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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중국 인디 게임 개발자 산쥔의 고민

저자 BBKinG(류양, 刘洋)이 계획했으나 끝내지 못한 두 번째 책 《중국 게임의 이면사》 중 한 장.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七 单隽的困惑 中国独立游戏人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5년 10월 15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0262129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산쥔(单隽)의 이력은 무척 특별하다. 열다섯 살에 혼자 실시간 전략 게임을 짜기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중국과학기술대학(中科大)이 여는 "전국 대학생 게임 대회(全国大学生游戏比赛)"에서 우승했다. 스물세 살에 성다(盛大)의 최연소 게임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었고, 스물일곱 살에 창업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Xbox Live Arcade)에 콘솔용 3D 격투 게임 《펑쥐안찬윈(风卷残云)》을 내놓아 국내외에서 여러 게임 상을 받았다.

"인디 게임 개발자란 무엇인가?"

2015 도쿄 게임쇼(TGS) 출전을 막 마치고 온 산쥔이 내 취재 개요를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던진 물음이었다.

"재정의 독립? 생각의 독립? 제작의 독립?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런 것들로는 어느 하나도 인디 게임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산쥔은 웃으며 이 말에 대한 자기 의문을 털어놓았다.

나는 산쥔이 중국 게임계에서 겪은 부침을 생각하면 그가 간단하고 분명한 답을 주리라고 여겼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겪었기에 그 답이 한 번도 간단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도 모른다.

산쥔은 1981년 8월 30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온 가족이 10제곱미터도 안 되는 집에 끼어 살았고 부모도 일찍 이혼했다. 오랜 억눌림과 집안의 불안정은 그의 성격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외톨이에 내성적이면서도 지기 싫어했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림 재능은 산쥔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어린 시절에는 자동차와 기차를 그렸고, 1학년 때는 《트랜스포머》를, 4학년 때는 《세인트 세이야》를 그렸다. 하나같이 친구와 반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읽혔고, 그것이 그에게 큰 성취감을 주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자기가 만든 만화집이 생겼는데 특히 격투 만화가 그랬고, 그 뒤로 갈수록 많이 그렸고 갈수록 깊이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는 만화를 그리는 데 이미 경험이 붙어서, 시작하기 전에 먼저 5만 자짜리 대본을 쓰고 한 권에 20쪽인 손그림 단행본을 정기적으로 냈다. 온갖 자유로운 착상이 자기 작품에 녹아들었고, 심지어 반 아이들을 여럿 만화 속 인물로 만들어 넣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훨씬 널리 퍼졌다.

한쪽에서는 산쥔이 자기가 만들어 낸 가상 세계 하나하나에 잠겨 날아다녔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선생님과 부모가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사이에서 갈등에 빠졌다. 다행히 이때의 산쥔에게는 아무 의문도 없었다. 그는 한때 그림이 자기 미래라고 여겼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그해에 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을 열었다. 이 수업은 한 학기의 절반만 열렸는데도 산쥔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 수업에서 그는 문득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후시 노동자 문화궁(沪西工人文化宫)에 가서 하던 《콘트라(魂斗罗)》, 《팩맨(吃豆人)》, 《갤럭시안(小蜜蜂)》이 바로 눈앞의 이 명령어 한 줄 한 줄로 짜인 것이었다.

이 발견에 그는 몹시 흥분했다. 드디어 "살아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마침 집에서 컴퓨터를 사 주어서 게임 프로그래밍을 파고들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하여 산쥔이 예전에 수업이 지루할 때 설계했던 카드 보드게임은 공격과 방어가 있는 컴퓨터 턴제 전략 게임으로 바뀌었다.

그는 또 팔레트로 점을 찍어 픽셀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전에는 종이 위에 누워만 있던 탱크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전차로 바꾸었다. 차 위의 포탑은 회전까지 했고, 하는 사람이 다른 종류의 포탑을 고를 수도 있었다.

산쥔이 만든 세계는 갈수록 커졌다. 로켓포를 든 병사, 쏠 수 있는 미사일, 여러 병종이 섞인 부대, 나아가 실시간 대전까지 생겼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그의 집으로 게임을 하러 왔다. 그런데 그에게는 컴퓨터가 한 대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화면을 좌우로 나누어 보여 주는 게임으로 프로그램을 고쳐 썼다.

다만 대전을 할 때는 누군가 책을 들고 양쪽의 시야를 가려 주어야 했다. 왼쪽 아이는 키보드로, 오른쪽 아이는 마우스로 조작했다.

지금 보면 꽤 어수룩한 방식이지만, 1990년대 말의 아이들에게 자기 게임 세계에 직접 참여하고 그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움이자 즐거움이었다.

1999년 산쥔은 상하이 자오퉁대학(上海交通大学) 미술과에 들어갔다. 자오퉁대학의 탄탄한 컴퓨터 교양 과목과 도서관 덕분에 그의 게임 프로그래밍 실력은 크게 늘었다.

상하이 자오퉁대학에는 2학년이 되어야 학교에 자기 컴퓨터를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2학년이 되어 컴퓨터를 받자마자 그는 더 복잡한 대전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산쥔은 이것이 보는 사람도 재미있어야 하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이 착상은 산쥔이 어릴 때 겪은 일에서 나왔다. 그에게는 집에서 혼자 조용히 전략 게임 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친척이 있었는데, 그와 다른 아이들이 손님으로 찾아가도 옆에 앉아 눈만 껌뻑이며 보는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하루 종일 그랬다. 그때 그는 보는 사람도 게임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 생각을 품고 그는 여러 친구와 반 친구들, 그리고 자기처럼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형 산후이(单晖, 현 텐센트 《톈톈쿠파오(天天酷跑)》 게임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로봇 대전 게임을 설계하기로 했다.

이 게임의 방식은 무척 특별했다. 산쥔은 속성이 다른 로봇을 여럿 설계했다. 이를테면 화력이 강한 로봇, 적을 붙잡아 동료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 주는 로봇, 날쌔게 적의 뒤로 돌아가 엉덩이를 걷어차는 로봇, 원거리 저격만 하는 로봇, 근접 육박전을 하는 로봇 같은 것들이었다.

하는 사람이 인터넷으로 로봇을 직접 실시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플로피 디스크에 로봇의 명령을 저장해 두는 방식이었다. 상황을 미리 판단하고 실행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짜야 했다. 그런 다음 같은 대회용 컴퓨터에 함께 불러들여 양쪽 로봇이 알아서 겨루게 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공지능 AI 설계를 겨루는 것이었다. 사람이 조작하지 않는 상태에서 누구의 로봇이 온갖 돌발 상황에 더 똑똑하게 대응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산쥔은 컴퓨터협회를 통해 자오퉁대학에서 대회를 한 번 열었고, 호기심을 느낀 게임 애호가가 많이 참가했다.

대회 당일 현장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들 설계한 프로그램을 하나씩 꺼내 맞붙였고 관중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떤 로봇은 프로그램이 덜 다듬어져서 대단히 어수룩하고 귀엽게 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제자리에서 계속 돌기만 했고, 어떤 것은 아무 데나 쏘다가 자기편을 맞히기도 했다. 아주 뛰어난 것도 있어서 온갖 상황을 판단해 냈고 현장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졌다.

산쥔의 형은 이때 중국과학기술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생의 게임을 보고 나서 중국과학기술대학이 해마다 여는 "전국 대학생 게임 대회"에 이 게임을 들고 나가 보라고 권했다. 산쥔이 인생 첫 우승을 거둔 것이 바로 이 대회에서였다.

그러나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인디 게임 제작자 한 무리를 알게 된 일이었다.

특히 청두 전자과기대학(电子科技大学)에서 온 젊은이, 곧 그 대회의 준우승자가 그가 그때까지 몰랐던 시스템 저수준 기술을 많이 알려 주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DOS의 640K 메모리 제한을 넘어서는 기술이었다. 픽셀 게임 시대에는 대부분의 그림이 작아서 게임 하나가 통틀어 1, 2메가바이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제한 때문에 많은 게임 제작자가 게임의 안정성과 복잡하고 풍부한 내용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다. 이 제한을 넘어서면 산쥔은 더 크고 더 복잡한 게임을 설계할 수 있었다.

그래서 3학년 때 산쥔은 동문 후링(胡岭)의 권유로 상하이 자오퉁대학의 한 게임 제작 팀에 들어갔다. 이 팀에는 뒷날 아주 유명해진 또 한 명의 게임 제작자 천싱한(陈星汉, 해외에는 Jenova Chen으로 알려져 있다)도 있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벼르기만 했고 가라테도 오래 익힌 산쥔은 마침내 늘 가장 만들고 싶었던 격투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두 달 만에 DOS로 3D 효과의 데모(시제품)를 만들어 냈는데, 타격감이 핵심이었고 물리 연산까지 설계해 넣었다.

그 격투 게임이 DOS에서 돌아가는 데모 화면이다.

젊음의 대가

팀도 생겼고 기술도 생겼으니 대체로 산쥔의 인생은 좋은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젊고, 소통할 줄 모르고, 팀 협업 경험이 모자라고, 어린 나이에 뜻을 이룬 데서 오는 자만이 조금 있었던 탓에 산쥔 자신의 문제도 이때 드러났다.

산쥔은 젊은 인디 게임 개발자는 대체로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한다. 좋은 점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고, 팀 협업은 또 다른 이야기다.

당시의 산쥔은 그 정도를 다루는 데 아직 서툴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팀의 구성은 꽤 좋았는데도 소통과 조율이 모자라, 원래 기대가 컸던 팀의 게임 세 편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일은 그에게 아무런 경각심을 주지 못했다.

이해가 2003년이다. 산쥔은 4학년이 되었고, 성다를 앞세운 중국 온라인 게임 산업은 한창 불이 붙어 있었다.

컴퓨터로 이름난 상하이 자오퉁대학은 자연히 인재를 끌어가려는 곳들의 첫 표적이 되었고, 게임 설계 대회에 여러 번 나가 상을 받은 산쥔의 이력도 자연스럽게 성다의 핵심 연구개발 부서로 이어졌다.

2주 동안 고객 지원을, 두 달 동안 운영을 맡은 뒤 산쥔은 《촨치스제(传奇世界)》 프로젝트 연구개발 부서로 돌아가 장면과 레벨 설계를 맡았다.

산쥔은 그해가 무척 고됐다고 말한다. 블리자드 《디아블로 2》의 애호가인 그는 《미르의 전설(传奇)》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열심히 일했다. 그래야만 자기가 게임을 설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년 뒤 《촨치스제》는 크게 성공했고, 스물세 살의 산쥔도 바라던 대로 성다의 최연소 게임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캐주얼 턴제 전략 게임 《싼궈하오샤좐(三国豪侠传)》 개발을 맡았다.

이 게임의 핵심 설계는 남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임의 데모는 금세 나왔다. 수치가 대단히 불균형해서 산쥔은 몹시 불만이었지만 운영 쪽은 아주 좋다고 봤다. 불공평이야말로 플레이어가 성장을 좇게 만드는 동력이고, 불공평한 기술이 있으면 플레이어는 오히려 남아서 계속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고 이상주의적이었던 산쥔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운영 쪽의 상업화 조언을 겸허히 듣지 않았고, 게임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밀어붙여 게임 수치의 균형을 맞추고 낮은 성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천톈차오(陈天桥)가 주재한 회사 기획 교류회에서 천 대표가 산쥔의 게임에 설계가 꽤 괜찮은 것이 하나 있는데 좀 더 간단하게 고칠 수 없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산쥔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개발자에게는 자기 나름의 추구가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현장 분위기 전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시절을 돌이키며 산쥔은 몹시 후회한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의 오만과 독선 때문에 중국 게임 이용자를 이해할 황금기를 놓쳤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기를 대단히 아껴 주던 상사와 동료를 여럿 완전히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2006년 《싼궈하오샤좐》은 2년 가까운 개발 끝에 실패를 선언했다.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산쥔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고 성다에서 해고되었다.

당시의 성다는 많은 사람의 눈에 중국 게임 제작자의 천국이었다. 자금도 넉넉했고 제품도 강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대행하던 주청(九城)도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성다에서 이름이 지워졌다는 것은 이 업계에서 공개적으로 부정당했다는 뜻이었다. 산쥔은 그야말로 한 걸음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꿈에서 깬 듯한 산쥔도 자기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자기 부족함도 알게 되었고, 발을 땅에 붙이고 국내에서 잘 팔리는 캐주얼 게임과 롤플레잉 게임을, 이를테면 《메이플스토리(冒险岛)》 같은 것을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쥔은 그 뒤로 자기도 여전히 지키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성다를 떠난 뒤 산쥔은 친구의 소개로 당시 막 게임 소프트웨어 외주를 시작한 상하이 링찬(上海灵禅)에 프로젝트 매니저로 들어갔다.

그 뒤 세가의 한 게임 프로젝트를 함께하다가 산쥔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기 엑스박스 플랫폼의 중국 진출 길을 닦으려고 미리 청두에 게임 인큐베이션 센터를 세웠고, 중국 본토 게임 몇 개를 골라 엑스박스의 온라인 게임 상점(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에 올릴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 인디 게임에도 산쥔에게도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XBLA라는 플랫폼은 지금의 애플 온라인 상점과 비슷하면서 더 엄격했고, 여기에 올라간 게임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공식으로 세계를 향해 밀어 주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게임만 좋으면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와 수입이 따라온다는 뜻이었다.

XBLA는 게임 발행의 문턱을 크게 낮추어서, 인디 게임이 개발자 몇 명만으로도 정말로 독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산쥔은 이 기회를 잡았다. DOS로 《펑쾅라오수(疯狂老鼠)》라는 데모를 만들었는데 역시 대전형 캐주얼 소품이었고, 석 달도 되지 않아 마이크로소프트의 협력 확정을 받아 냈다. 그것도 엑스박스의 국제 시장을 향한 것이었다.

이 일로 그는 자신감이 크게 붙었고, "인디 게임과 XBLA"라는 조합으로 국내 시장을 피해 곧장 국제 제품을 만드는 노선이 통할 것 같다고 여겼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정말 인디 게임을 너무 쉽게 봤다." 내 맞은편에 앉은 산쥔이 자기를 한 번 놀렸다.

2007년 대학 시절 오랜 벗 후링이 다시 부르자 산쥔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다.

회사는 두 사람뿐이었다. 후링이 엔진과 도구를 짜고 산쥔이 핵심 로직을 짰으며 미술과 음악은 외주를 주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게임 제작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산쥔이 만들고 싶고 또 잘하는 격투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 전용으로 만든 3D 격투 게임 《펑쥐안찬윈》이 나왔다.

그러나 플랫폼 추천을 받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여는 게임 대회 Dream Build Play에 나가는 것으로, 우승하면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경쟁이 상당히 치열해서 전 세계의 인디 게임 개발자를 만나게 되고 최종 결선에는 보통 마흔에서 쉰 편이 올라왔다.

산쥔 일행은 그 뒤 2년 동안 3등상 한 번과 2등상 두 번을 받았다. 가까웠지만 XBLA에 올라가기에는 모자랐다.

다른 길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정하는 퍼블리셔를 찾아 그 퍼블리셔를 통해 XBLA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길은 산쥔이 전에 마주했던 방식과 거의 같았다. 간단히 말해 어떤 상업 회사가 당신의 게임에 투자할 뜻이 있고, 나중에 플랫폼에 올라가 많이 팔리면 다 같이 이익을 나누는 것이다.

이때가 이미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였다. 텐센트의 온라인 캐주얼 게임은 이미 큰돈을 벌고 있었고, 유럽과 미국 사람을 위해 만든 산쥔의 콘솔 격투 게임은 국내 시장의 주류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2년 동안 발행 계약을 따내지 못했고, 후링과 산쥔의 저축은 거의 바닥났으며 가정에서 오는 압박도 대단히 컸다.

후링의 아내는 출산이 가까웠고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가족을 돌봐야 했다. 양쪽 사이에서 난처해진 그는 자기가 그쪽에서 돈을 벌어 산쥔을 먹여 살릴 테니 게임을 계속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산쥔은 마음이 편치 않아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다른 살길을 찾기로 했다.

2009년 말, 중국 국내 게임이 한창 잘나가던 상황에서 산쥔은 인디 게임 하나를 들고 오히려 막다른 데까지 몰렸다.

그는 자기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게임의 방향을 의심했고, 인디 게임을 의심했다.

바로 그가 가장 막막했던 순간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기가 찾아왔다.

산쥔의 옛 직장 성다의 18기금(18基金)이 수천만 위안 규모의 투자로 《펑쥐안찬윈》을 후원하기로 하고 제품을 만들 시간을 3년 주기로 정했다. 대단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산쥔은 곧바로 열몇 명의 팀을 꾸렸다. 게다가 성다가 뒤를 봐 준 덕분에 거의 순식간에 외국 게임 발행사와 이야기가 되었고 XBLA와의 협력도 확정되었다.

게임을 만들 돈이 생겼고 엑스박스 플랫폼에도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2년을 매달려도 아무 성과가 없던 일이 거의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해피 엔딩?

사실 나는 글을 여기서 끝내고, 산쥔과 그의 인디 게임이 그 뒤로 행복하고 즐겁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게 잔혹해서, 그 뒤 2년 동안 큰 반전이 두 번 일어났다.

첫째, 《펑쥐안찬윈》은 출시 첫 달에 8000장이 팔렸고 국내외 플레이어에게 좋은 평을 받았으며 지금도 바이두 톄바(贴吧)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가 있다. 그런데 힘을 실어 밀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발행을 맡은 그 외국 회사가 마이크로소프트와 틀어졌다. 그 회사의 게임이 전부 내려갔고 《펑쥐안찬윈》도 그 때문에 판매가 중단되었다.

둘째, 성다의 18기금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산쥔 팀의 두 번째 게임은 이제 겨우 절반쯤 만든 참이어서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시점이었는데 자금이 끊겼다.

2013년 온갖 풍파를 겪으며 힘겹게 버티던 산쥔은 마침내 견디지 못했다. 마음이 식은 그는 인디 게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상업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데모를 들고 여기저기 후원을 찾아다니는 고된 길에 다시 올랐다. 이때의 그는 이미 혼자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는 여러 해 자기를 따라온 스무 명 남짓한 형제들이 있었고, 그들 뒤에도 생활과 가정의 압박이 많았다.

산쥔은 말한다. "나를 위해 창업해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만들다가 남을 책임지며 남이 좋아하는 게임을 만들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아주 큰 전환이다. 여기에 좋고 나쁨은 없고 옳고 그름의 결론도 없다.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사람이 더 여물어져서 예전만큼 극단적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인디 게임이란 무엇인가, 인디 게임 개발자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물음을 다시 돌아볼 때도 예전보다 더 복잡하고 더 담담해진다."

산쥔, 중국의 인디 게임 개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