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쓰촨 군단의 선봉, 마톈위안¶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十三 川军先锋 马天元
저자의 즈후 칼럼에 2013년 11월 29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26821
이 번역은 2026년 7월 3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중국의 8년 항일 전쟁에서 군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쓰촨 사람이었다. 국민당 장군 리쭝런(李宗仁)은 "8년 항전에서 쓰촨군의 공은 결코 지울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민간에서도 "쓰촨군은 잘 싸운다", "쓰촨 사람 없이는 군대가 서지 않는다"는 말로 이들을 기렸다.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여기는 이 쓰촨 사람들의 기질은 중국 e스포츠의 역사에도 짙은 자국을 남겼다. 퀘이크 3 시대의 멍양(孟阳), 스타크래프트 시대의 마톈위안(马天元, MTY)과 충칭의 8DA 팀 그리고 그들이 운영한 웹사이트와 포럼,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대에 쓰촨에서 시작된 Ccsk.net과 대부분이 쓰촨 사람이던 WNV 팀, 워크래프트 3 시대의 CQ2000과 WE.TED가 그렇다. Ccsk.net은 뒷날 Esai가 된 사이트다. 수많은 쓰촨 e스포츠인이 이곳에서 자기 청춘을 태웠다. 나는 이면사에 따로 한 갈래를 마련해 "중국 e스포츠 쓰촨-충칭 군단"을 다루고 그들의 기여를 기록할 생각이다.
마톈위안은 중국 e스포츠의 개척자다. 많은 사람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인 계기는 그와 DEEP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DEEP의 중국어 별명은 카오야(烤鸭), 오리구이라는 뜻이다. 2001년 한국에서 두 사람이 세계의 강호들을 잇따라 꺾고 WCG 스타크래프트 2대2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 오성홍기를 높이 들고 시상대에 선 사진이다. 이 한 장은 중국 e스포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아주 깊고 오래가는 영향을 남겼다.
그해 마톈위안은 스무 살이었다. 세월이 흘러 2013년, 서른셋이 된 그는 상하이의 R2Game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국의 모바일 게임과 웹 게임을 유럽과 북미에 퍼블리싱하고 운영하는 국제 회사였고, 그가 맡은 일은 중국 안에서 적합한 게임 프로젝트를 찾는 것이었다.
마톈위안은 1981년 7월 2일 쓰촨성 청두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눈치가 빠르고 반항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부모가 붙잡아 두지 못했다. 그때 함께 몰려다니던 형제들 가운데 지금 반듯한 길을 걷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파오거의 의리와 형제애가 몸에 배지 않을 수 없었다. 파오거는 쓰촨 지역의 오래된 결사 조직이다. 지금의 마톈위안에게서도 그때 큰형 노릇을 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공부에는 도통 마음이 없어 보였지만 시험은 아주 잘 봤다. 한번은 집에서 두 과목 모두 100점을 받으면 게임기를 사 주겠다고 하자 정말로 두 과목 100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 한 번뿐이었고 평소 성적은 여전히 평범했다. 그러다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 때 한 번 마음을 잡았는데, 그 한 번으로 쓰촨대학 컴퓨터학과에 붙었다. 얄밉지 않은가.
1997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마톈위안은 PC 게임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레드 얼럿 실력으로 학교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다. 2학년 때는 게임용 컴퓨터방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중국 PC방의 전신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스타크래프트를 워낙 잘해서 아르바이트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게임을 하는 일이었다. 그의 이름값만으로도 날마다 손님이 몰렸기 때문이다.
1998년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마톈위안은 온라인에서 게임 애호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쿤펑 배틀넷은 그가 전우와 맞수를 만나는 무대가 되었다. 그 뒤로 나중에 널리 알려지는 스타크래프트 고수들을 잇따라 알게 되었다. Jeeps, YR, 훙저푸(洪哲夫), 한위량(寒羽良), Kulou, Redapple 등이다. 한위량은 본명이 천위(陈宇)인 충칭 사람으로, 이 글을 쓰는 시점에 텐센트 퀀텀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었다. 중국 e스포츠 쓰촨 군단의 첫 세대는 이렇게 모였다.
아시아게임 배틀넷의 부상과 =A.G=의 창단¶
"e스포츠"라는 말은 밖에서 들어온 단어다. 1999년 아시아게임(AsiaGame)이 아직 준비 단계일 때, 중국에는 이 개념 자체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게임은 여전히 여가와 오락이었다. 반면 해외에서는 이미 이 개념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CPL 같은 대회를 거치며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들이 이 개념을 중국에 들여오기 시작했는데, 그중 특히 중요한 사람이 후하이빈(胡海滨)이다. 미국 국적의 화교로,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는 아시아게임의 부사장 한 명을 알고 있었고, 미국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뒤 아시아게임에 합류해 회사가 e스포츠를 중요한 발전 방향으로 삼도록 설득했다.
중국에 돌아온 후하이빈은 당시 스타크래프트의 유명 인사이던 Jeeps와 한위량 등을 알게 되었다. 반년 남짓 논의한 끝에 1999년 10월 1일, 후하이빈과 Jeeps, 한위량, 마톈위안, 이란(易冉), CQZD의 산뎬서우(闪电手), 모구이톈스(魔鬼天使) 등이 청두의 Rainbow, 난충의 톈스 팀, 충칭의 CQZD를 하나로 합쳐 새 팀 =A.G=를 만들었다. 톈스는 '천사'라는 뜻이고, =A.G=는 아시아게임의 팀이라는 뜻이다. 이 팀은 중국 최초의 완전한 프로 e스포츠 팀일 가능성이 높다. 정식 선수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팀 활동만 했고 모두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종목은 둘, 선수도 둘뿐이었다. 퀘이크 3의 CHJ와 스타크래프트의 마톈위안이었고 급여는 월 2,000위안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 나간 프로화 시도였다.
아시아게임의 e스포츠 부서에서 후하이빈과 Jeeps는 =A.G= 클럽의 운영을 맡았고, YR, 곧 이란은 지원 업무와 팀 관리를 맡았으며, 한위량은 홍보를 맡아 룬잔가오서우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여기서 짚어 두자면, 이 글을 쓰는 시점의 AG.QQ VIP.스쿵잔셴 클럽이 바로 그때의 =A.G= 아시아게임 팀에서 이어진 것이다. 다만 지금 AG의 정식 명칭은 AllGamer로 바뀌었다. 그 과정은 뒤에서 다시 이야기한다.
뒤에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 쉽도록, 먼저 아시아게임이라는 회사의 배경을 정리해 둔다.
아시아게임은 하이훙 홀딩스의 자회사인 야롄잉퉁 과학기술발전유한공사에 속해 있었다. 이 회사는 이후 밀레니엄, 레드문, 배틀필드, 웜즈 온라인 같은 이름난 온라인 게임 여러 편을 함께 서비스했다. 하이훙 홀딩스는 유명한 보드게임 플랫폼 아워게임(Ourgame)의 모회사이기도 했다. 등록 사용자 수로 보나 회사 규모로 보나, 하이훙 홀딩스는 당시 중국 온라인 게임 분야에서 손꼽히는 선구자였다.
마톈위안의 첫 출정, 세계의 정상에 서다¶
2000년 초, 열아홉 살의 마톈위안은 같은 쓰촨 e스포츠 선봉인 한위량을 따라 베이징으로 가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시아게임의 공식 사이트는 이미 열려 있었고 아시아게임 배틀넷도 마지막 출시 준비 중이었다. e스포츠 부서 전체의 목표는 분명했다. e스포츠라는 개념을 알리고 이 판을 더 짜임새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톈위안이 쓰촨을 떠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성격이 아직 수줍어서 말수도 적었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경기만 했다. 일곱 명이 베이징의 방 하나에 거실 둘 딸린 집에 함께 살았지만 매일이 즐거웠다. 어디를 봐도 새로운 것투성이였다.
2000년 제1회 대회가 아직 WCGC라고 불리던 때, 마톈위안도 여기에 나갔다. 이름이 WCG로 바뀐 것은 2001년부터다. 그는 금세 탈락했고, 그 일이 그를 더 지독한 훈련으로 밀어 넣었다.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열일곱, 열여덟 시간을 아시아게임 배틀넷에서 스타크래프트만 했다.
아시아게임 배틀넷은 독일의 최신 FSGS 기술을 사들인 덕분에 동시 접속 수용량이 다른 배틀넷보다 훨씬 컸다. 사람이 많으면 경기 잡기가 쉬워지니,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시 접속이 2,000명을 넘었다. 중국의 스타크래프트 고수는 거의 다 이 위에 있었다. 그때는 래더도 매칭 시스템도 없어서 경기를 하려면 채널에서 소리쳐 상대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선수들이 실력을 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마톈위안은 아시아게임 배틀넷에서 날마다 상대를 쓸어 담았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고 압박에 약해서 정작 공식 대회에서는 늘 우승을 놓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한편 프로 e스포츠의 길을 택한 이상 학업을 함께 챙길 수는 없었고, 그는 쓰촨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나는 아깝다고 생각한다. 마톈위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 시절이 없었으면 그 뒤의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깝지 않다고 했다.
WCG의 전신, 2000년 WCGC¶
2000년 무렵 중국 스타크래프트는 군웅이 할거하던 시기였고, 지역별로 몇 개의 판으로 나눌 수 있었다.
둥베이 지역: 둥베이 삼검객을 필두로 훙저푸, Eat, 단탸오왕쯔(单挑王子)
시난 지역: 충칭의 8DA 팀
화중 지역: Star 팀
상하이 지역: SVS 팀
베이징 지역: =A.G= 팀
후베이 지역: =A.G= 소속이기도 한 DEEP, 그리고 XiaoT
광저우 지역: [T.S] TopSpeed 팀, 대표 선수는 Shomaru
위 정리에는 분명 빠진 것이 있다. 웨이보에 댓글을 남겨 주면 사실을 확인한 뒤 계속 채워 넣겠다.
이 판도를 짚은 이유는, 2000년 WCGC 중국 예선에 나간 선수들이 바로 이 지역들에서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2000년 WCG의 전신인 WCGC의 중국 진행은 후하이빈, 훙저푸, Redapple 등이 맡았다. 당시 중국 e스포츠의 규모 자체가 작아서 전국 선발전은 열지 못했고, 중국 최상위 고수 32명을 초청해 경기를 치렀다. 마톈위안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이번에도 긴장 탓에 탈락했다. 그해 중국 스타크래프트의 수준은 낮지 않았다. 다만 한국 비자가 나온 사람이 Kulou 한 명뿐이었고, 그가 한국 결승에서 낸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때 마톈위안은 자기 문제가 압박을 견디는 힘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약점을 겨냥해 의식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1년 초 톈진에서 열린 Enorth 톈진TV 스타크래프트 대항전에서 우승했다. 중국에서 딴 첫 우승이었다. 전국의 고수가 모두 모인 대회였으니 무게가 실린 우승이었다.
숱하게 지고 나면 누구든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무게 있는 첫 우승은 흔히 사람을 바꾸는 출발점이자 자신감의 원천이 된다. 그때부터 마톈위안의 우승 행진이 시작되었다.
자신감이 붙자 곧바로 우승 세 개를 챙겼다. 2001년 아시아게임 전국 24인 엘리트 초청전, 둥메이와 아시아게임이 함께 연 전국 64인 엘리트 초청전, 그리고 WCG 중국 선발전 베이징 지역 우승이다. 그런데 WCG 중국 결승에서 마톈위안은 또 긴장했다. 상위 세 명이 한국에 갈 수 있었는데 그는 4위에 그쳤다.
그런데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3위 선수의 비자에 문제가 생겨 마톈위안이 한국 결승에 가게 되었다. 그해 WCG 중국 대표단은 열여섯 명이었고 그 안에는 잘 알려진 CQ2000과 그의 옛 동료 DEEP이 있었다. 단장은 훙저푸였다.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실인데, 스타크래프트 2대2 종목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한국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한국에 가서 이런 종목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안 나갈 이유가 없었다. 훙저푸는 서둘러 DEEP과 마톈위안을 등록했다. 둘은 AG 동료였고 전에 함께 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 스타크래프트 2대2 종목은 2003년 이후 사라졌다. 그리고 이 글이 처음 실린 2013년까지, WCG 스타크래프트 개인전에서 중국이 낸 최고 성적은 2007년 PJ의 세계 2위였다. 그러나 대중에게 2위와 금메달은 이름만 봐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운명이다.
스타크래프트 2대2 결승 상대는 독일이었고, 그 팀에는 중국에서 위옌징(鱼眼睛), 곧 '물고기 눈'으로 불리던 유명 선수가 있었다. 경기는 치열해서 스코어 2대2까지 갔고 현장에서는 관중 천여 명이 소리를 질렀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장내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뒤덮였지만 마톈위안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시상대에 올라 손에 오성홍기를 쥐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 WCG 종목의 상금은 6,000달러였고 그의 몫은 3,000달러, 인민폐로 약 2만 5천 위안이었다. 이제 스무 살이던 마톈위안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귀국한 마톈위안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CCTV 뉴스가 계속 그를 다뤘고 고향의 지역 방송도 계속 다뤘다. 동네 사람들은 마톈위안의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들을 다독였고, 친척과 친구들은 가는 곳마다 그를 칭찬했다. 한때의 골칫덩이가 순식간에 모범이 되었고, 마톈위안은 그대로 인생의 정점에 올랐다.
정점 뒤에 온 급격한 전환, 아시아게임 배틀넷 유료화의 실패¶
2001년 11월 15일, 아시아게임 배틀넷은 전면 유료화를 시작했다. 많은 e스포츠인이 이것을 중국 e스포츠가 날아오르는 출발점으로 봤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아시아게임 배틀넷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유료화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기록과 평가가 나와 있으니 길게 덧붙이지 않겠다. 마톈위안은 한편으로 시기가 일렀고 이용자층도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봤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불 카드 유통망이 깔리지 않은 것이 큰 이유라고 했다. 월 18위안이 비싼 값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편리한 결제 수단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돈이 있어도 선불 카드를 살 데가 없는 사람이 많았고, 무료 배틀넷은 전부 문을 닫은 뒤였다. 플랫폼 이용자 수가 크게 떨어졌다. 사람이 줄자 경기 잡기가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다른 작은 무료 배틀넷으로 흩어졌으며, 그러자 경기 잡기는 더 어려워졌다. 악순환이었다.
하이훙 홀딩스는 크게 실망해 e스포츠라는 길을 단호히 접었다. 유료화가 실패한 지 두 달 만에 e스포츠 부서를 없앴다.
마톈위안은 그 일을 두고 아쉬워한다. 당시 중국 스타크래프트의 수준이 한국과 그리 멀지 않았고, 안정적인 훈련 환경만 있었다면 앞지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고 봤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게 갑자기 끊겼다. 마톈위안은 청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Jeeps는 뒤에 게임 개발로 갔고, YR은 부동산 회사로, DEEP은 온라인 게임 회사로, 한위량은 텐센트로 갔다. 그렇게 한 무리가 흩어졌다.
프로 선수인 마톈위안에게 이 사건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훈련을 이어 갔고 여기저기 대회에 나갔다. 그러다 2003년 초, 후하이빈이 인텔의 투자를 따내 청두에 VA e스포츠관을 열었다. 컴퓨터가 200대 넘게 있는 곳이었다. 마톈위안은 이곳에 합류해 훈련을 이어 갔고, 전국 각지의 스타크래프트 애호가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날마다 찾아왔다.
WCG 대표단의 상록수, 마톈위안¶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새로운 e스포츠 스타가 끝없이 나왔다. 그 사이 마톈위안은 WCG 국가대표 가운데 가장 꾸준한 선수가 되었다. 해마다 한국 결승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02년에는 WCG 스타크래프트 개인전 5위에 올랐고, 이것이 그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좋은 세계 성적이었다.
이 몇 해 동안 그는 대회 상금도 많이 받았고 상업 행사에도 많이 나갔다. 대충 계산하면 해마다 30만 위안쯤을 벌었다. 그중 보수가 높았던 것은 베이징의 M-Zone 행사로 사흘에 1만 위안을 줬다. 10년 전 기준으로 이 정도 연 수입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집을 샀느냐고 묻자 마톈위안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 안 샀다고, 받은 상금은 여기저기 밥 사느라 다 썼다고.
마톈위안의 두 번째 출정, 그리고 2004년 의욕을 잃고 은퇴하다¶
2003년, 페이러(裴乐), 곧 KinG이 프로 e스포츠 팀 YollinY를 만들면서 마톈위안도 데려갔다. 그러나 마톈위안은 YollinY에 두 달만 있다가 나왔다. 후원을 구해서 자기 클럽을 차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4년 초 17Game이 e스포츠 사업을 하기로 하고 연 50만 위안의 예산을 잡았다. 마톈위안이 그 사업의 책임자였다. 시기와 액수로 보면 당시로서는 꽤 좋은 후원이었고 마톈위안도 낙관했다. 그는 전국에서 종목별 선수를 모았다. 둘 다 키가 아주 커서 '쌍탑'이라 불리던 SYC와 광모(广漠), 그리고 XiaoT 등이 그렇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여성 팀도 받아들였는데, 1212가 있던 New4 팀이다. 그러나 2005년이 되자 17Game은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보고 e스포츠 사업을 접었다.
e스포츠의 길을 그렇게 여러 해 달린 마톈위안도 결국 지쳤고, 2004년 WCG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뒤 3년 동안 그는 우한으로 가서 e스포츠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다.
마톈위안의 세 번째 출정,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아서¶
마톈위안은 3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 2008년 WNV 팀이 해체되고 XiaoT가 우한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XiaoT와 마톈위안은 2002년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때 XiaoT는 열네 살이었고 마톈위안은 줄곧 그를 동생처럼 여겼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아직 e스포츠의 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톈위안은 현지에서 투자를 하나 구해 VA 클럽을 세우고 네 종목을 두었으며 이름난 선수를 여럿 데려왔다. 워크래프트 3에 XiaoT와 Sed, 도타에 430, 스타크래프트에 GOL,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KingZ가 있었다. Sed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iG의 스타크래프트 2 선수였다.
e스포츠 코칭 모델¶
이번 복귀에서 마톈위안은 처음 클럽을 할 때처럼 무턱대고 낙관하지 않았다. 그는 팀이 팀을 먹여 살리는 수익 모델을 아주 분명하게 내놓았다. e스포츠 코칭 모델이다.
헬스장의 개인 트레이너 제도와 비슷하다. 클럽 회원으로 가입하면 원하는 종목의 코치를 예약할 수 있고, 코치마다 값이 달라서 이름이 알려진 코치일수록 시간당 요금이 비쌌다.
2009년 마톈위안은 우한의 한 체육센터에 자리를 빌려 컴퓨터 30대를 놓고 이 모델을 시험했다. 선수들은 평소대로 훈련하고 경기에 나가면서 매주 시간을 조금씩 내어 개인 코치를 맡았다. 코칭으로 돈이 조금 들어왔고 후원사에서도 얼마간 보태 줘서 팀은 대체로 자립할 수 있었다. 1년쯤 하니 회원이 200명 가까이 되었다. 다만 전체 환경과 그 자신의 인지도에 한계가 있어서 이 모델이 빠르게 크기는 어려웠다.
2010년, 서른을 앞둔 마톈위안은 오르내림이 심했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청두로 돌아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
마톈위안은 떠났지만 XiaoT는 아직 젊었다. 그는 VA의 진용을 통째로 데리고 베이징의 CCM에 합류했다. CCM은 뒤에 iG에 인수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 본 iG는 XiaoT가 이끄는 팀이었다.
마톈위안의 네 번째 출정, AG의 부활¶
청두로 돌아온 마톈위안은 스쿵잔셴 PC방의 주인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인터넷 카페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그는 이 PC방에 아주 유망한 크로스파이어 팀 FC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팀의 매니저 페이페이(菲菲)와도 알게 되었다. 마톈위안은 페이페이에게 VA 클럽 운영을 함께 맡기기로 했다. 이어서 옛 =A.G= 팀의 관리자였던 이란을 VA e스포츠 클럽 총괄 매니저로 영입했다. 그 뒤 한위량, Jeeps, 산뎬서우와 상의한 끝에 AG라는 이름을 되살리기로 했다. 다들 이 이름에 애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식 명칭의 뜻은 바꿔야 했고, 그래서 AG는 지금의 AllGamer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AG.Xunyou.스쿵잔셴이 부활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의 이름은 AG.QQ VIP.스쿵잔셴이다.
새 AG는 크로스파이어, 리그 오브 레전드, 도타, 스타크래프트 2 네 종목을 두었고 코칭 모델도 계속했다. 성적도 좋아서 줄곧 상위권을 지켰다. 2013년 AG는 CFPL 우승을 차지했고 클럽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클럽은 잘되고 선수들의 급여와 상금은 높은데, 마톈위안 자신을 비롯한 클럽 관리자들의 급여는 높지 않았다. 그의 의리가 불러온 문제였다. 그의 성격상 선수들과 돈을 나눠 가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살림은 꾸려 가야 했다.
마톈위안의 다섯 번째 출정,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2012년 6월 6일 마톈위안에게 딸이 생겼다. 딸의 출생은 그를 완전히 깨웠다. 여러 해에 걸친 e스포츠 생활의 오르내림은 이제 충분했다. 자기 혼자 이리저리 떠도는 것은 상관없지만 가족까지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좀 더 실속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상하이로 가서 R2Game에 들어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여기서 한마디 끼워 넣는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면사에 사진을 한 장도 넣은 적이 없다. 일부러 넣지 않았다. 글자만 있는 것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마톈위안 딸의 이 사진만은 꼭 넣어야겠다. 이 사진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아이의 웃음에 물들었다. 한순간에 온몸이 씻긴 것 같았고 몸 전체가 즐거움으로 찼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고, 나는 이 즐거움을 전하고 싶다.

마톈위안은 딸의 이 사진을 알람 화면으로 해 뒀다고 했다. 아무리 지친 날이라도 알람이 울려 몸을 일으켰을 때 이 사진이 보이면 곧바로 온몸에 힘이 돌았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눈은 휴대전화 속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눈빛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여러 갈래로 움직였고, 주성치의 영화 《서유기 2: 선리기연》에 나오는 유명한 내레이션이 떠올랐다. 평생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적을 벤 자유로운 방랑자가, 이번 생에서 마침내 자기에게 점 세 개를 남긴 사람을 만났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 긴고아를 머리에 쓰고 오만하고 길들지 않던 성정을 거뒀다. 그리고 무게 1만 3,500근에 길이는 한 장 두 자, 굵기는 사발 아가리만 하고, 크게도 작게도 길게도 짧게도 바뀌는 여의금고봉을 들고 새로운 여정에 올랐다.
앞길에 늘 평안하기를.
중국 e스포츠 쓰촨 군단의 선봉, 마톈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