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격투 게임의 제왕, 샤오하이 쩡줘쥔¶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十七 格斗天王 小孩曾卓君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5년 6월 18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0067276
이 번역은 2026년 8월 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서른 대가 넘는 따귀.
일곱 살 쩡줘쥔(曾卓君)이 두 번째로 오락실에 격투 게임을 하러 갔을 때 아버지가 남긴 기억이다.
게임을 하러 갔기 때문이 아니라 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11년 뒤인 200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최정상 격투 게임 대회 도게키(Tougeki)의 결선.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8》(The King of Fighters '98) 종목에서 샤오하이는 8강에 올랐고, 진행자가 처음으로 그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만 하죠. 저는 우승하러 왔습니다!"
객석의 일본 관중 4,000명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우승했다. 아래는 그의 결승 우승 영상이다.
영상: 도게키 2007 KOF '98 결승, 샤오하이 대 청룽, 유쿠(Youku)
쩡줘쥔은 1989년 4월 26일 광저우에서 태어났고, 아홉 살에 광저우 오락실 격투 게임판을 제패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라 광저우 사람들은 입소문만으로 그의 존재를 알았다. 본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격투 게임을 아주 잘하는 꼬마가 있다는 말만 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광둥어 발음대로 샤오하이(小孩)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꼬마'라는 뜻이다. 지금도 바이두에서 이 별명을 검색하면 첫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그다.
샤오하이의 아버지는 철물점을 했고 총 쏘는 게임기를 아주 좋아했다. 샤오하이가 여섯 살에 처음 오락실에 간 것도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였다. 일곱 살에 처음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를 잡았고, 오락실에서 사부를 한 명 삼았다. 사부가 몇 수 가르쳐 주자 그는 사부를 상대로 열 몇 판을 내리 이겼다.
재능이라는 것은 때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만 두 번째로 갔을 때 샤오하이는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서른 판 넘게 지고 나서야 한 판을 이겼다. 그날 따귀를 서른 대 맞았는지 예순 대 맞았는지 그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한 판을 질 때마다 맞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주 깊이 남은 것은 상대가 내내 웃고 있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얄밉게 웃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너보다 센 사람을 만나는 걸 겁내지 마라. 내가 코인은 줄 테니 이길 때까지 해라. 뭘 하든 남한테 지지 마라!"
샤오하이는 아버지가 9월 11일생이고 극단적인 처녀자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의 어린 시절을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괴로우면서 동시에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그 높은 압박 탓에 무엇을 하든 1등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반에서 1등이었고 중국 장기와 탁구도 학교 챔피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주말마다 아버지는 차를 몰고 그를 광저우의 큰 오락실마다 데려가 격투 고수들에게 도전하게 했다.
게임에 대한 집안의 태도는 이랬다. 공부만 잘하면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놀이도 어차피 시간을 쓰는 일인데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샤오하이가 오락실에 갈 때는 늘 아버지가 함께였고, 덕분에 그는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된 연습 환경을 가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격투 게임을 좋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잘했다는 것이다.
샤오하이는 그때 오락실에 중계나 프로젝터 같은 것이 없어서 관중 백여 명이 그의 등 뒤로 몇 겹씩 둘러서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뒤에 선 사람들은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감자칩을 든 채 발끝을 세우고 그가 하는 것을 봤고, 앞으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들은 조작을 배우려고 그의 손을 뚫어지게 봤다.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다른 오락실로 도장 깨기를 하러 가서 압박을 이겨 내고 그곳 사람들을 전부 이겼을 때는 정말 짜릿했다고 한다.
때도 자리도 사람도 맞았다¶
광저우는 홍콩과 가까워서 이 지역 오락실의 사정도 내륙과 달랐다. 우선 태도가 관대했다. 크고 작은 오락실이 아주 많았고 폐쇄나 규제도 비교적 적었다. 다음으로 게임이 많았다. 해외의 최신 아케이드 게임이 현지의 큰 오락실마다 금방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아케이드 대회 분위기가 짙었다.
2002년, 열두 살의 샤오하이는 처음으로 큰 아케이드 대회에 나갔다. 광저우 타이핑양 컴퓨터 상가에서 열린 대회였다. 아침 6시부터 접수 줄이 섰고, 그와 아버지가 9시에 도착했을 때 앞에는 이미 1,000명이 넘게 있었다. 아버지는 기어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진행자를 붙들고 말했다. "우리 아들을 넣어 주십시오. 틀림없이 놀라실 겁니다!"
다행히 샤오하이는 이미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어서 주최 측은 그를 예외로 받아 줬고, 샤오하이는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했다. 대진표를 차례로 뚫고 결승까지 올라가 스무 살 상대를 만나고도 전혀 떨지 않았고, 객석 전체가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샤오하이는 우승 상품도 기억한다. 소니가 막 내놓은 플레이스테이션 2였다. 당시에는 구하기 어려워 꽤 귀한 물건이었다. 우승한 뒤 잡지 《디지털 시대》가 그의 인생 첫 인터뷰를 실었다.
언론 보도가 나가자 이름은 더 알려졌고 대회 초청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4년, 샤오하이는 처음으로 광저우를 벗어나 선전에서 열린 선전, 홍콩, 마카오 3개 지역 대항전에 나갔다. 시작부터 홍콩 최정상 고수들을 만났다. 가수 왕리훙(王力宏)을 닮아 사람들이 홍콩 리훙(香港力宏)이라 부르던 남자, 그리고 자짜이(家仔)와 줴구즈유(绝谷之幽)였다. 결국 샤오하이는 홍콩 리훙을 9 대 8로 힘겹게 꺾고 우승했다.
이어서 베이징에서 남북 대항전이 열렸다. 남쪽에서는 샤오하이와 선전 1위 두 사람만 초청받았다. 그 대회에서 샤오하이는 전성기의 숙적 청룽(程龙)을 만났다. 당시 청룽은 '무패의 신화'로 불렸고, 혼자 상하이로 가서 고수 100여 명을 차례로 다 상대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샤오하이는 팀전에서 청룽을 꺾고 단숨에 이름을 알렸으며, 그 시대 최강 선수로 인정받았다.
광저우를 벗어나면서 그는 더 큰 세상을 봤다. 먼 곳에는 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고수도 있었다.
초기 오락실은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케이드 게이머 상당수는 인터넷을 늦게 접했다. 온라인에서도 아주 소수였고 심지어 구식이었다. 2004년 상하이의 어떤 사람이 취안황멍이라는 포럼을 만들었다. 'KOF 동맹'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전국 순위가 있었는데, 무협소설처럼 방위에 따라 국내 고수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동쪽에 주자신(朱家鑫), 서쪽에 펑보(封波), 북쪽에 싱광몌줴(星光灭绝), 남쪽에 샤오하이, 그리고 우한에 있던 중신통(中神通) 청룽이었다. 중신통은 가운데를 맡은 고수라는 뜻이다.
2014년 전까지 샤오하이는 온라인 대회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2004년에 이미 에뮬레이터로 온라인 대전을 할 수 있었지만 경험이 나빴다. 2014년에 더우위에서 방송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온라인에서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그는 보통 광저우 둥성 오락실을 지키고 앉아 남이 도전해 오기를 기다렸다.
후난 사람들이 왔다¶
2005년 광저우에서 제법 큰 아케이드 대회가 체육관에서 열렸다. KOF '97과 KOF '98 두 종목을 뒀고 광저우의 오락실마다 출전 정원이 있었으며 상금은 1만 위안이었다. 외지 고수가 많이 몰렸는데, 후난에서 가장 센 선수들이 다 왔다는 말이 있었다. 그중에는 2006년 TGB 결승에서 일본 KOF 종합 1인자로 불리던 오고쇼(Ogosho)를 꺾고 우승한 헤이피(黑皮), 곧 뤄쉰(罗勋)과 사오가오(扫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뒷날 국내외 무대에서 샤오하이와 여러 차례 맞붙는 오랜 맞수가 되었다.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종목마다 300명 넘게 토너먼트를 치렀다. 다른 e스포츠 종목과 다른 점은 격투 게임의 경기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이다. 1년을 고생해 연습해도 무대 위 몇 분이면 다 날아갈 수 있다. 아주 잔혹하다.
결국 샤오하이는 KOF '97 종목에서 후난 최강 선수들을 이기고 우승했고, '98 종목에서도 외지 선수들을 모두 쓸어 낸 뒤 광저우 팀 동료 다커우(大口), 곧 쑤하오쥔(苏浩钧)과 결승에서 만났다. 이 대회로 샤오하이는 '광저우의 수호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름이 커질수록 도장 깨기를 하러 오는 사람도 늘었다.
그리고 곧 샤오하이는 광저우를 지키는 자리에서 중국을 지키는 자리로 옮겨 갔다. 국제 고수들이 무리를 지어 도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2007년 상하이 정양 오락실에서 열린 TGB(The Great Battle) '왕자의 무대' 국제 초청전에는 중국,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다섯 지역의 고수가 모였다. 지역마다 정원은 5명이었다.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대만의 마왕 쩌우녠웨이(邹年伟), 홍콩 리훙, 일본의 Cap과 따귀남(耳光男)이 있었다. 따귀남은 아주 특이했다. 한 판이 끝날 때마다 이기든 지든 자기 뺨을 세게 때려 정신을 차렸는데, 현장에서 보면 기세가 대단해 보였다.
샤오하이는 그렇게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개인전에서 그는 먼저 대만 선수를 떨어뜨렸고, 손이 아주 빠른 한국 1위를 이긴 뒤 따귀남에게 1 대 2로 졌다.
팀전에서 샤오하이는 혼자 한국 선수 5명을 다 잡았고, 일본 팀 마지막 선수까지 갔다가 Cap에게 졌다.
Cap 이야기가 나오자 샤오하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Cap의 운영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고, 아주 흐르는 듯한 기술을 써서 위를 노리는지 아래를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팀전은 일본에 졌다.
그러나 '98 종목은 샤오하이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낸 한 손 조작을 꺼내 이 선수들을 이겼고, 그것이 일본 선수들을 자극했다.
일본 쪽은 KOF '98만 전문으로 하는 고수들을 불러 다시 와서 설욕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기회는 곧 왔다. 선차이페이양 게임센터가 후원해 연 2007년 베이징 지더우 대회였다. 완다 영화관 안에 경기장을 따로 빌렸고, 일본 KOF '98 최정상 고수 10명이 왔다. 전반은 5 대 5로 비겼고, 후반에 샤오하이가 첫 번째로 올라가 맞은편 일본 선수 10명을 연달아 다 이겼다. 가장 세다던 일본 선수는 샤오하이에게 두 번 졌다.
일본 선수들과의 앙금은 그렇게 생겼다. 아래는 샤오하이의 10연승 영상이다.
영상: KOF '98 중일 대항전 샤오하이 10연승, 유쿠
영상: KOF '98 중일 단체 대항전, 유쿠. 중일 대항전의 전체 영상이고, 당시 격투 게임 대회를 어떻게 치렀는지 볼 수 있다.
물러나는 적은 쫓지 않는 법이라지만 샤오하이는 반대였다. 그는 칼끝을 일본으로 돌렸다. 바다 건너에 고수가 아주 많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가 끝나자 샤오하이는 곧바로 상하이로 날아가 일본 도게키 선발전에 나갔고 무사히 자리를 따냈다. 첫 해외 출국에서 바로 일본 격투 게임의 최고 전당에 발을 들인 것이다.
도게키는 모든 격투 게임의 대회를 전문으로 여는 일본의 조직이었다. 2003년에 시작해 2012년에 마지막 대회를 열었다. 전 세계 32명 정원에 9개 종목을 뒀고 하루에 3종목씩 사흘을 치렀다. 상금은 높지 않아서 1위가 10만 엔이었지만 우승의 값어치는 아주 높았다. 세계 격투 게임의 최고 수준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2007년 도게키는 도쿄 애니메이션 페어(Tokyo Anime Fair)와 함께 열렸다. 샤오하이는 현장 분위기가 아주 좋았고 홍보 영상도 아주 전문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8강 전까지는 진행자가 말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정의 불리함까지 안고 샤오하이는 아주 큰 압박을 받았고, 그래서 이 글 첫머리의 그 당당한 선언이 나온 것이다.
다만 그 말을 하자마자 질 뻔했다. 대만 1위 양(杨)을 만났는데, 상대의 첫 캐릭터에게 자기 캐릭터 둘이 먼저 잡혔다. 세 번째 캐릭터까지 갔을 때 자기와 상대의 캐릭터가 동시에 쓰러져 아주 드문 무승부가 나왔다. 하늘이 샤오하이를 도운 셈이다. 그는 재경기에서 양을 이기고 4강에 올랐다.
결승에서는 중국 선수를 만났다. 앞에서 말한 중신통 청룽이다. 바이두 백과의 청룽 소개는 이렇다. 격투계에서 여성 캐릭터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누군가는 청룽을 두고 "비주류 캐릭터를 쓰면서도 늘 주류 캐릭터보다 앞서 간다"고 평했다. 그는 카구라 치즈루(Chizuru Kagura)의 실전 운영을 만들어 냈다.
청룽 이전에 사람들은 카구라 치즈루가 동작이 느리고 기술이 적어 전통적인 강한 캐릭터와 겨룰 수 없다고 봤다. 청룽의 카구라 치즈루를 보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 캐릭터의 강함을 이해했고 앞다투어 따라 했다. 그래서 KOF판에는 "청룽 이전에 카구라 없고, 청룽 이후에 모두가 카구라"라는 말이 있다.
게다가 그는 초인적인 반응으로 시라누이 마이(Mai Shiranui)의 '무적 확인'을 해냈고, 그 수준은 KOF 유저들이 경외할 정도였다. 그 밖에도 청룽의 경기 영상이 온라인에 많이 돌았다. 대표 캐릭터는 카구라 치즈루, 시라누이 마이, 마추어(Mature), 레오나(Leona), 아테나(Athena), 킹(King) 등으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2007년 도게키 결승에서 그는 중국 광둥의 신예 샤오하이에게 아쉽게 패해 준우승했고, 그 뒤 KOF판에서 물러났다.
이것이 경쟁의 잔혹함이다. 진 사람은 떠나고 이긴 사람은 남으며, 수많은 영웅의 뒷모습이 우리 기억 속에 남는다.
샤오하이는 이겼고 자기 선언을 지켰다. 무대 위 그 당당한 모습을 담은 영상은 중국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돌려 보는 고전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격투 게임 세계 챔피언이었고, 덕분에 격투판 밖의 많은 사람이 그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격투 게임 대회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종목에 대한 기여가 아주 컸다.
이름을 얻은 뒤에도 그는 학업을 놓지 않았다. 수많은 대회 초청을 거절했고 1년 뒤 바라던 대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마친 지금 샤오하이는 프로 선수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케이드 스틱 제조사 Qanba가 해마다 그를 후원해 해외 대회에 내보낸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EVO 격투 대회, 캐나다 컵, 호주의 섀도루 쇼다운(Shadowloo Showdown), 그리고 올해 캡콤이 연 50만 달러 규모의 대회가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는 태국에서 예선을 치르고 있었다.
아케이드 격투 게임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e스포츠 종목 가운데 하나지만 그 발전 과정은 주류 e스포츠 종목과 전혀 달랐다. 한편으로는 중국 대부분 지역, 특히 내륙에서 오락실을 규제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오랫동안 인터넷과 거리가 멀어 중계도 온라인 대전도 충분히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최근 몇 해에 들어서야 차차 나아졌다.
더 많은 사람이 격투 게임에, 그리고 샤오하이 쩡줘쥔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참, 샤오하이가 세 번째로 격투 게임을 하러 갔을 때는 그 얄밉게 웃던 사람이 한 판도 이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격투 게임의 제왕, 샤오하이 쩡줘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