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e스포츠의 백가쟁명¶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二 电子竞技的百家争鸣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16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14572
이 번역은 2026년 8월 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2000년 무렵은 중국 e스포츠 이면사에서 대단히 떠들썩한 시기였다. 제자백가가 서로 다투던 춘추전국시대와 꼭 닮은 판이었고, e스포츠를 둘러싼 사상의 대폭발이 시작되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의 성장을 거치며 PC방과 게임, 대회, QQ, 인터넷 같은 것들이 빠르게 퍼졌다. 여기서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이것들이 원래대로라면 아무 접점도 없었을 수많은 사람을 하나로 이어 놓았다. 모두가 경쟁 게임의 매력과 거기서 터져 나온 사회적 에너지에 놀랐다. 다들 들떠 있었고 이것이 뭔가 될 일이라고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언젠가 CCTV 시사 프로그램 《둥팡스쿵》이 만든 마윈(马云)의 초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마윈은 동료와 상사에게 인터넷이 무엇인지 잔뜩 들떠서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흥분해 있었지만 자기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듣는 사람들도 무슨 소리인지 종잡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들 그를 따라 들떴다. 그때 e스포츠도 꼭 이런 상태였다. 어쩌면 이 들뜸과 막막함이 사람들의 탐구욕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상의 대폭발, 백가쟁명의 판이 시작되었다.
후빈궈(胡宾国, red-apple)¶
1999년, 왕인슝(王银雄, kulou.csa)이 CSA 웹사이트에 《중국 스타크래프트 병기보》라는 것을 만들었다. 병기보는 무협 소설에서 최고수들의 순위를 매긴 목록이니, 그는 아마 무협 소설 팬이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 스타크래프트 최정상급 선수 100명의 순위를 매겼고 자신은 55위에 놓았다. 1위는 본명이 후빈궈인 red-apple이었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영어 아이디 red apple, 곧 훙핑궈는 자기 본명과 발음이 닮은 말장난이다.
red-apple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개념이 미친 듯이 부풀려지던 2000년 무렵, 그는 e스포츠라는 개념에 대한 투자로 텅투 전자출판사에서 100만 위안을 받아 냈다. 이것이 e스포츠 역사상 첫 벤처 투자라고까지 말할 자신은 없지만, 내 기억에 그만한 액수는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2000년 설이 지난 뒤, red-apple은 동료 몇 명과 함께 자신들이 보는 e스포츠 발전 계획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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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 클럽을 만들어 폭넓게 참여를 끌어들이고, 일반 플레이어에게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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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과 웹사이트, 여러 매체와의 제휴를 포함한 독립적인 정보 서비스 체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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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경기 구조를 세워, 고정된 일정을 갖춘 국내 최초의 리그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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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경기 네트워크를 만들어 연중 이어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회 체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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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에게 국제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고, 국제 전자 오락 경기 대회를 조직한다
놀랍지 않은가. 12년이 지난 지금 봐도 이 계획의 개념은 대단히 앞서 있다. 한비자의 저작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선배들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사물을 깊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행 경험의 부족, 그리고 때와 자리와 사람이 모두 맞지 않았던 사정이 red-apple의 불운을 만들기도 했다.
red-apple에게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세부 하나를 흘리고 저 대목에서 또 하나를 흘리면, 마지막에는 그것이 쌓여 놀랄 만큼 큰 구멍이 되고 메울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red-apple이 아무리 꼼꼼히 일하고 동료들이 아무리 애를 썼어도, 그리고 CESA 전국 대회의 영향력이 아무리 컸어도 때가 그를 돕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현실을 앞지른 방식으로 밀어붙인 결과, 후원사가 예정보다 일찍 자금을 뺐다.
방향은 옳았고 생각도 좋았다. 아쉽게도 시장이 익지 않았다. 후원사가 돈을 내는 것은 보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늘 1위안을 주면 내일 2위안을 벌어다 주고, 그러면 모레는 얼마를 달라고 해도 후원사가 기꺼이 준다. 아주 간단한 이치인데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이 이것을 모른다. 후원사에 손을 내밀면서 그 돈을 어떻게 벌어다 줄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후원사가 돈을 벌 생각이 없다고 말해도 믿으면 안 된다. 내 말을 믿어라, 언젠가는 반드시 벌고 싶어진다. 어느 때든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오래갈 수 있다.
red-apple은 텅투 전자출판사를 떠나, 우한 아오메이 전자유한공사 부총경리 천둥(陈栋)의 초대를 받아 아오메이에 들어가 게임의 중국어화와 출판을 맡았다. 아오메이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세 게임, 곧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유통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안다. 그러나 불법 복제가 판치던 시절이라 아오메이가 남긴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 정색을 하고 복제 단속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일은 옳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마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시대의 낙인일 것이다.
훙저푸(洪哲夫, hongzf)¶
이제 등장할 이 하얼빈 사람은 전설적이면서 논쟁도 많다. 그는 red-apple을 꺾었고 그의 뒤도 이어받아, 선수에서 e스포츠 대회의 무대 뒤 조직 일로 옮겨 갔다. 이름은 훙저푸, 아이디는 hongzf다.
훙저푸는 1977년 8월 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태어났고 헤이룽장대학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 학력을 눈여겨보자. 어릴 때부터 게임에 미쳐 있던 훙저푸는 이 배경 덕분에 아주 다른 e스포츠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해외의 e스포츠 소식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였다.
훙저푸는 게임에 어느 정도로 빠져 있었을까. 우리는 어릴 때 다들 오락실 게임을 했고 다들 푹 빠져 있었지만, 훙저푸의 몰입은 우리 다수가 닿지 못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는 집에 알리지 않고 여러 해 모은 세뱃돈에서 3,800위안을 들여 아케이드 기계를 한 대 사서 집으로 들였다. 기계가 너무 넓어 현관을 통과하지 못하자 그는 인부를 불러 문을 떼어 냈다. 어머니가 돌아와 문이 사라진 것을 보고는 기겁했다.
2004년 WCG 중국 지역 결승 전날, 나는 CGA 뉴스팀을 따라 베이징으로 WCG 취재를 갔다가 마침 프랑스에서 돌아온 ESWC 중국 대표단과 마주쳤다. 그해 ESWC 세계 결승에서 중국 여자 팀은 마지막에 브라질 팀에 져 은메달을 땄고, 나는 그들의 축하연 취재에 배정되었다. 종목 책임자이자 인솔 감독이던 훙저푸가 나를 맞았다.
훙저푸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네모진 얼굴에 웃으며 말했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찼다. 눈에서는 빛이 났고 몸집은 크고 단단했다. 표준어에는 둥베이 억양이 없었다. 첫인상은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축하연은 순조로웠다. 그는 후원사인 통신사 차이나넷콤의 여성 임원 몇 명을 배웅한 뒤 나를 데리고 이야기할 만한 곳을 찾으려 했다.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우리는 그냥 중앙재경대학 밖 벤치에 앉아 두 시간을 이야기했다.
훙저푸는 컴퓨터로 ESWC 영상을 많이 보여 주었고, 그것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개 국어를 하고 유머로 분위기를 달구는 이탈리아 남자 진행자가 있었다. 현장의 조명 연출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경기석 앞의 모니터와 선수 머리 위의 조명은 그 선수가 죽으면 꺼져서, 마지막에는 양편에 하나씩 두 개만 남아 있는 일이 잦았다. 현장 분위기를 정말 잘 만들어 냈다.
오늘까지도 흉내를 내지만 제대로 흉내 내지 못하는 이런 경험과 기술을 훙저푸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ESWC에서 그렇게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유쿠 같은 영상 매체가 없어서 많은 영상이 오늘까지도 공개되지 못했다. 이것이 이른바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2005년에 나는 ZAX와 함께 베이징 출장을 갔다가 훙저푸의 회사에서 그를 만나 ESWC 2005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사무실이 재미있었다. 한쪽에는 ESWC 중국 조직위원회 간판이 걸려 있고, 다른 쪽에는 생물공학 비료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StarsWar를 하고 있었고, 그 시기에 대회를 여는 일이 보기에만 좋은 일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2005년 이후 그는 비료 사업에 전념하며 e스포츠 판에서 멀어졌다고 들었다.
WE.KinG 페이러(裴乐)¶
1999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판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또 있다. 바로 WE.KinG 페이러다. 그해 그는 열아홉이었고 시안 사람이었다. 풋풋하고 내성적이었으며, 키가 크고 말랐고, 말이 느릿느릿했다. 금테 안경을 썼고 단정하고 차분했다.
KinG은 중국 e스포츠의 거의 모든 단계를 겪었다. KOF 오락실 격투 시절에는 친구 몇 명과 팀을 짜서 집 근처 몇 골목을 평정했고, 여기저기 도장 깨기를 하고 당하는 나날을 보냈다. 1998년 스타크래프트가 막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그것을 접했다.
1999년 시안의 PC방이 대규모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 대목은 따로 짚어야 한다. 중국 PC방의 초기 보급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높았다. 청두, 충칭, 광시, 시안, 정저우, 우한, 허페이 같은 순서였다. 왜 이런 순서였을까. 간단하다.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외부와 막혀 있고,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 보급률이 낮고 사람이 많으니 PC방 수요가 컸다. 내륙 지역은 바깥 정보를 얻을 통로가 적었으므로 네트워크 대역폭 보급은 오히려 빠르고 좋았다.
당시 시안의 PC방은 미친 듯이 문을 열었다. 오늘 200대짜리가 생기면 내일은 300대짜리가, 모레는 800대짜리가 생겼다. 위아래 3개 층이 전부 컴퓨터였고 전부 최신 사양의 가장 좋은 컴퓨터였다. PC방 주인들은 손님을 끌기 위해 e스포츠를 끌어들이는 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PC방마다 반프로 팀을 하나씩 두었고, 어느 PC방에 들어가든 벽 하나가 그 PC방 팀 주전 선수들의 큼직한 사진과 소개로 덮여 있었다.
그 시절 시안과 청두, 충칭의 e스포츠 분위기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e스포츠의 무대 뒤 일꾼들이 단련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e스포츠 제휴를 이야기하러 가면 기계를 공짜로 쓰는 일은 쉽게 얻어 냈다. 게다가 크고 작은 대회가 많았고 상금도 많아서 팀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직접 대회를 열고 싶으면 아는 PC방 주인과 이야기만 하면 되었다. 기계도 공짜, 홍보도 공짜, 어쩌면 상금과 상품까지 내줬다. 환경이 이렇게 좋았으니 e스포츠의 무대 뒤 일꾼 상당수가 내륙 지역에서 나왔다.
KinG과 KOF 팀 동료들은 시안의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에 배틀넷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세계가 현실의 몇 골목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이 아이들을 깊이 사로잡았다. 당시 그 PC방에는 ROSE라는 팀이 있었는데 온라인에서 꽤 이름이 났다. KinG 일행은 다 큰 남자들이 어쩌자고 이렇게 여성적인 이름을 붙였나 싶었고, 그래서 그는 우리는 좀 남성적인 이름을 짓자고 했다. 그렇게 LION, 곧 사자 팀이 태어났다.
LION 팀에는 시안전자과기대학 컴퓨터과 학생이 많아서 웹사이트와 포럼이 갈수록 좋아졌다. 나는 2002년 시안에서 KinG을 알게 되었지만, LION 팀의 포럼은 2000년에 이미 알고 있었다. LION 팀의 성장 방식은 그때 대다수 군단식 모델과 같았다. 전국에 분회를 열고 여기저기서 사람을 모아 기세가 대단했다. 한번은 여름 대회가 몰린 시기에 LION 팀이 이틀 사이 전국 각 지역 대회에서 동시에 우승 5개를 가져왔고, 그것도 전부 오프라인 대회였다.
사상이 대폭발하던 시대에는 전설 같은 일도 쉽게 일어난다. KinG 일행이 성적을 내기 시작한 뒤, 아주 신비한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많아 보였고, LION 팀을 한국 프로 팀처럼 포장하겠다고 했다.
실력을 한번 시험해 보자며 이 신비한 사람은 LION의 일고여덟 명을 함께 상하이로 데려가 아오멍배라는 대회에 내보냈다. 숙소는 프레지덴셜 스위트였고 매일 잘 먹고 잘 마셨으며, 모두에게 옷도 잔뜩 사 주었다. 심지어 KinG과 다른 감독 한 명을 한국에 보내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KinG은 그때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그렇게 매일 꿈같은 생활을 한 달쯤 했을 때, 그 신비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 밥 사 먹을 돈도 없는 사람들은 날마다 프레지덴셜 스위트에서 잠만 잘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침 KinG이 일어나 보니 키가 크고 덩치도 큰 팀원 KISS가 울고 있었다. 이상해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KISS는 누가 자기가 숨겨 둔 라면을 훔쳐 먹었다고 했다. KinG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고, 팀원들을 데리고 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했다.
먼저 부딪힌 문제는 호텔을 어떻게 나가느냐였다. 프레지덴셜 스위트 값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궁색한 방법을 썼다. 팀원들이 짐을 들고 먼저 나가고, KinG은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물건을 사러 나가는 척을 해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데 기차역에 도착하니 몇 위안이 모자라 기차표를 살 수 없었다. KinG이 매표원에게 사정했지만 매표원은 상대해 주지 않았고, KinG은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렸다. 결국 한 행인이 돈을 조금 준 덕분에 그들은 시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꿈이 깨진 이 여행은 열아홉의 KinG을 완전히 깨웠다. 너무 많은 처음과 너무 큰 기복을 겪으며 KinG은 자신이 아직 너무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KinG은 시안외국어대학에 들어가 영어 공부에 전념했다. KinG이 책을 좀 읽게 두자. 2년 뒤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온다.
2000년 스타크래프트는 너무 많은 전설적 인물을 낳았다. 긍정적인 쪽이 많았고, 당연히 부정적인 쪽도 많이 나왔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대폭발이지 정밀 발파가 아니니까.
스타크래프트 1.04 버전의 버그와 핵이 터져 나오다¶
게임이 있으면 버그와 핵은 반드시 있다. 지금도 경쟁 게임과 플랫폼 운영사는 여전히 핵과 싸운다. 문제는 지금의 운영사가 핵의 영향을 더 신경 쓴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핵 방지 도구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때 핵이 나타나고도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은 이유다.
핵이 게임을 망친다는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다. 그때의 e스포츠 무대 뒤 일꾼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한 이야기를 하자.
2000년 초, 이름난 e스포츠인 한위량(韩羽良, 지금은 텐센트에서 일하며 하는 일도 e스포츠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이 두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하나는 권위 있는 심판진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e스포츠의 프로화 구상이었다.
먼저 심판진이다. 한위량의 발상은 재주가 뛰어난 주방장 몇 명을 앉혀 두고 주방의 요리사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신망과 경험을 갖춘 스타크래프트 고수를 엄격히 심사해 소수만 뽑아 심판진을 꾸렸고, 경기 때 이들이 직접 게임에 들어가 관전하게 해서 경기의 공정성을 담보하려 했다.
다음은 e스포츠 프로화 구상이다. 한위량은 국가체육국이나 시나 같은 대기업을 찾아가 돈을 대고 대회를 열게 하고 클럽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당시 한국에서 방송사와 삼성 같은 대기업이 e스포츠 프로화를 뒷받침하던 길을 본뜬 것이었다.
나는 한위량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에 관한 자료를 많이 읽고 나서 나는 이 사람이 진심으로 e스포츠를 하려던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는 그 시대 e스포츠의 활로를 온갖 방법으로 찾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애써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면, 맞지 않는 시대와 부족한 경험은 그때 그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핵 때문에 기울어진 스타크래프트의 판세는 사람 손으로 되돌릴 수 없었고, 당시 '전자 헤로인'이라 불리던 새것을 국가와 대기업이 뒷받침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안만 당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국가에 기대는 이런 발상은 여전히 계획경제 체제 안의 체육 논리였고, 이는 건강한 발전 방식이 아니다. 그 뒤 몇 해 동안 실제로 시도되었지만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
그처럼 마음을 쏟은 사람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던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였다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최고의 시대였고 또한 최악의 시대였다. 우리는 무언가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어둠 속의 성냥 같았다. 우리는 빛 한 점만 보았을 뿐, 여기서 저기까지가 평탄한 큰길인지 구불구불한 도랑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름난 스타크래프트 전적 리포트 작가 stoneman이 쓴 어느 전적 리포트의 서문에서 나는 한 대목을 찾았다. 크게 마음이 움직여, 제2장의 맺음말로 옮겨 적는다.
stoneman: 오랜 친구 Saint가 언젠가 온라인에서 나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게임으로 먹고살 것이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게임으로 먹고산 적이 있고, 그런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고, 평생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경력과 나이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자연히 이 일을 더는 하지 않게 된다. 지금의 내 삶으로 말하면, 게임은 오히려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 나는 그 안에 취해 있지만 거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