CSchina는 당시 중국 e스포츠 사이트 가운데 가장 잘나가는 곳이었다. 전적 리포트 필자를 대거 모았고, 글로 쓴 전적 리포트뿐 아니라 유럽과 북미의 이름난 CS 경기와 팀의 데모, 곧 리플레이도 올렸다.
이에 비하면 같은 시기의 CCSK는 별 볼 일 없는 사이트였다. CSchina보다 늦게 열었고 전적 리포트와 리플레이도 CSchina만큼 많지 않았으며, 사이트와 포럼도 CSchina와 똑같았다. 어느 모로 보나 기회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CCSK가 e스포츠 미디어에서 중대한 변혁을 이뤄 냈고, 중국 e스포츠 이면사 전체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 변혁은 이것이다. 전국 각지에 둔 기자 주재소.
CSchina는 공식 뉴스 보도를 하지 않았다. 초기 CSchina의 뉴스 관리는 비교적 개방적이어서 누구나 쓰고 제출할 수 있었고, 관리자가 승인하면 메인 페이지에 올라갔다.
달리 말하면 그 시기 대다수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뉴스 보도라는 말은 《신원롄보》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신원롄보》는 중국 국영방송의 저녁 종합 뉴스다. 그것은 e스포츠나 게임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당시 e스포츠 종사자도 다 덜 자란 아이들이라 학교 작문 쓰는 것만도 골치 아파했으니 뉴스 보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2001년, CCSK는 플레이어들에게 앞으로 반드시 생길 이 수요를 예민하게 알아채고 공식 뉴스팀을 꾸렸다. CSchina와 CCSK 자체 포럼에서 글솜씨가 있고 뉴스를 보는 눈도 있는 애호가를 발굴했다. 내가 CCSK에 들어간 것도 이 시기였다.
CCSK는 사이트 판형을 다시 설계해 뉴스 섹션을 가운데 위쪽 눈에 띄는 자리에 놓았고, 뉴스 관리 백엔드도 개선했으며, 뉴스팀 안에서 편집과 서식을 엄격히 요구했다.
내가 지금 인터넷에 글을 쓸 때 문단 나누기와 빈 줄, 읽는 편안함에 무척 신경 쓰는 것을 보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다 그 시기에 몸에 밴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이런 것들을 얕보면 안 된다. 당시에는 아주 중대한 변혁이었다. 그전까지 e스포츠 뉴스 보도는 포럼 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문장 부호도 서식도 없이 글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기 일쑤였고 게다가 몹시 요란했다.
2001년 이 기자팀의 핵심 구성원은 대략 15명이었고 국내 뉴스팀과 국제 뉴스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뉴스팀의 전임 책임자는 베이가오산강예(被告山杠爷, mad)였다. 아이디는 피고 산강 영감이라는 뜻이고, 같은 이름의 1994년 중국 영화가 있다. 쓰촨 사람이고 남자인데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렸고 말투가 부드러웠으며 요구는 엄격했다.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한동안 그의 성적 지향을 의심했을 것이다. 나를 포럼에서 끄집어낸 사람이 바로 그다. 내가 e스포츠 업계에 들어서게 이끌어 준 사람이고, 나는 지금도 그에게 고마움을 품고 있다.
뉴스팀의 이후 책임자는 샤오팡(小胖, 왕창 王强)이었다. 아이디는 작은 뚱보라는 뜻이다. 그는 아주 끈질기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도 있는 뉴스 사람이었다. 해외에서 유학 중인 CS 애호가들을 이끌고 외국의 CS 뉴스와 대회 소식을 끊임없이 번역해 중국 CS의 자양분으로 바꿔 놓았다.
당시 CCSK에는 지금 다들 대단한 인물이 된 사람도 많이 모였다. 예를 들어 지금 많은 사람이 쓰는 Weico Pro의 개발자 ttdz가 있다. 그는 CS의 중국어화를 한 사람이고, 그때 CCSK 국제 뉴스팀에 있었으며, 유럽 여러 e스포츠 사이트의 창립자들과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웠다.
CCSK가 기자 주재소를 다듬어 가는 동안 CSchina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나중에 업계 사람 여럿과 이야기하면서, 당시 CSchina가 상디폔아이부빙의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개혁에 쏟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었다. 나는 상디폔아이부빙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가 일이 무척 바쁜 데다 설 연휴까지 겹쳐 지금까지 인터뷰 요청에 답을 받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나중에 답을 얻으면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하겠다.
바로 이때 CCSK에 기회가 왔다. 그 기회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중국 e스포츠 역사에서 유명한 2002년 WCG Evil|Zero 26space 팀의 WCG 한국 세계 결승 출전 자격 박탈 사건이다.
이 사건을 간단히 말하면, 팀과 후원사가 대회 상금을 나누는 과정에서 생긴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WCG 전에 26space는 상하이의 ADSL 컵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 3만 위안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구단주는 상금을 일단 주지 않을 테니 먼저 베이징에 가서 WCG 중국 지역 결승에 참가하라고 했다.
그래서 선수들은 밤새 베이징으로 가 WCG에 나갔고, 결국 WCG 중국 지역 우승과 상금 4만 위안을 손에 넣었다. WCG 상금을 받은 선수들은 의논 끝에 구단주가 그동안 자신들을 그리 잘 대해 주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그 3만 위안은 포기하고 4만 위안만 들고 26space 클럽을 떠나기로 했다. 구단주는 분노해 WCG 상하이 주관사에 선수 가운데 미성년자가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하여 규정에 따라 26space 팀의 WCG 한국 세계 결승 출전 자격이 취소되었다.
당시 이 일은 전 세계 중화권 e스포츠 판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이 CSchina 포럼으로 몰려들어 성토했고 두 진영으로 갈렸다. 한쪽은 잘못이 선수들에게 있다고 했고, 다른 쪽은 구단주가 큰 판을 너무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온갖 음모론이 끝없이 나왔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나도 양쪽과 다 이야기해 봤는데 조금 복잡하다.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한 가지만 말하면, 이 일을 두고 나중에 다들 뜻이 같아진 대목이 하나 있다. 당사자 양쪽 모두 상처만 입었다는 것이다.
2002년 그때는 정말로 중국의 소년이란 소년은 다 CS를 하고 있었다. 어렵게 중국이 다들 인정하는 강팀 하나가 나와 처음으로 한국에 가서 나라의 명예를 걸고 싸우려던 참이었으니, 그 관심도는 올림픽에 견줄 만했다. 그래서 밀물처럼 밀려드는 성난 플레이어들 앞에서 CSchina 포럼은 금세 뻗어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줄줄이 CCSK 포럼으로 옮겨 가 계속 싸웠고, 보름을 싸운 뒤에 다들 CCSK가 느려지기는 했어도 버텨 냈다는 것을 놀랍게 알아차렸다.
여기서 당시 CCSK 사이트의 기술 관리자 싱싱(星星, 궈줘 郭茁)을 말해야 한다. 아이디는 별이라는 뜻이다. 그는 뒷날 CGA의 운영 총괄이 되었고, 다시 뒷날 치판의 대표 보좌역이 되었다. 기술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사건 전에 이미 포럼이 웹사이트의 핵심이라고 주장했고, 포럼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핵심 파일을 살 돈을 아끼려고 끼니를 줄인 적도 있다. 당시 CCSK에 이런 사람이 있었으니 어떻게 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가 11 플랫폼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플랫폼 기술에 큰 변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앞 이야기로 돌아가자. E|Zero 26space 사건을 겪은 뒤 CCSK에는 많은 플레이어가 남았고, 동시에 각지 기자 주재소의 강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CCSK는 언제나 가장 먼저 현장에 가서 주요 대회를 보도할 수 있었다. 외국 뉴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곁의 스타와 외국 스타가 같은 사이트에 나왔다. 이것이 당시 많은 아이들의 마음을 크게 채워 주었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CCSK에 실리기를 바랐고, 점점 더 많은 대회가 CCSK의 보도를 원했다. 이 선순환이 결국 거대한 연쇄 효과를 만들어 CCSK를 CS 시대의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CCSK 이후의 e스포츠 사이트는 모두 뉴스 보도와 BBS를 중시했고, CS든 워크래프트 3든 도타 시대든 각지에 기자 주재소를 세우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많은 e스포츠 인재가 기자 주재소를 통해 e스포츠 판에 들어왔고, 점차 대회 보도에서 대회의 조직과 실행 같은 쪽으로 옮겨 갔다. e스포츠를 떠나 더 큰 게임 판으로 간 사람도 많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 e스포츠의 편집자와 기자였던 많은 사람이 중국 게임 분야의 각 층위에 퍼져 독특한 관계망을 이루고 있다. 나는 언젠가 이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모여 놀라운 힘을 뿜어내리라고 믿는다.
아래에 내가 2004년에 쓴 CCSK 관련 글 한 편을 붙인다. 그때의 일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에 나오는 인물 소개.
라오멍(老梦): 본명 정훙마오(郑洪茂). 전 CCSK 외무팀 팀장으로 CCSK의 상업 협상을 맡았고, 지금은 Esai의 대표다.
DDM: 본명 왕양(汪洋). 전 CCSK 내무팀 팀장으로 CCSK 내부 조직 업무를 맡았고, 지금은 Esai의 고위 관리자다.
바오바오(宝宝): 본명 양천(杨晨). 전 CCSK 대외협력팀 팀장이고, 지금은 하오팡 마케팅부 직원이다. 바오바오는 그의 아명인데, 이 글이 회고록인 만큼 바오바오라는 이름을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ddjack: 본명 장란(张然). CCSK의 초대 웹마스터로, 2001년 말 WCG 중국 지역 결승이 끝난 뒤 개인 사정으로 CCSK를 떠났고 2002년 10월 하오팡 과학기술에 합류했다. 지금은 하오팡 과학기술 마케팅부 직원이다.
싱싱: 본명 궈줘. 전 CCSK 프로그램팀 팀장으로 서버 유지와 백엔드 프로그램 작성을 맡았고, 지금은 CGA 운영 총괄이다.
추(秋): 본명 두추(杜秋). 싱싱이 CCSK를 떠난 뒤의 전 CCSK 프로그램팀 팀장이고, 지금은 Esai 사이트의 기술 총괄이다.
ice: 본명 정빈(郑彬). 전 CCSK 기자팀 팀장으로 국내 기자들의 대회 보도와 논평 업무를 맡았고, 지금은 Esai의 행정 담당이다.
mad: 본명 양보(杨波), 인터넷 아이디는 베이가오산강예. 주톈(九天)에 이은 CCSK의 두 번째 뉴스팀 팀장이다. CCSK의 주요 구성원 상당수를 그가 데려왔고 바오바오와 추도 그중 하나다. 뒤에 자기 일 때문에 CCSK 일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샤오팡: 본명 왕창.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아 mad가 물러난 뒤 그를 이어 CCSK 세 번째 뉴스팀 팀장이 되었고, 국제 대회 보도와 뉴스 번역, 논평 업무를 맡았다. 지금은 베이징에 있다.
CCSK는 왜 CCSK인가?¶
사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CCSK라는 이름이 어떤 단어들의 약자인지 모른다. 병음으로 보나 영어로 보나 CCSK 네 글자에 맞는 설명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CCSK에서 일하던 때에 내부 사람들에게 CCSK 약자의 온전한 표현이 무엇인지, 도대체 CCSK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물어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대부분 이유를 대지 못했다. 특히 바오바오는 이 질문에 딱 한마디로 답했다. "그건 뜻이 없어!"
당시 CCSK 이름의 뜻을 두고 추측이 많았지만 대부분 k가 어느 단어인지 짚어 내지 못했다. 이 문제의 정답은 1년이 지난 뒤 ddjack을 인터뷰하면서 마침내 찾았다. 알고 보니 CCSK의 온전한 표현은 China Counter-Strike Killer, 곧 중국 CS 킬러였다. 이것은 DDM과 라오멍, ddjack이 하룻밤 상의한 끝에 정한 것이고, ddjack은 이 이름을 마지막에 확정한 사람이 자기라고 말했다. 이 점은 굳이 따져 볼 필요가 없겠지만, 그도 이후 CCSK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CCSK의 전신은 무엇인가?¶
CCSK의 전신은 DFCN, 곧 중국 델타 포스 연맹이다. 일찍이 1998년 말에 라오멍과 DDM, mad 세 사람은 이미 서로 알고 지냈다. 라오멍은 =V= 팀의 주장이었고, DDM은 당시 전국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팀이던 =LD=의 주장이었으며, mad는 DF 시절의 이름난 팀 NC의 부주장이었다. 이 팀들은 DF 시대에 모두 대단히 유명했다. 1999년 중반 옛 DF 연맹이 무너지면서 전국 수백 개 DF 팀이 이끄는 사람 없는 상태에 빠지자, DDM이 라오멍을 끌어들여 새 연맹 DFCN을 만들고 전국 DF 리그를 조직하기 시작해 당시 국내 DF 판에서 권위를 세웠다.
이때 ddjack과 mad가 DFCN, 곧 중국 델타 포스 연맹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바오바오는 그때 울티마 온라인을 하고 있어서 아직 라오멍 일행과 접촉이 없었다. 그런데 2000년 초, 그들이 각자 좋아하던 게임에 같은 일이 닥치기 시작했다. 핵의 등장이다. 어떤 게임이든 수명의 한계가 있지만, 핵이 울티마 온라인의 노화를 앞당긴 것은 분명하고 DF도 마찬가지로 망가뜨렸다. 그때는 미친 듯한 부정행위 분위기 앞에서 아무 방법도 없었고 게임 기술 인력도 한동안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울티마 온라인과 DF 플레이어가 좋아하던 게임을 어쩔 수 없이 접었다.
다들 공정하고 깨끗한 환경의 게임이 절실하던 바로 그때 CS가 나타났다. CS의 기회는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치트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이 이 새로운 게임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많은 DF 프로 플레이어가 CS로 옮겼는데, 지금 다들 비교적 잘 아는 CS 프로 선수 OY 같은 이들이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때 DFCN 연맹의 핵심 구성원들이 CS를 접하고 이 FPS 게임의 치열함과 풍부한 화면 질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국내의 CS 사이트는 21스지파이구(21世纪排骨)의 하프라이프 사이트와 상디폔아이부빙의 싱윈 CS 전문 사이트뿐이었다. 21스지파이구는 21세기 갈비라는 뜻이고, 싱윈은 성운이라는 뜻이다. 많은 DFCN 지지자가 CS 정보에 대한 요구를 채워 달라며 DFCN에 CS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DFCN의 전환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었다. 그때부터 DDM과 라오멍, ddjack 등은 날마다 밤을 새워 CS의 여러 특성을 연구했고, 새 사이트에 www.Ccsk.ne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도메인은 DDM의 개인 자산이었다.
CCSK의 초대 웹마스터 ddjack은 왜 사이트를 만들자마자 떠났는가?¶
대부분은 ddjack이라는 이름에 인상이 없다. CCSK에 있던 시간이 아주 짧기 때문이다. 당시 CCSK의 책임자는 원래 라오멍이었어야 했는데, 라오멍은 그때 DF 리그가 아직 끝나지 않아 도저히 CCSK 업무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DDM이 DFCN, 곧 중국 델타 포스 연맹의 일원인 ddjack을 데려와 CCSK 사이트를 만들게 했다. 그때 CCSK 전체가 ddjack 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기술과 디자인부터 웹페이지 갱신까지 다 그가 했다. 뒤에 같은 DFCN 소속인 주톈이 뉴스 갱신을 맡아 파견되어 CCSK 초대 뉴스팀 팀장이 되었다. 이 둘이 CCSK 사이트 초기의 운영을 지탱했다.
그러다 2000년 5월 무렵 DF 리그가 끝나자 라오멍과 DDM 등 옛 DF 사이트 구성원들은 DFCN을 완전히 접고 CCSK 일에 전념했다. 이때 ddjack은 개인 사정으로 CCSK를 떠났다. 인터뷰에서 왜 CCSK를 떠났는지 물었더니 그는 쑥스러워하며 여자친구 때문이라고 했다. 사이트를 하느라 여자친구를 자주 소홀히 했고 여자친구가 그것에 무척 불만이어서 CCSK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조용히 지내다가 2002년 10월 하오팡 과학기술에 들어갔다. ddjack이 바로 지금 CGA 마케팅부의 스싼장(十三张)이고, CGA 포럼의 CGA_CiCi다. 스싼장은 중국식 카드 게임의 이름이다.
CCSK 초기는 어떤 모습이었나?¶
초기 CCSK를 황량하다는 두 글자로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없는 것 천지였다. 페이지와 뉴스 갱신부터 기술 유지, 운영 자금부터 서버를 놓을 자리까지 기본적으로 다 ddjack 혼자 했다. 웹 서버는 CPGL의 ACEP과 DC가 지원했다. 스타크래프트 판의 오랜 친구들이라면 이 두 사람을 알 것이다. 애플리케이션과 데이터베이스 서버는 ddjack이 현지 전신국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해, 그들의 웹페이지를 만들어 주고 게임 서버를 놓아 주는 대가로 빌린 것이었다. 이 점에서 ddjack은 Ccsk 사이트를 띄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라오멍도 그의 일을 높이 평가했다.
DFCN의 전환이 점차 마무리되면서 초기 CCSK에 점점 더 많은 구성원이 합류했다. 주톈과 mad, 샤오팡, 추가 차례로 CCSK 사이트의 주력이 되었다. 초기의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CCSK 사이트의 인기는 CSchina 사이트와 비교할 수 없었다. 뉴스 하나를 올리면 대략 몇백 명이 봤다. 시작할 돈도 없고, 광고를 끌어올 이름값도 없고, 대회를 치를 인력도 부족했다. 기본적으로 악순환이었다. CCSK가 발전하려면 이 악순환을 깨야 했는데, 깨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는 한 글자, 돈이었다. 더 많은 돈을 마련해 발전하려고 CCSK 초기 구성원들은 먹고 입는 것을 줄이며 살았다.
양천, 열정이 타오르던 나날을 싸워 나가다¶
2001년, 양천은 CCSK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 게임 판에서 아주 유명한 샤오싼사오(笑三少)와 CAT[AOQ], ddjack, 마오솨(毛刷) 등과 함께 U톈 작업팀을 만들었다. 그전에 이들의 울티마 온라인 서버는 당시 온라인 게임 판에서 꽤 잘 굴러가고 있었고, 당시 국내 온라인 게임 시장의 잠재력은 대단히 컸다. 미르의 전설이 아직 중국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기반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로 투자 감각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운이 조금 모자랐던 것인지, 아니면 당시 국내 온라인 게임의 발전 환경이 정말 무르익지 않았던 것인지, 그들의 노력은 결국 연기처럼 흩어졌다. 마음은 꺾였지만 열이 식지는 않았다.
싼사오가 그 시기에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환경에 대한 질타가 있고, 플레이어 소양에 대한 비판이 있고, 뿌리 깊은 전통 관념에 대한 막막함이 있고, 당시 국가가 사방에서 막아서던 것에 대한 실망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진지함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하고 있었고 뭔가를 이뤄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물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이 그때는 맞물리지 않았고, 그래서 U톈 작업팀은 해산했다.
싼사오와 양천은 둘 다 실망스러운 감정 속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한 사람은 열아홉에 중국 최연소 온라인 게임 마케팅부 매니저가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CCSK로 가서 라오멍, 싱싱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e스포츠의 길에 올랐다.
2001년 중반, ddjack의 소개로 당시 베이징에서 학교를 다니던 양천이 CCSK에 합류해 라오멍, 싱싱과 셋이 베이징에서 부딪혀 나갔다. CCSK 기자에서 기자팀 팀장까지, 양천은 자기 꿈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열정이 타오르던 세월을 싸워 나갔다. 뒤에 내가 그를 인터뷰할 때 이 시절을 돌아보던 그의 즐거운 감정은, QQ 너머로도 그가 화면 앞에서 웃는 표정이 보일 정도였다. 양천은 아주 감성적인 사람이다. 지금은 그때의 성질 급하고 다혈질이던 바오바오를 다시 볼 수 없지만, 나와 옛일을 돌아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 벅참이 늘 느껴진다.
특히 그가 말한 일이 하나 있다. 2001년, CCSK가 접촉한 첫 투자사가 갑자기 투자를 거둬들였다. 회사는 모두에게 두 달치쯤 임금을 밀렸는데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돈을 아끼려고 그들은 지하실로 옮겨 갔다. 라오멍이 2,000위안을 내놓았고, 그때 그들은 이 2,000위안을 다 쓰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양천은 그때 무척 막막했고 계속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몰랐다고 나에게 말했다.
싱싱은 포럼을 위해 끼니를 줄였다¶
끼니를 줄인 이야기를 하자면 CCSK의 부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전 CCSK 기술팀 팀장 싱싱을 말해야 한다. 다들 알다시피 CCSK의 뒷날 부상은 상당 부분 CCSK의 포럼 덕이다. 포럼은 거대한 CS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어 냈고 등록 사용자 25만 명, 동시 접속 최고 2,900명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다 나중 이야기다. 처음에는 ddjack의 인맥에 기대어 포럼 서버와 뉴스를 한동안 화이베이의 전신 서버에 두었다. 그 뒤 싱싱의 노력으로 이 데이터는 싱싱이 울티마 온라인용으로 쓰던 서버에 옮겨졌고, 2002년 말 그 울티마 온라인 서버가 문을 닫을 때까지 거기 있었다.
처음의 포럼은 200명까지만 지원할 수 있었다. 싱싱은 포럼이 점점 늘어나는 등록 수를 감당하게 하려고 CCSK 포럼 프로그램을 바꾸자고 강력히 제안했고, 프로그램을 바꾸면 CCSK의 인기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저기 설득하고 다녔다. 그러나 포럼 프로그램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고, 이것은 당시 수입이 변변찮던 CCSK에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싱싱은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끼니를 줄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끌고 가자 바오바오와 라오멍도 끼니를 줄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다들 고기를 먹지 않았다. CCSK 초기에 후원을 따내고 광고를 끌어오고 대회를 조직하러 다니던 구성원들에게 이것은 체력부터 정신력까지 두루 시험받는 일이었다.
초기에 CCSK를 가장 많이 도운 CCSK 바깥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자, 그들은 플레이어들의 열정과 팀 안 사람들의 사심 없는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 말고도 모두 두 사람을 꼽았다. CPGL의 ACEP과 DC다. 스타크래프트 시대부터 e스포츠를 해 온 두 선구자이고, CCSK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은 CCSK 초기에 웹 서버를 도와준 중요한 몫에 그치지 않고, 거의 믿음에 가까운 도움이었다.
라오멍은 고마움을 표하며 ACEP을 특별히 언급했다. 라오멍은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서 이 산업에 대해 훨씬 또렷한 인식을 얻었다. 그의 어떤 방식과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향 아래 우리 DFCN과 나아가 CCSK를 앞날이 넓은 새로운 산업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멀리 내다보는 눈이 CCSK의 뒷날 발전 방향을 만들었고, 라오멍 일행의 마음속 믿음을 지금까지 이어지도록 굳혔다.
바오바오는 고마움을 표하며 DC를 특별히 언급했다. 바오바오는 이렇게 말했다. "WCG 2001이 내가 DC를 알게 된 때다. DC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 e스포츠의 절대적인 선구자인데 그를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러나 DC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아주 존경한다. DC는 WCG 2001 이후 중국 e스포츠를 떠났다. 2002년 WCG 현장에 초청 손님으로 나타난 적이 있지만 곧 다시 떠났다. 내가 아주 우러러보는 사람이다." DC는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인터뷰에서 바오바오가 우러러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을 나는 처음 들었다. 그래서 정면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않은 이 e스포츠 선배 DC에게 더욱 경외감을 느꼈다. 그래서 아주 우연히 DC가 찍힌 사진 한 장을 특별히 찾아내 DC 부분만 잘라 여기에 놓아 둔다. 중국 e스포츠인들에게 남긴 그의 깊은 영향에 감사하는 뜻이다.
2002년 포럼의 변혁은 CCSK 발전사의 이정표다. 그것은 CSchina의 쇠퇴와 CCSK의 부상을 알렸다.
2002년이 되어서야 싱싱은 아껴 모은 돈으로 포럼 프로그램을 샀다. 그것이 다들 그때 본 하늘색과 흰색의 포럼이다. 그런데 이 포럼도 동시 접속 200명까지만 지원했고 포럼 프로그램 개발도 끝나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싱싱은 뒤이은 한 달 동안 끊임없이 포럼 버그를 고쳤다. 2002년 초 평균 접속자 수는 1,000명이었는데, 마침 제2회 WCG와 맞물려 포럼 등록자 수와 접속자 수가 계속 올라갔다. 이 기간에 항저우 지역 예선에서 ICE 팀이 부정한 내막에 휘말린 사건이 벌어졌고, 접속자 수는 금세 2,000명으로 올랐다.
WCG 후반에 CCSK 기자팀은 포럼에서 최우수 뉴스 기자 시상 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들 영영 잊지 못하는 일, E|Zero 팀이 WCG 2002 중국 지역 우승을 차지한 뒤 한국행 자격을 취소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CCSK가 이 일을 발 빠르게 추적 보도한 덕분에 CCSK 포럼의 접속자 수는 2,000명에서 3,500명으로 급격히 올랐다. 이 기간에 싱싱은 포럼의 안정을 위해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포럼을 업그레이드하고 손봤다.
포럼은 CCSK 발전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거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 CSchina의 포럼은 거대한 부하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고, 원래 CSchina 포럼 회원 상당수가 CCSK 포럼으로 옮겨 왔다. 이것이 CCSK의 커뮤니티 문화에 탄탄한 기초를 놓았고, CSchina는 이때부터 지지자를 점차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2년 포럼의 변혁은 CCSK 발전사의 이정표다. 그것은 CSchina의 쇠퇴와 CCSK의 부상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