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빈민가에서 나온 e스포츠 백만장자, 멍양¶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十五 贫民窟走出的电竞百万富翁 孟阳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2월 5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30299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1983년 1월 29일, 멍양(孟阳)은 청두시 둥청구(东城区)에서 가장 어지럽고 가장 가난한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이때 그가 만리장성 위에서 e스포츠 대회로 상금 100만 위안을 받기까지는 아직 21년이 남아 있었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이미 충분히 낮다고 생각한다면 틀렸다.
멍양이 열 살 때 아버지가 형사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어머니는 백혈구 수치가 아주 낮아 자주 쓰러졌고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안의 경제적 기둥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뒤따라온 사회의 차별이 진짜 고문이었다.
열 몇 살짜리 아이가 학교 선생에게서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 아버지가 살인자니까 너도 살인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육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선생이라는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열 몇 살의 어린 멍양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는 것인가? 왜인가?
선생이 어린 멍양을 괴롭혔고 같은 반 아이들도 괴롭혔다. 멍양이 날마다 학교를 오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 하나 있었다. 긴 길은 아니었지만 멍양은 그 길이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같은 학교 아이들이 그 길에서 그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이 일은 뒷날 멍양의 성격에 아주 큰 영향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과 어울리려 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을 피했으며, 좋아하는 게임까지도 혼자 싸우면 되는 것으로 골랐다. 그러나 운명에 그대로 굴복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마음 한구석에는 아주 작은 바람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자기를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실 이렇게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극단으로 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실제로 그는 한동안 선생과 학교를 몹시 미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평범한 인생을 바랐고, 다른 한편으로는 돌봐야 할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슴도치처럼 무수한 날카로운 가시로 여리고 예민한 속을 감쌌고,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들을 되도록 쫓아냈다. 그렇게 해야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비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기에게 결코 선하지 않았던 이 사회를 원망하거나 적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멍양은 주성치(周星驰)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영화 속 보잘것없는 인물들이 보여 주는 낙천성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부러웠다는 것은, 그때의 그는 그럴 수 없었다는 뜻이다.
1997년,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열네 살의 멍양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둔 뒤 멍양은 어머니와 함께 비디오 상영관을 하나 운영했다. 표를 사서 비디오 영화를 함께 보던 곳이다. 가게는 집에서 가깝지 않아 날마다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물을 끓여 차를 내고 손님을 끌었다. 한 사람에 1위안이었고 하루 표값으로 50위안쯤 들어왔다.
이때 멍양이 100만 위안을 받기까지는 아직 7년이 남아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꿈? 그의 분노? 그의 모든 것이 운명에 단단히 짓눌려 있었고 뒤집을 기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뒷날의 e스포츠가 없었다면, 퀘이크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다행히 운명은 결국 그를 e스포츠와 이어 놓았다.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1997년 4월의 어느 날, 멍양의 어머니가 그에게 용돈 6위안을 줬다. 평소에는 5위안만 줬는데 무슨 까닭인지 그날은 1위안을 더 줬다. 멍양은 늘 그랬듯이 근처 컴퓨터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컴퓨터방은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중국 PC방의 전신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가 보니 동네 전체가 정전이라 컴퓨터방이 문을 열지 않았다. 김이 샌 멍양은 옆에 있는 가판대에 들러 컴퓨터 하드웨어 관련 잡지가 있는지 보려고 했다. 전부터 그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집어 든 것이 《가정용 컴퓨터와 게임기(家用电脑与游戏机)》라는 잡지였다. 값이 6위안이었고 그는 그것을 샀다.
그 호에는 《퀘이크 2》를 다룬 글이 하나 실려 있었다. 멍양은 전에 다른 슈팅 게임 《델타 포스》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재미있는 것은 그 글에 퀘이크 2는 계속 점프하면서 싸워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멍양에게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였다. 현실을 그렇게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는 게임이 있다니, 해 보고 싶어졌다. 마침 그가 자주 가던 컴퓨터방에 그 게임이 있었다. 사실 그 게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에 들어 있었지만, 그 아이콘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멍양의 퀘이크 2 시절이 시작되었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은 당시 컴퓨터방의 사양이 좋지 않아서, 그는 퀘이크 2의 화면을 휴대전화만 하게 줄여 놓고서야 게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를 지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고생일 것이다.
퀘이크 2 시절에는 다들 그냥 재미로 하는 정도였지만 멍양의 실력은 주변 게임 애호가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퀘이크 2에는 팀 서버가 스무 개 남짓 있었는데 그는 그 전부에 도전했다. 다만 당시의 하드웨어와 회선 사정 때문에 그가 만나 본 가장 강한 팀은 아시아 홍콩의 USF 팀이었다.
1999년 10월 1일 퀘이크 3의 1.07 테스트 버전이 나왔다. 멍양이 자주 가던 컴퓨터방의 주인은 게임을 아주 좋아하는 순찰 경찰관이었고, 그는 남보다 먼저 퀘이크 3을 구해 컴퓨터에 깔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멍양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퀘이크 2에 비해 퀘이크 3은 조작이 간단하고 화면도 훨씬 좋아졌다. 무기 밸런스도 아주 잘 잡혀 있어서, 이후 게임이 여러 번 업데이트되었어도 무기 시스템의 수치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진입 문턱이 낮아지고 컴퓨터 사양이 상대적으로 올라가면서 새 이용자가 더 많이 들어왔고, 퀘이크 3에 쏠린 관심도 퀘이크 2보다 훨씬 컸다. 규모가 제법 큰 대회가 몇 개 생기기 시작했고 스타도 몇 명 나왔다. 그런데 이때의 멍양은 아직 이름 없는 퀘이크 3 애호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1999년과 2000년, 멍양의 집안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다. 비디오 상영관은 진작에 접었고 수입은 있다가 없다가 했다. 열일곱 살의 멍양에게는 고를 길도 없었고 어쩔 도리도 없었다. 운명이 그를 새로운 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로 밀어내고 있었다.
2000년 3월 멍양은 청두에서 열린 퀘이크 3 대회에 나갔다. 참가비는 5위안이었다. 더 인상에 남은 것은 이 대회에 당시 판의 퀘이크 3 고수가 꽤 많이 왔다는 점이었고, 국내에서 아주 이름났던 DOC 팀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런데도 멍양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정면으로 붙었다. 유명 선수 Netboy와의 경기에서는 처음에 12점을 뒤졌지만 따라잡았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상대의 두 배를 냈다. 기세가 오른 그는 또 다른 고수 gameboy를 20 대 0으로 이겼고, 뒷날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대에 이름을 알린 Evil|SF의 감독 Butcher도 이겼다. 진 상대는 멍양이 평생 유일하게 스승으로 모신 덩허(邓和) 한 사람뿐이었고 그는 준우승을 했다.
이 한 판이 멍양에게 자신감을 줬다. 그는 이것이 길일지도 모른다고, e스포츠라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0년 8월 베이징의 화차이(华彩)가 주최하고 ChinaRen이 후원한 중국 최초의 CPL 예선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특별히 짚어 둘 것은 이 대회의 핵심 실무자가 Maverick, 곧 옌잉(颜颖)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름난 퀘이크 3 사이트 Q3ACN.com의 운영자였고 판에서는 라오마(老马), 곧 마 씨 형님이라고 불렸으며, 당시 화차이 소프트웨어의 기술 총괄이었다.
CPL의 대회 방식 특성상 그 CPL 예선에는 외국 고수들이 자리를 놓고 다투러 왔고, 그래서 그해 우승과 준우승은 모두 외국인이 가져갔다. 멍양은 4위였고 3위는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그의 친구이자 주된 맞수가 되는 CHJ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해 CPL 대회가 같은 해 WCGC(World Cyber Games Challenge, WCG의 전신)와 같은 타이핑양 컴퓨터 상가 건물에서, 그것도 같은 날 열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멍양은 CPL을 끝내고 8층으로 올라가 WCGC를 뛰었다.
WCG가 지금 세계에서 어떤 위상인지는 내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WCG가 물을 떠보려고 먼저 연 WCGC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e스포츠를 전문으로 다루는 통로가 너무 적었다. 전문 미디어는 아직 없었고 포털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e스포츠 대회의 규모도 아주 작았다. 예를 들어 WCGC 중국 예선 현장에는 컴퓨터가 여덟 대뿐이었고 참가자도 아주 적었다. 퀘이크 3 종목은 나온 사람이 다 서로 아는 몇몇이라 서로의 수준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예 경기를 하지 않았다. 대회 경험이 많은 Gameboy와 Butcher를 한국에 보내는 데 모두가 뜻을 모았다.
그해 WCGC에서는 아주 유명한 촌극이 하나 벌어졌다. WCGC 퀘이크 3 준우승자인 스웨덴 프로 선수 LakermaN이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인도 컴퓨터를 할 줄 아나?" 이 한마디가 중국 e스포츠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영향을 남겼다.
그가 그 말을 했을 때의 맥락이 무엇이었는지, 옮겨지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것은 아닌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한마디에 당시 중국의 플레이어들이 전부 분노했다. 젊은 멍양과 CHJ도 몹시 화가 나서 그를 반드시 이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를 이기려면 연습을 훨씬 더 해야 했고, 그것은 프로 e스포츠 선수의 길로 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행동이 나왔다. 덧붙이자면 이 한마디에 몹시 분노한 사람이 또 있었고, 그 일로 e스포츠 팀을 프로화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당시 lion 팀의 주장이자 뒷날 WE를 만든 페이러(裴乐, KinG)다.
프로화라는 생각 아래, WCGC가 끝난 뒤 멍양은 라오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1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화차이에 들어가 프로 선수가 되었다. 여기서 베이징 화차이라는 회사를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정식 명칭은 베이징 톈샤화차이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유한공사이고, 타이완 화차이 그룹의 중국 법인이며 퍼블리싱을 하는 회사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감이 잘 오지 않겠지만 다음 한마디면 분명해질 것이다. 《델타 포스 3: 랜드 워리어》와 《킹 오브 킹스(万王之王)》를 중국에 들여온 회사가 바로 여기다.
어느새 2001년 WCG 예선이 되었다. 이 예선은 아주 가혹했다. 첫 경기부터 멍양과 CHJ가 뽑힌 것이다. 이때 두 사람은 반년의 프로 훈련을 거쳐 이미 중국 퀘이크 3에서 가장 앞선 두 선수가 되어 있었다. 이 이른 충돌에 모두가 멍해졌다. 게다가 예선은 단판 탈락제였다. 다시 말해 반년 동안 고생한 훈련이 이 한 경기에 달려 있었다.
뒷날 한 친구가 그 경기를 떠올리며 멍양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장내가 어찌나 조용했는지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이렇게 친한 사이인데도 자기는 다가가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두 사람이 경기를 하는 동안 눈에 살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들 그해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에 첫 경기인데도 가진 것을 다 쏟아부었다. 그래서 그 경기의 수준과 치열함은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두고두고 꺼내는 명경기가 되었다. 결국 멍양이 종이 한 장 차이의 그 경기를 이겼다. CHJ는 꿈이 이렇게 일찍 끝날 줄 몰랐고 크게 실망했다. 이후 멍양은 거침없이 나아가 WCG 중국 지역 퀘이크 3 우승을 차지하고 중국 대표로 한국에 갔다. 그해 카운터 스트라이크 종목의 Evil|SF 팀도 함께 갔다.
안타깝게도 당시 중국 e스포츠의 수준은 국제 무대와 차이가 아주 컸다.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예로 들면, WCG에서 쓴 맵 몇 개는 국내 대회에서 써 본 적이 없었고 팀들도 연습한 적이 없었다. 대회 경험도 부족하고 업계 전체가 얇은 상황에서 성적이 나오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2001년 WCG를 다녀온 뒤 중국에서 대회 규칙을 국제 기준에 맞추자는 흐름이 일어난 이유가 이것이다. 그 순간부터 중국 e스포츠는 위에서 아래까지 혼돈기를 끝내고 발전의 방향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WCG, 또 한 해를 갈고닦은 멍양은 두 종목에 신청했다. 하나는 퀘이크 3, 하나는 언리얼 토너먼트였다. 그는 바라던 대로 WCG 중국 지역 우승을 차지했다. 함께 한국행 자격을 얻은 준우승자는 이 대회를 뛰려고 러시아에서 일부러 돌아온 판즈보(樊知博)였다. 다른 이름이 더 익숙한 사람이 많을 텐데, Jibo다.
이해 멍양은 열아홉이 되었다. 2년의 프로 훈련을 거쳐 그의 경기력도 작은 정점을 맞았다. 그는 퀘이크 3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자기만의 플레이를 갖추게 되었다.
멍양은 하나의 법칙을 발견했다. 선수가 조작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실수가 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거야 아주 간단한 말 아니냐고 한다. 맞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 전술 사상은 대개 간단하다. 예를 들어 마오 주석의 "이길 수 있으면 싸우고, 이길 수 없으면 달아난다"가 그렇다.
멍양은 이 생각을 바탕으로 자기 전술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다. 공격에서 수비로 옮긴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 수비하는 쪽보다 조작이 많으니 실수할 확률도 크기 때문이다.
WCG 전에 멍양은 유럽 선수들의 플레이를 연구하다가 그들이 거시적인 전장 통제를 중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맵 위 자원의 위치와 자원이 다시 나오는 시간을 아주 훤히 알고 있어서, 어떤 동선을 고르면 상대가 부활한 뒤에도 자원을 못 먹게 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당구와 비슷하다. 이 빨간 공을 넣은 뒤 흰 공을 어디에 세워야 한 큐로 계속 이어 갈 수 있는지, 공을 못 넣더라도 상대에게 넣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이 판 전체에 대한 거시적 통제다.
남의 것을 참고하고 자기 생각을 더해 멍양은 자기 전술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몸 사리기와 미행"이라고 불렀다. 유령 같은 암살자처럼 사냥감을 따라다니되 상대가 자기 위치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플레이는 실제로 효과를 냈다. WCG에서 그는 상대를 차례로 꺾어 나갔고, 마지막 한 판에서 두 발을 빗맞히는 바람에 미국의 Socrates에게 져 2002년 퀘이크 3 세계 4위를 했다. 이 종목에서 중국인이 낸 가장 좋은 성적이다.
2002년 이후 퀘이크 3의 황금기가 지나고 같은 시기에 새 게임이 끝없이 나왔다. 특히 조작 문턱이 더 낮고 실수를 더 너그럽게 받아 주는 슈팅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널리 퍼지며 크게 터지면서, 퀘이크 3은 아주 고수 중심의 좁은 판이 되었다.
멍양은 2003년 전까지 크고 작은 대회로 2만 위안 남짓을 벌었다. 많지 않게 들리겠지만 대회가 적디적던 그 시절에는 이미 큰돈이었다. 온 가족이 그의 대회 상금으로 먹고살았다. 그러나 퀘이크 3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대회가 줄면서 멍양은 다시 한번 바닥으로 밀렸다. 가장 가난할 때는 그와 어머니에게 남은 돈이 40위안뿐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멍양은 컴퓨터까지 팔았고, 국유 기업에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어 집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조금도 흥미가 없는 일이라 마지못해 했다.
2003년 멍양의 ESWC 프랑스 원정도 크게 실패했다. 그는 그 원인이 자기가 너무 자만해서 상대를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데 있다고 했고, 16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CCTV5도 프랑스 대회 현장에 촬영팀을 보냈다. 한번은 촬영 기사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너무 많은 압박을 지고 있다고, 마지막 경기에서 지고 나서 돌아섰다가 카메라가 자기를 향한 것을 보고는 분명히 괴로우면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지 않았느냐고, 그 모습을 렌즈로 보는 내가 다 마음이 아팠다고, 힘들면 자신을 그렇게까지 몰지 않아도 된다고.
이 말은 그 시기 멍양이 지나던 밑바닥 생활을 그대로 보여 준다.
2004년 전환점이 하나 생겼다. 줄곧 멍양과 함께 퀘이크 3을 연습하던 친구 Perfect, 곧 장커(蒋珂)가 멍양에게 상하이에서 e스포츠 프로 클럽을 하나 만든다고 알려 줬다. 장커는 뒷날 이름난 카운터 스트라이크 팀 Evil의 주전이 되는 사람이다. 그 클럽이 뒷날의 5E다.
멍양이 상하이에 도착한 날은 2004년 6월 13일이었다. 그가 2001년 베이징 화차이에 들어간 날도 6월 13일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5E는 당시 멍양에게 3,600위안을 줬는데 그때로서는 아주 높은 급여였다. 5E 클럽의 진용도 아주 화려했다. 책임자 류싱(刘星)은 금융 쪽 출신이라 투자를 끌어오는 데서 성과가 뚜렷했고, 레노버 그룹(联想)의 대주주 한 명에게서 투자를 받아 냈다.
그렇다면 5E는 왜 잠깐 반짝하고 사라졌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성적이 좋지 않았고 중요한 경기를 몇 번 졌다. 둘째, 한번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대회 출전 자격을 잃었다.
이 두 가지 일로 투자자는 이 팀의 기강이 너무 엉망이라고 판단해 후원을 끊었고, 5E는 반년 만에 해산했다. 마지막에 류싱은 5E를 통째로 베이징의 hunter 팀에 팔았다.
보다시피 중국 e스포츠의 발전은 아주 굴곡이 심했다. 시도도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아까운 것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잘못이 많았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 e스포츠가 무언가를 쌓아 성숙해지고 돌아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덜 걷기를 바란다.
5E의 실패가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2004년 7월 류싱이 멍양에게 베이징에 상금 100만 달러짜리 대회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멍양은 믿지 않았다. 당시 국내 대회의 규모는 그런 상금 수준과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한 달쯤 뒤 베이징에서 멍양은 그 대회가 진짜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타이완의 컴퓨터 하드웨어 회사 애빗(升技, Abit)이 여는 대회였고, 정식 명칭은 "애빗 Fatal1ty 만리장성 둠 3 100만 챌린지"였다. 종목은 둠 3(DOOM 3)으로, 퀘이크 3을 만든 id Software가 낸 게임이라 퀘이크 3과 아주 비슷했다. 다만 상금은 100만 위안이었지 달러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액수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대단히 큰 상금이다.
그런데 멍양은 아직 둠 3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급히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nVIDIA의 수석 엔지니어 가운데 한 명인 덩페이즈(邓培智)에게서 정품 둠 3을 얻었다. 최고 사양 컴퓨터를 구해 돌려 보니 이 게임은 하드웨어 요구가 아주 높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연습할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회 전에 멍양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이 게임을 접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을 다들 알았기 때문이다. 멍양 자신도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상금이 그렇게 매력적이니 어떻게든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Fatal1ty 쪽이 더 긴장한 듯했다. 맵은 그가 진작에 골라 뒀는데, 정식 경기 전에 멍양이 자기와 다른 선수의 경기를 보지 못하게 해 달라고, 200미터 밖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멍양은 받아들였다.
중국의 또 다른 정상급 퀘이크 3 선수 aZhe, 곧 장저(张哲)가 Fatal1ty에게 6 대 9로 진 뒤, 이미 Fatal1ty의 수준을 파악한 그는 200미터 밖에서 걸어 돌아온 멍양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 네가 저 사람을 못 이기면 내 목을 비틀어 너한테 주겠다.
멍양은 뒷날 그 경기가 조금도 볼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25 대 2까지 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경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해 뒀기 때문이다. 자기 퀘이크 3 리플레이를 잔뜩 꺼내 그때 무슨 실수를 했는지 되짚었고, 마지막에는 빈틈없는 경기 계획을 세웠다. 게임 안의 자원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 눈앞의 추격 기회를 버리더라도 자원을 먼저 잡아 상대가 자기와 맞설 무기를 못 얻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압도적인 승리가 나왔다.
멍양은 그때 현장에 기자가 140명 넘게 있었다고 했다. 15분 만에 이런 점수가 될 줄은 자기도 몰랐고, 그래서 몇 점을 양보했다고 한다. 멍양의 말로는 이렇다. "다 국제 손님인데 그렇게까지 피 튀기는 18세 이용가로 갈 필요는 없잖나. 좀 그렇지 않나."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편한 경기였다. 그런데 경기 뒤에 멍양이 Fatal1ty를 매수해 일부러 져 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멍양은 그때 해명할 방법도 없었고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행히 곧이어 2004년 12월 22일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CPL 윈터에서 멍양은 미국 1위 선수 Nomadic과 유럽 1위인 독일의 dragon을 차례로 꺾고 9,000달러와 무게 있는 둠 3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개인 종목 세계 챔피언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 경기로 사람들의 의심에 답한 것이다.
애빗이 그 100만 위안을 끝내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 일에 대해 멍양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몇 가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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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나고 일주일 만에 상금이 들어왔다. 멍양이 주최 측에 알려 준 계좌는 어머니의 것이어서 전화로 어머니에게 확인해 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확인한 뒤 그에게 앞자리가 8이고 뒤로는 0이 잔뜩 보인다고만 말했다. 개인소득세 20%를 떼고 받은 상금은 80만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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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빗도 처음에는 이 100만 위안이 뜻밖의 지출이라고 느낀 것이 사실이다. 라오F(老F), 곧 Fatal1ty가 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전 세계에서 보도가 쏟아지자 이 100만 위안이 아주 잘 쓴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두 현지에서 발행 부수가 아주 많은 청두상바오(成都商报)만 해도 A2 한 면 전체를 써서 멍양이 100만 위안 상금을 받은 이야기를 다뤘다. 이런 상업 브랜드의 홍보 가치는 100만 위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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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가운데 12만 위안은 클럽이 가져갔다. 멍양은 줄곧 함께 연습한 aZhe에게 7만 위안을 줬고, Perfect에게는 1만 위안을 훙바오, 곧 붉은 봉투에 넣어 줬다. 애초에 멍양을 5E에 소개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만 위안을 따로 내어 hunter 클럽 동료들의 생활을 낫게 하는 데 썼다. 이것이 멍양이다. 그는 형제들에 대한 의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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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돈으로 멍양은 2005년 1월 청두에서 50만 위안을 들여 집 두 채를 샀고, 2007년에는 옛집이 철거되면서 한 채를 더 받았다. 제곱미터당 2,100위안에 산 집은 지금 1만 3,000위안까지 올랐다. 멍양의 어머니는 지금 집에서 다달이 월세를 받아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이 모자는 마침내 안정된 생활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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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양은 만리장성 100만 챌린지와 CPL 윈터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국내 e스포츠 선수들을 자극하려고 여러 인터뷰에서 자기가 날마다 12시간씩 훈련한다고 말했다. 멍양은 이것이 선의로 친 허풍이었다고 했다. 실제로는 하루 훈련이 5시간 남짓, 그것도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예를 들어 그와 함께 방을 쓰던 스타크래프트 선수 PJ는 하루 연습 시간을 1시간에서 6시간으로 늘렸고, 이 말을 들은 WE의 Sky도 훈련 시간을 크게 늘렸다. 뒷날 《e스포츠(电子竞技)》 잡지 편집장이 그를 "중국 e스포츠의 정신적 지주"라고 부른 이유가 이것이다.
2005년 멍양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대회를 뛰며 상금을 버는 생활을 이어 갔고, 그렇게 30만 위안쯤을 더 벌었다. 2007년이 되자 그는 스물다섯이 넘으면 경기력이 크게 떨어진다고 보고 곧바로 대회를 그만두고 다른 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시기에 Razer의 대표 min이 멍양을 찾아와 한 달에 1,500달러를 주고 Razer 신제품 테스터를 맡기고 싶다고 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그 밖에 웹사이트도 했고 와인도 팔았다. 모두 자기 관심을 따라간 일이었다.
2007년 3월 15일 멍양은 World Elite에 들어가 FPS 종목을 맡았다. 그는 KinG, Sky 등 WE 창단 멤버들과 2004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 중요한 지원과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 뒤 멍양은 자기가 역시 게임 쪽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퀘이크 3 시절의 전우 Jibo가 있던 러시아 회사에 들어가 게임 수입과 수출 일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멍양은 텐센트에 들어가 여전히 게임 수입 쪽 일을 맡고 있었고, 게임에 대한 자기 경험과 감각으로 회사의 의사 결정에 조언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빈민가에서 나온 e스포츠 백만장자, 멍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