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이제는 분노 청년이 아닌 CEO 황이멍¶
저자 BBKinG(류양, 刘洋)이 계획했으나 끝내지 못한 두 번째 책 《중국 게임의 이면사》 중 한 장.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八 然而已经不是愤青的CEO 黄一孟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6년 8월 8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1668259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취재가 끝난 뒤 나는 황이멍에게 물었다. "Dash, 이 분노 청년 시절 이야기들, 정말 써도 되는가?"
분노 청년(愤青)은 세상과 체제에 분노하는 젊은이를 가리키던 그 시절의 말이다.
1982년 3월 18일, 황이멍(黄一孟, Dash)은 상하이 창닝구(长宁区)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그가 VeryCD를 세워 뎬뤼(电驴, eMule)를 중국에 들여오기까지 아직 20년이 남은 시점이었다.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기까지는 아직 21년이 남아 있었다.
분노 청년, 황이멍
황의 어머니는 병원 검사과 의사였고 아버지는 대학 체육 교사였다가 나중에 체육부 주임으로 올라갔다. 집안은 황이멍에게 비교적 깊은 영향을 두 가지 남겼다.
하나는 집안 형편이 괜찮고 부모의 생각이 트여 있어서 그가 게임기와 컴퓨터, 인터넷을 비교적 일찍 접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떠밀려 체육 계통에 들어가 온갖 몸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황은 아버지가 유난히 밝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어릴 때는 함께 《살라만더(沙罗曼蛇)》와 《콘트라(魂斗罗)》도 했다. 그러나 체육 쪽에서는 그에게 대단히 엄격했고 요구도 높았다.
이를테면 수영을 가르칠 때는 하루에 한 동작만 되풀이했다. 또 초등학교 2학년으로 아직 키가 작던 그를 농구부에 밀어 넣어서, 다른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다들 놀러 갔는데 그는 학교에 남아 슛 연습을 해야 했다.
NBA와 《슬램덩크》가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으니 이런 체육 훈련은 황이멍에게 몹시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이런 교육 방식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자아의 각성
황은 중학교 3학년 전까지는 흐리멍덩하게 지냈다고 말한다. 성적은 중하위였고 자기가 아주 평범하다고 여겼으며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앞날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둥사범대학(华东师范大学)의 한 실험 연구팀이 학교에 와서 반에서 지능 검사를 했다. 문제를 푸는 동안 황은 그저 그리 어렵지 않다고만 느꼈고, 다 풀자 그대로 냈다.
나중에 선생이 그를 따로 불러 말했다. 너는 이렇게 똑똑한데 그것을 다 공부에 쏟으면 성적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공부를 아주 잘하는 다른 한 명과 함께 반에서 지능 검사 최고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부터 황이멍은 자기가 아무래도 조금 다른 데가 있는 것 같다고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학습기(学习机)로 프로그래밍을 하던 일, 1990년대 초 아버지의 노트북 컴퓨터로 온갖 게임을 하던 일, 중학교 때 창닝구 소년과학기술관(少科站)에서 접한 파스칼(Pascal, 구조적 프로그래밍 언어)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그는 어렴풋이 한 방향을 보았다.
황은 갑자기 눈이 트였다고 말한다. 마침 중국에서 인터넷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는 빌 게이츠를 비롯한 기술계의 이름난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학교를 그만둔 뒤 회사를 세워 성공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 교육을 싫어하던 그는 프로그래머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고, 인터넷에서 온갖 프로그래밍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가 게임에 빠진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것을 보고 막지 않았다.
다만 고등학교 과정은 그를 깊은 막막함에 빠뜨렸다. 왜 실제로 쓸모도 없는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하는가. 학교에 대한 반감은 더 깊어졌다.
2000년의 대학 입시에서 황은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 황이멍으로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자기를 괴롭히던 그 시절의 체육 훈련이 뜻밖에 큰 몫을 한 것이다. 그는 국가 2급 운동선수 자격으로, 체육 특기생이 되어 상하이대학(上海大学)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그제야 그는 이것이 아버지가 18년 동안 공들여 둔 큰 판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황은 놀리듯 말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그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그의 인터넷 기술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1학년 때 황이멍은 웹사이트를 만들어 이미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PHP로 포럼 프로그램도 직접 짰다. 젊고 기고만장하던 그는 그때 인터넷 전체를 둘러봐도 자기가 못 만들 것은 없다고까지 여겼다.
VeryCD의 탄생
2001년 황이멍의 집은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초고속 인터넷을 놓은 축에 들어서 온갖 자료를 빠르게 내려받을 수 있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런 편의가 없었지만, 자료를 내려받으려는 사람들의 욕구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업이 될 만한 방식을 하나 떠올렸다. 무엇이든 다 있는 목록 사이트를 만들어, 남들은 그 사이트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고 주문만 만들면, 그가 그 내용을 시디에 구워 부쳐 주는 것이다.
황은 처음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고 말한다. 이 방식으로 시디를 파는 것이었고, VeryCD라는 이름도 그렇게 나왔다.
시디를 팔려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계속 모으던 무렵, 새 기술 하나가 나타나 그의 계획을 흐트러뜨렸다. P2P 다운로드 기술이었다. 그는 이것이 시디를 굽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황은 전략을 바꿔 VeryCD 포럼을 만들고 모아 둔 자료 목록을 포럼에 올렸다. 또 자기 집 컴퓨터로 FTP 서버를 하나 만들어, 사람들이 포럼에서 스스로 자료를 올리고 내려받게 했다.
곧 입소문을 타고 VeryCD는 상하이대학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포럼이 되었다. 특히 2003년 사스(非典) 기간에는 많은 학교가 봉쇄되어 중국 전역의 대학생이 무료해졌고, 덕분에 포럼은 더욱 뜨거워졌다.
황이멍이 자기 사이트의 인기에 기뻐하던 바로 그때, 전국을 놀라게 한 사건이 그의 학교에서 일어났다.
상하이대학 몰래 촬영 사건
그 시절 학교에서 인터넷을 하던 사람이라면 아마 아직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학생 몇이 캠코더로 맞은편 강의동을 찍다가 어느 남녀가 교실에서 관계를 갖는 장면을 우연히 담았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갔다.
이 일이 지금이라면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 인터넷이 막 자라던 2003년에 이 영상은 놀라운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중국 전역의 수많은 FTP에서 오르내렸다.
그중에는 상하이대학 교내의 FTP 몇 개와 황이멍의 VeryCD 포럼도 있었다.
곧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식을 막고 공개 처리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이 일을 빨리 지워 버리려 했다. 교내의 FTP는 사방에서 오는 압력에 파일을 지웠지만 황이멍은 죽어도 지우지 않았다.
황은 자기가 그때는 그저 분노 청년이었다고 말한다. 이 몰래 찍은 내용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자기가 올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학교가 사고를 감추고 행정 수단으로 강하게 덮으려 드는 방식이 몹시 거슬렸다. 그런 일이 새로 일어나는 인터넷에서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Too young, too naive. 황이멍은 자기 젊음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어느 날 학교 파출소가 그를 불렀다. 경찰은 그가 음란물을 퍼뜨렸다며 모욕죄로 보석 처분 서류(取保候审)를 끊어 주었고, 집에 있던 컴퓨터를 압수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영상을 찍은 그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 일로 황의 부모는 크게 무너졌다. 평생 체제 안에서 산 사람들이라 이런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황 본인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꽤 기뻐했다.
황은 퇴학 처분이 자기에게는 뜻밖의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진작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부모가 스스로 그만두는 것을 절대 허락할 리 없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부모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퇴학당한 그날 밤 황이멍은 유난히 들떠 있었다. 다음 날부터는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그는 VeryCD 포럼을 진짜 웹사이트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 뒤의 과정은 아주 빨랐다. 사이트 트래픽이 계속 늘었고, 너무 빨리 느는 바람에 가상 호스팅 업체마다 그를 쫓아냈다. 그는 자기 서버를 마련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입이 없었고 포럼에서 사람들이 모아 준 2,000위안뿐이었다. 서버를 사기에는 모자라서 우선 한 대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은 한편으로 광고 네트워크에 가입해 얼마간 수입을 얻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2003년 황은 자주 드나들던 PHPcn.net에서 사이트 운영자를 통해 웹 프로그래머 자리를 하나 얻었다. 월급 4,000위안으로 부모의 월급보다도 많았고, 덕분에 부모도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트래픽이 늘고 광고 수입이 늘자 황은 돈이 모이는 대로 서둘러 서버를 한 대씩 더 빌렸다. 그렇게 VeryCD가 빌린 서버는 금세 1대에서 10대가 되었다.
겨우 수지를 맞추는 정도였지만, 그 빠른 성장에서 황이멍은 기회를 보았다.
넉 달 뒤 황이멍은 회사를 그만두고 다이윈제(戴云杰) 등 네 사람과 함께 톈산로(天山路)에 책상 네 개가 겨우 들어가는 방을 빌려 정식으로 창업했다.
다이윈제 이야기를 하자면 그도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와 황이멍은 푸단중학(复旦中学) 고교 동창이고 집도 그리 멀지 않았지만 접점이 전혀 없었다. 다이는 공부 잘하기로 이름났고 황은 공부 못하고 컴퓨터 잘하기로 이름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해 여름방학에 다이윈제가 황이멍의 집으로 웹사이트 만드는 법을 배우러 오면서,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 새로운 것에 관심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에 다이윈제도 상하이대학에 붙어 황이멍과 함께 VeryCD를 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친구이자 동료로 지내고 있다.
2004년 여름 VeryCD의 서버는 조금 바빴다.
점대점 다운로드 기술을 써서 데이터가 자기들 서버로 흐르지는 않았지만, 저녁 정점 시간에는 사이트 접속량이 갈수록 커졌다. 서버를 더 빌릴 형편은 되지 않아 부하 분산을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그때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없어서 프로그램이 서버 사이의 부하 분산을 자동으로 처리하지 못했고, 사람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황은 지금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와 다이윈제는 날마다 저녁에 부하가 커지면 서버를 손으로 일일이 컨트롤해 트래픽을 여러 서버에 나눠 주며 모두가 접속할 수 있게 했다. 서버 컨트롤이 끝나면 《워크래프트 3》을 몇 판 하며 게임 안에서 또 컨트롤을 했다.
이 경험 덕분에 뒷날 신둥 네트워크(心动网络)는 게임으로 방향을 틀 때 서버 부하를 푸는 경험을 풍부하게 갖고 있었다.
2005년 차이원성(蔡文胜)이 100만 위안을 VeryCD에 투자하면서 황은 비로소 운용할 자금이 생겼다. 서버를 사서 전에 빌린 서버를 차츰 바꿔 나갔고, 소프트웨어 팀을 뽑아 뎬뤼(电驴, eMule)의 연구개발을 맡겼다.
여기서 뎬뤼라는 이름의 유래를 짚어 둘 필요가 있다.
황은 뎬뤼라는 이름을 자기들이 붙인 것이 아니라 네티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누가 그들에게 노새를 두고 나귀라 한다고 하자, 황은 꽤 억울했다고 했다.
eMule의 글자 뜻은 그대로 전기 노새, 곧 뎬뤄(电骡)다. 그런데 뎬뤄는 외국의 오픈소스 다운로드 프로그램이고, 황이멍이 만든 뎬뤼는 그 뎬뤄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다만 뎬뤄 역시 eDonkey2000이라는 상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eDonkey의 글자 뜻이 바로 전기 나귀, 곧 뎬뤼다. 뎬뤄 쪽은 자기들이 eDonkey2000보다 낫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노새가 나귀보다도 말보다도 힘이 세다는 뜻을 가져다 쓴 것이다.
그 결과 황이멍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네티즌들 손에 억지로 다시 뎬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이것도 뒤죽박죽인 셈이다.
그 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VeryCD는 계속 자랐지만 지출도 대단히 컸다. 수익 모델은 여전히 주로 광고였고 광고비를 떼이는 일도 잦아서, 회사는 겨우 수지를 맞추는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
황이멍에게 더 큰 위기감을 준 것은 시장 환경 전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대중의 저작권 의식이 높아지고 정책이 조여들었다. 초기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저작권 분쟁이 생겼고, 그 뒤로는 국가가 영화 저작권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나눌 수 있는 자료가 줄어들었다. 이것이 큰 흐름이었다.
다음으로 쉰레이(迅雷)와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 회사들은 더 큰 투자를 받았고 기술도 더 좋아서 뎬뤼 사용자의 증가세는 느려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이멍이 보기에 그때의 자기는 VeryCD를 하면서 판을 보는 눈이 아직 모자랐다는 점이다. 이 사이트를 앞으로 어떻게 끌고 갈지 분명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투입 대비 산출을 따지지 않았으며, 지분 구조 같은 회사 경영 경험도 없었다.
그 결과 방향을 바꾸려 했을 때는 이미 바꿀 수 없게 되어 있었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황은 여러 방향을 시도했다. 텔레비전 셋톱박스도 생각했고 동영상 사이트도 고려했지만, 이런 방향 자체에도 좋은 수익 모델이 없었다.
그러다 웹 게임이 일어났다. VeryCD는 채널로서 《우린잉슝(武林英雄)》, 《싼궈펑윈(三国风云)》, 《상예다헝(商业大亨)》의 공동 운영(联运)을 시작했고, 회사에 뜻밖에도 월 100만 위안의 수입이 생겼다. 공동 운영은 채널이 남의 게임을 자기 이용자에게 밀어 주고 그 매출을 나눠 갖는 방식이다.
황은 게임 공동 운영이 광고보다 수익이 많고 좀 더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 때부터 게임을 했고 게임을 좋아했다. 집 컴퓨터로 《커맨드 앤 컨커》와 《퀘이크 2》를 미친 듯이 했고, e스포츠가 뜨거워졌을 때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워크래프트 3》, 《스타크래프트》에 능통해서 e스포츠 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집에는 게임보이, NDS,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까지 시대별로 크고 작은 게임기가 다 있었다.
그러니 그가 보기에는, 지금 있는 게임들은 조잡하게 만들었는데도 돈을 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게임을 하나 만들어 직접 운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2009년, 예전 회사의 지분 구조에서 벗어나 방향을 틀기 위해 황은 이를 악물고 그때까지도 제법 돈이 되던 웹 디렉터리 사이트 7999.com을 팔았다. 800만 위안에 팔았지만 손에 들어온 것은 400만 위안뿐이었다. 그 뒤 100만 위안으로 XD.com 도메인을 샀고 50만 위안으로 새 사무실을 꾸몄으며, 남은 250만 위안으로 신입을 대거 뽑아 자체 게임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자체 개발은 위험도 비교적 컸다. 프로젝트는 되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했다. 가장 먼저 내놓은 SNS 소셜 게임은 실패했고 결국 프로젝트팀 전체가 해체되었다.
2010년,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게임 《톈디잉슝(天地英雄)》이 성공적으로 출시되었을 때 회사의 자금 사정은 이미 꽤 빠듯했다. 사무실은 상하이 톈야오차오로(天钥桥路)에 두 개 층을 썼고 100명이 넘었으니, 이것은 대단히 큰 도박이었다고 할 만하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했다. 《톈디잉슝》은 출시 뒤 금세 3,000만 위안의 매출을 냈고, 이로써 황이멍은 게임의 길을 가겠다는 확신을 굳혔다.
《선셴다오》가 게임 채널 전체를 뒤집다
2005년 차이원성은 샤먼(厦门)에서 웹마스터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그 뒤 중국 인터넷의 판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황이멍이 차이원성을 알게 된 것도 이 대회에서였고, ChinaZ.com의 사장 아페이(阿飞)를 알게 된 것도 이 대회에서였다. 아페이는 여러 해 뒤 《선셴다오(神仙道)》를 개발한 회사 페이위과기(飞鱼科技)의 사장이다.
2010년 신둥이 《톈디잉슝》을 성공시킨 뒤 아페이가 황이멍에게 게임 시연용 데모를 하나 보냈다. 황은 다 보고 나서 완성도가 좋다고 여겨 판권을 따내 대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여러 게임 회사가 다투고 있어서 대행 계약금이 400만 위안까지 올라 있었다.
400만 위안은 지금 보면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그 시기에는 대단히 과한 금액이었다. 앞서 황이멍이 250만 위안으로 여러 게임을 자체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결국 신둥이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선셴다오》는 신둥에 떨어졌다. 아페이가 신둥의 《톈디잉슝》 성공 사례와, 신둥이 《선셴다오》에 대해 내놓은 몇 가지 제안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때의 신둥 네트워크는 발행을 전문으로 할 생각이 없었고 여전히 연구개발에 치우친 회사였으며 운영 인력도 아주 적었다. 그래서 황이멍은 《선셴다오》 프로젝트의 운영을 갓 입사한 은퇴 《워크래프트 3》 프로 선수 류이펑(刘义峰)에게 맡겼다. 자기도 e스포츠를 해 봤기에, 프로로 뛸 수 있는 사람은 다 똑똑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이멍은 《선셴다오》가 출시 뒤 아주 순조로웠다고 말한다. 반년도 되지 않아 월 수입이 1억 위안을 넘었다. 그는 《선셴다오》가 성공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게임 자체가 그래픽 수준이 비교적 높은 게임이었다는 것이다. 횡스크롤 방식이었고 한 화면에서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전의 웹 게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음은 VeryCD를 하면서 남은 많은 서버와 여러 해 쌓은 서버 운영 경험이다. 덕분에 신둥의 운영 비용은 남들보다 훨씬 낮을 수 있었고, 업계에서 앞장서 서버를 곧바로 여는 일까지 해냈다. 그때 다른 운영사들은 서버를 하나 열려면 적어도 사흘에서 이레가 걸렸다.
마지막은 비용이 낮았기 때문에 신둥이 공동 운영 채널 쪽에, 그중에는 유명인도 일부 있었는데, 70%가 넘는 배분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게임 운영사는 줄 수 없는 비율이었다.
이런 안팎의 요인이 함께 작용해 《선셴다오》는 그 시기의 채널 운영 전략을 뒤집고 성공을 거두었다.
2011년에서 2012년 사이에 황이멍의 아들과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2012년 황이멍은 서른 살 생일에 자기에게 람보르기니를 한 대 선물했다.
황은 아들이 태어난 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며 고가도로를 달리는데, 맞은편의 저녁 해가 차 안으로 들어와 얼굴에 쏟아졌고 자기는 무척 행복했다고 말한다.
사업은 성공했고 가정은 행복했으며 아들딸을 다 두었다. 황이멍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 뒤가 진짜 중요한 대목이다.
곧 《선셴다오》를 베낀 웹 게임이 하나 나타났다. 이 게임은 과금 부분을 대단히 모질게 설계해서 수입이 《선셴다오》보다도 높았고, 게다가 법으로는 신둥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공동 운영 채널 쪽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버느냐를 보고 그 게임을 밀어 준다.
이것은 《선셴다오》도 시스템을 고쳐 수입을 늘릴 방법을 찾도록 몰아붙이는 일이었고, 신둥은 맞출 수밖에 없었다. 곧 시장을 되찾기는 했지만, 이것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앞날을 갉아먹는 일이나 다름없어서 게임 후반의 수치 설계에 심각한 영향을 남겼다.
황은 안타깝게도 이 일이 자기에게 더 깊은 생각을 불러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선셴다오》가 크게 성공한 뒤 자신감이 부풀어 올라, 앞으로는 낡은 경험을 새 게임에 얹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둥 네트워크는 그 뒤 게임을 많이 사들였고 그중에는 성적이 괜찮은 것도 있었지만, 《선셴다오》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황이멍은 왜 국내 게임이 갈수록 재미없어지는지 돌아보기 시작했다.
황은 《선셴다오》 이후로 새 게임에 흥미를 잃었다고 말한다. 다 거기서 거기 같아서 빠져들지 못했고, 다운로드 채널의 매출 순위표에 오른 게임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때는 이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고,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권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플랫폼이 그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주었다. 스팀(Steam)이다.
황은 말한다. 스팀에 있는 게임 가운데 이상하고 별난 것이 많다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착상이 자유롭게 뻗어 나가서 해 보면 눈이 번쩍 뜨이고, 한 번 사는 지출 말고는 돈 낼 데가 거의 없다. 왜 국내 게임은 이렇지 않은가.
2013년 웹 게임의 황금기가 끝나고 각 게임 회사가 잇달아 모바일 게임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둥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대로 뛰어들었고 또 한 판의 난전이 벌어졌다.
곧 황이멍은 낡은 문제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 채널들의 매출 순위표에 오른 게임이 다 거기서 거기여서 빠져들 수가 없었다.
황은 그때 짝퉁 게임과 채널을 두고 다투던 일이 떠올랐다.
문제는 채널 공동 운영 모델에 있는 것이 아닐까.
황은 이 실마리를 따라가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냈다. 그는 이것을 공동 운영의 원죄라고 부른다.
그때 신둥 네트워크는 《선셴다오》의 높은 배분 비율로 공동 운영 채널의 적극성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게임사와 채널 모두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업계 전체가 앞다투어 따라 했다.
그렇게 몇 해가 더 지나자 공동 운영 채널은 거대한 덩치가 되어 게임 산업을 '트래픽을 돈으로 바꾸는 산업'으로 만들었고, 그 안에 온갖 부정이 숨어들었다.
황은 이유를 이해하기 쉽다고 말한다. 채널의 물량은 한정되어 있고, 회사는 돈을 벌어야 하고 편집자는 실적을 채워야 하니, 스팀에 있는 기발한 게임이나 인디 게임, 한 번만 돈을 내는 게임은 밀어 주지 않는다. 수치 설계가 더 무르익고 1인당 결제액이 더 높은 게임을 고른다.
게다가 채널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서, 이용자를 끌어오려고 길드 할인이나 저가 충전 같은 수단까지 써 가며 나쁜 방향으로 다투었다. 이것은 게임의 수치 경험과 공정성을 심하게 망가뜨렸다.
질서 없는 경쟁은 게임 운영사도 미쳐 가게 만들었다. 수입 순으로 매기는 매출 순위표에 올라 채널의 추천을 받으려고, 자기 게임에 자기 돈을 넣어 순위를 올리고 결제 지점을 죽어라 파냈으며, 채널이 자기 게임을 돈이 되는 게임으로 여기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그리하여 중국의 큰 순위표에서 보게 되는 게임은 갈수록 거기서 거기가 되었고 갈수록 돈이 들게 되었다.
황은 말한다. 돈을 더 버는 게임일수록 공동 운영 배분이 많아지고, 그럴수록 채널은 광고 자원을 붙여 밀어 준다. 이것이 공동 운영 모델의 장점이자 공동 운영의 악이다. 사람의 마음은 탐욕스러워서, 공동 운영을 계속하는 한 채널이 미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게임일 뿐 재미있는 게임이 아니다. 이 악순환은 갈수록 심해진다.
그렇다고 채널더러 공동 운영을 하지 말고 배분도 받지 말고 수입에도 관심을 끊으라고, 입에 들어간 고기를 도로 뱉으라고 해서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가.
황이멍은 없으면 자기가 하나 만들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TapTap.com이 태어났다.
이 플랫폼을 설계하면서 황이멍은 그때의 VeryCD를 떠올렸다. 그것도 공유 플랫폼이었고 남이 찾고 싶은 자료를 찾도록 도왔지만, VeryCD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돈을 벌게 도와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되기까지 했다.
그러니 새 플랫폼은 반드시 플레이어가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을 찾도록 돕고, 게임 제작자가 돈을 벌도록도 도와야 했다.
사람의 탐욕을 막으려면 탈중앙화해서 사람이 개입하는 것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수입 순 순위표를 없앴고 편집자를 없앴으며 공동 운영도 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과 커뮤니티 플레이어의 평가만을 추천의 근거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이 플랫폼은 돈도 벌 수 있어야 했다. 황이멍은 이제 그때의 Too young, too naive한 소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델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해야 했다.
황의 계획은 규모를 키운 뒤 게임 광고를 파는 것이다.
황은 말한다. 지금은 게임 회사가 많고 광고를 하려는 뜻도 강하다. TapTap 이용자는 게임 성향이 대단히 뚜렷하고, 지금의 시장 환경도 10년 전 VeryCD를 할 때보다 훨씬 낫다. 광고라고 밝히면 된다. 정말 재미있으면 사람들은 내려받는다.
공동 운영으로 게임 산업을 뒤집은 신둥이 이번에는 공동 운영을 끝내며 게임 산업을 다시 뒤집으려 한다.
황은 TapTap을 만든 이 100일 동안 칭찬을 아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플레이어도 게임사도 이 모델을 무척 좋아했고, 덕분에 그는 그 시절 VeryCD를 만들 때의 성취감을 되찾았다. 다만 지금은 생각이 더 분명하고 더 멀리 본다. TapTap을 휴대전화 위의 스팀으로 만들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려 한다.
취재가 끝난 뒤 나는 황이멍에게 물었다. "Dash, 이 분노 청년 시절 이야기들, 정말 써도 되는가?"
황이멍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분노 청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