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10년에 걸쳐 만든 EVA젠신 패치 팩¶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十七 EVA剑心补丁包十年造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2월 6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31937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워크래프트 3(WAR3)의 솔로 대전을 하는 사람은 도타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도타를 하는 사람은 솔로 대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하든, 지난 10년 동안 워크래프트 3를 했다면 EVA젠신의 패치 팩은 늘 곁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패치 팩은 게임 실행 파일의 버전 갱신과 중국어화, 각종 수정을 한데 묶어 내려받아 적용하는 비공식 통합 패치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EVA젠신은 누구인가? 이 이름난 e스포츠 이면의 일꾼은 어떻게 이 길로 들어섰는가? 순탄했는가, 아니면 굴곡이 많았는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번 중국 e스포츠 이면사에서는 EVA젠신 패치 팩의 10년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EVA젠신(EVA剑心), 본명 류지광(刘继光)은 1984년 1월 19일 광둥성 사오관(韶关)에서 태어났다. 아이디의 젠신은 검심, 곧 칼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2003년 대학 1학년 때부터 워크래프트 3 경기 리포트를 써서 《대중 소프트웨어(大众软件)》와 CBI 《컴퓨터 상업 정보(电脑商情报)》에 기고해 생활비를 벌었다. 어려운 형편은 그를 일찍 철들게 했고, 이때 몸에 밴 부지런함과 끈기가 그 뒤로도 그를 따라다녔다.
EVA젠신은 워크래프트 3를 아주 일찍 접했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KinK(웡러텅, 翁乐腾)가 만든 War3cn.com에서 게임을 배웠다. KinK는 싱지쉐위안(星际学院) 포럼의 전 게시판 운영자이자 War3CN의 창립자다. 대학 1학년 때는 안헤이왕쯔(暗黑王子, 어둠의 왕자라는 뜻)가 만든 War3xp.com에 들어가 첫 화면 갱신을 맡았다.
EVA젠신은 기술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자기 팀의 웹사이트를 만들려고 프론트페이지(FrontPage)를 독학했다. 대학 1학년 때는 워크래프트 3 게임 프로그램의 버전 업그레이드와 중국어화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패치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국어화(汉化)는 외국 게임의 텍스트를 중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가리킨다.
EVA젠신은 컴퓨터 전공이었지만, 대학에 갓 들어간 신입생이 역컴파일과 프로그램 개발을 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련한 방법으로 프로그램 코드의 기능을 파악했다. 먼저 인터넷에서 구글로 워크래프트 3의 파일 하나하나가 무엇을 하는 파일인지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적은 데다 전부 전문성이 높은 영어 자료였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대다수 파일은 수정 전후에 실제로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거듭 비교해 각 파일의 구체적인 기능을 추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워크래프트 3 프로그램의 설명 문서는 인터넷에 많지 않다. 그러니 EVA젠신이 초기 단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EVA젠신은 2003년 워크래프트 3 1.10 버전부터 패치 팩을 만들기 시작했다. 갱신이 빠르고 쓰는 방법도 간편해서, 1.16 버전 무렵이 되자 같은 시기의 다른 패치들은 이미 거의 갱신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거의 다 EVA젠신 패치를 쓰고 있었다.
2004년, 블리자드가 프로즌 쓰론 1.18 버전을 정식으로 내놓은 뒤 플레이어들은 워크래프트 3 지도 편집기로 RPG 지도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RPG 지도는 솔로 대전보다 입문 난도가 낮고 더 가벼웠다. 여기에 EVA젠신의 패치 팩이 블리자드 공식 중국어판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보탰다. 그 결과 게임의 문턱이 크게 낮아지고 플레이어 수가 급격히 늘었다. EVA젠신 패치는 이 열기를 타고 대규모로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워크래프트 3 중국어화 뒤의 이야기를 한마디 끼워 넣겠다. 블리자드가 공식 중국어판을 내놓기 전, 민간 중국어화 팀들이 워크래프트 3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예를 들어 콴콴 중국어화 팀(宽宽汉化小组)은 아주 이름난 게임 중국어화 팀으로, 《스타크래프트》, 《레드 얼럿》, 《문명》 같은 게임의 중국어화 패치 팩을 만들어 이후의 게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또 NGA의 이름난 게시판 운영자 마이더 3세(麦德三世)도 있다. 이 사람은 여성이다. 워크래프트 원작 설정을 깊이 알고 있어서 워크래프트 3의 스토리 전역 부분 번역이 비교적 정확하고 상세했고, 여러 방면에서 인정을 받았다. 워크래프트 3와 그 뒤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문화가 쌓이고 자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중국어화 작업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여기서 이 이면의 일꾼들을 하나하나 다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하고 싶다. 중국 e스포츠가 오늘에 이른 것은 선수와 해설자의 땀만으로 된 일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이면의 일꾼들은 이름도 웹사이트도 이미 사라졌지만, 역사는 이들의 기여를 잊지 않을 것이고 잊어서도 안 된다.
징싱왕의 시련¶
2005년, 후원을 따낸 두 사람이 EVA젠신을 찾아왔다. 글과 사진 콘텐츠에 게임 영상까지 갖춘 완전히 새로운 e스포츠 웹사이트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급여는 2,000위안뿐이었지만 모델이 그럴듯하게 들렸고 자기가 관심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 EVA젠신이 늘 바라던 일이었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모든 것이 맨바닥에서 시작되었다.
EVA젠신은 2005년이 자기가 가장 많이 배운 해였다고 말한다.
새 회사는 광저우(广州)에 열었고 처음에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EVA젠신은 직접 웹 페이지를 만들고 사이트 콘텐츠를 챙기는 것은 물론 서버 유지 보수와 관리까지 배워야 했다. 당시 사이트의 서버는 광저우 디왕 광장(地王广场) 옆 통신사 전산실에 있었고, 그는 기술 문제를 처리하러 자주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회사는 영상 생중계도 했다. MsJoy와 샤오써(小色)를 데려와 《워크래프트의 밤(魔兽之夜)》, 《스타크래프트의 밤(星际之夜)》, 《워크래프트 10대 영웅(魔兽十大英雄)》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영상 스트림을 내보내려고 사장이 스트리밍 장비를 사 오기까지 했는데, 설명서가 전부 영어인 데다 아무도 이런 장비를 다뤄 본 적이 없어서 영어를 억지로 씹어 가며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EVA젠신은 이렇게 느낀다. 회사는 돈을 벌지 못했고 힘들었으며 오프라인 행사를 많이 해야 겨우 버틸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즐거웠다는 것이다. 날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동료들도 의욕이 넘쳤다. 점심에는 자주 다 같이 돈을 모아 사오라(烧腊) 가게에서 밥을 사 먹었다. 광둥식 구운 고기를 파는 가게다.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이 무렵 EVA젠신 패치의 시장 점유율은 이미 상당히 컸고, 패치를 통해 이용자가 흘러들면서 사이트도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몹시 가혹했다. 모델과 방향은 옳았고 자리도 사람도 갖췄지만, 때가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내기는 아주 어렵다. 8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봐도 영상 주문형 서비스와 생중계가 수익을 내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말 해설자들이 타오바오와 깊이 결합한 뒤의 일이다. 2005년 무렵의 환경을 보면 유쿠(优酷), PPS, PPLive 같은 영상 플랫폼도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래서 EVA젠신과 동료들이 만든 징싱왕(竞星网)은 2006년에 더 버티지 못했다.
징싱왕의 실패는 EVA젠신에게 큰 타격이었다¶
당시 EVA젠신은 e스포츠라는 업계에 대해 몹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이 식어 버렸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는 워크래프트 3 패치 갱신을 포함해 e스포츠와 관련된 모든 일을 내려놓고 집에 돌아가 한동안 지냈다. 그리고 2006년 7월에는 한 친구를 따라 주하이(珠海)로 가서 컴퓨터 하드웨어 장사를 시작했다.
꿈을 떠난 날들에도 EVA젠신에게는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컴퓨터 상가에서 하는 장사가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날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일했다. 컴퓨터를 사는 사람은 많아서 현금 흐름은 좋아 보였지만, 상가 안의 경쟁이 워낙 치열해 기계 한 대당 이윤이 아주 낮았다. 게다가 자기에게는 장사 경험도 없었다. 반년을 하고 나니 총계가 적자였다. 더 하다가는 물건을 들일 돈도 없을 참이었고 설도 다가와서, EVA젠신은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갔다.
2007년 초, 워크래프트 3 1.21 버전이 나왔다. 아주 중대한 버전 갱신이었다. 게임 밸런스가 많이 바뀌었고 블리자드가 CD 키 인증 방식까지 바꿨다. 다시 말해 그 이전의 모든 패치 기술이 전부 무효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EVA젠신의 블로그와 포럼에 몰려와 새 버전 패치를 빨리 내 달라는 글을 남겼다. EVA젠신은 그때도 컴퓨터 상가에서 일하고 있어서 낮에는 너무 바빠 볼 시간이 없었고, 날마다 문을 닫은 뒤에야 그 글들을 볼 수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부름의 목소리 앞에서 그는 문득 패치가 자기 아이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책임이고 내려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을 새워 패치를 만들어 내놓았다.
웃어른들의 지지¶
2007년 설 무렵, EVA젠신의 마음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집안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난 몇 해 동안 e스포츠와 컴퓨터 하드웨어 장사에서 실패한 일을 꺼내며 몹시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른들이 그만 내려놓으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른들은 자기 경험을 많이 들려주며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EVA젠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혼란의 그늘에서 걸어 나와 적극적으로 새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시 출발, 어우유왕¶
2007년 3월, EVA젠신은 우한(武汉)의 어우유왕(偶游网) 창립자 주쉐바오(朱学宝)의 초대를 받아 우한으로 가서 워크래프트 3와 스타크래프트 콘텐츠 업무를 맡았다. 이때의 EVA젠신은 이미 인생의 바닥에 있었다. 우한에서 생활용품을 사고 나니 수중에 5마오, 곧 0.5위안밖에 남지 않아 첫 달은 친구들이 사 주는 밥으로 버텼다. 당시 어우유는 회사 전체가 10명이 되지 않았고 주로 오프라인 행사로 회사를 유지했다. EVA젠신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우한 광구 광장(光谷广场)에서 연 WSVG 대회다. 1회 대회부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투기장 종목을 넣었는데, 현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고 반응이 아주 좋았다.
U9의 제안¶
거의 같은 시기, EVA젠신은 패치와 인맥 쪽 자원 덕분에 U9왕의 CEO 류량(刘亮)의 눈에 들었고 류량도 그에게 제안을 보냈다. 그러나 EVA젠신은 어우유왕에 막 왔는데 떠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 정중히 거절했다. 류량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 EVA젠신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을 뿐 아니라 EVA젠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기까지 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작은 일만 봐도 류량의 일하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U9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는 다른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펼치지 않는다.
이야기를 이어 가자. 2008년 4월, EVA젠신은 한편으로 1년 동안 이어진 류량의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고, 다른 한편으로 몇 차례 만나면서 U9의 스무 명 남짓한 직원들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EVA젠신은 시안(西安)으로 가서 U9에 합류해 싱글 게임 사이트, 워크래프트 3 패치와 공략, 그리고 RPG 쪽 업무를 맡았다. 그때 U9의 워크래프트 3와 RPG 쪽은 이미 200만 페이지뷰였고, 막 일어서기 시작한 도타 사이트도 이미 20만 페이지뷰가 넘었다.
EVA젠신과 U9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일찍이 2004년 U9이 아직 개인 사이트였을 때, 창립자 후이린(灰磷)이 EVA젠신에게 RPG 전문 포럼을 따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EVA젠신은 지금 RPG가 아직 주류 e스포츠 종목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전망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2008년 EVA젠신은 U9의 워크래프트 3 쪽과 e스포츠 계열 사이트를 꾸리는 일에 착수했다. 2009년에는 싱글 게임 팀장이 되었고, 2010년에는 선임 매니저, 2011년에는 콘텐츠 부문 부총괄이 되었다. 3년의 고된 운영을 거쳐 U9의 워크래프트 3 계열 사이트는 업계에서 공인된 최대 사이트가 되었고, 2010년 U9의 도타 사이트는 1,000만 페이지뷰라는 정점을 찍었다. 그가 정예 팀을 이끈 덕분이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U9에서 한 EVA젠신의 일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 패치와 공략 사이트를 통해 워크래프트 3 RPG를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당시 사이트 전체 트래픽의 70퍼센트 정도가 싱글 게임 팀에서 나왔다.
둘. 도타 시뮬레이터와 뉴스 콘텐츠를 통해 도타 사이트를 1,000만 페이지뷰로 끌어올렸다.
도타 버전이 갱신될 때마다 U9은 늘 빠르게 공략과 시뮬레이터를 따라붙일 수 있었고, 심지어 IceFrog에게서 자료를 먼저 받을 수도 있어서 플레이어들이 가장 짧은 시간에 최신 버전 정보를 얻게 했다.
셋. 2009년에 팀을 이끌고 북미 서버의 리그 오브 레전드로 들어가 중국에서 가장 이른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들의 집결지가 되었고, U9 슈퍼 어시스턴트(U9超级助手) 플러그인을 내놓아 북미 서버 중국어화를 해서 플레이어들이 쓰기 편하게 했다.
2010년 TGA 때 미국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젝트 팀이 상하이에 왔고, EVA젠신은 Guinsoo(양다오, 羊刀) 등 해외 프로젝트 책임자 몇 사람을 직접 인터뷰했다. 세 시간 넘게 깊이 이야기를 나누며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아냈다.
알다시피 리그 오브 레전드는 도타가 가장 성행하던 때에 아주 대담하게도 도타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것을 바꿨다. 디나이를 없애고, 정글 버프를 설계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수풀을 만들고, 죽어도 돈을 잃지 않게 하는 식이었다. 디나이는 아군 유닛을 직접 처치해 상대가 얻을 경험치와 골드를 막는 도타의 조작이다. 이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무심코 해 본 시도였을까, 의도한 변화였을까?
이 인터뷰에서 EVA젠신은 처음으로 진짜 답을 얻었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젝트 팀 전체가 게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설계가 고수와 초보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 플레이어가 큰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아주 분명한 의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VA젠신의 이 인터뷰 기사로 중국 플레이어들은 처음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설계 이념과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젝트 팀도 이런 전문적인 인터뷰가 중국 플레이어와의 거리를 좁혀 준 것에 몹시 고마워했다.
넷. U9의 스타크래프트 2 사이트를 100만 페이지뷰로 만들었다.
EVA젠신은 U9에서 보낸 이 몇 해의 가장 큰 수확이 팀을 잘 이끄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승진도 빨라서 2011년에는 U9 부총괄로 올라 십몇 개 싱글 게임 팀의 업무를 관리했다.
그러나 어느 집에나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U9의 사정도 복잡했다. 2009년 종합 게임 사이트로 정식 전환하고 첫 온라인 게임 사이트인 던전 앤 파이터(DNF) 사이트도 성공적으로 내놓았지만, 그 뒤로 사이트 수입은 계속 문제였다. 게다가 회사가 시안에 있어서 최고급 인재를 뽑지도 붙잡지도 못했다. EVA젠신도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좋은 시대에 있으면서 힘을 쓸 수 없다는 느낌은 사람을 몹시 낙담하게 한다.
2011년, EVA젠신은 자기 나이가 많아졌다고 느꼈고 가족도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광저우 둬완 게임(多玩游戏)의 제안을 받아들여 광저우로 돌아가 신작 온라인 게임 콘텐츠를 맡고 다시 시작했다.
EVA젠신은 고마운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특히 U9의 류량과 우펑(吴峰)은 일과 생활 양쪽에서 많은 지도와 도움을 줬다. 함께 걸어온 팀원들과 형제들이 그의 가장 큰 재산이다.
EVA젠신은 얼마 전 아이를 얻었다. 사진을 보여 주는 그는 무척 기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e스포츠 이면사를 쓰며 앞뒤로 인터뷰한 50명 가까운 e스포츠인이 거의 다 얼마 전에 아이를 얻었다는 것을. 가정을 이루고 자리를 잡는 일이 드디어 198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 e스포츠인에게까지 왔다. 어떤 e스포츠인은 나중에 "e스포츠인 가족 모임"을 하나 만들자고 농담을 했다. 어차피 나이가 다들 비슷하니 어른들은 옛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이 생각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EVA젠신의 패치 팩처럼, 중국 e스포츠도 1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