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중국 e스포츠 대전 플랫폼 흥망사¶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四 中国电子竞技对战平台兴衰录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17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15324
이 번역은 2026년 8월 1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중국 e스포츠에서 처음으로 돈을 번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선수가 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대회 조직이 경기를 열어 광고비를 버는 것이라고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안정성과 성숙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처음으로 돈을 번 모델이 e스포츠 대전 플랫폼이라고 본다.
대전 플랫폼의 번성은 지난 십몇 년, 앞 세대와 뒤 세대가 이어지지 않던 그 시대가 억지로 밀어낸 결과다.
지금 우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할 때 게임 안에서 시작을 한 번 누르고 잠깐 기다리면 팀원과 상대가 잡힌다. 대화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주 편하다. 이것이 곧 대전 플랫폼이고, 게임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게임이 싱글 플레이였다. 싱글 플레이 게임이 인터넷 시대를 만났는데 게임 쪽의 변화가 곧바로 따라가지 못하자, 제3자 대전 플랫폼이 과도기의 산물로 등장했다. 다만 그 과도기가 십몇 년이나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97년 1월, 미국 블리자드가 이름난 대전 플랫폼 배틀넷(http://battle.net)을 정식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컴퓨터를 쓰는 기술도 인터넷도 막 걸음마를 떼던 그 시절, 대다수 중국인에게는 상대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로그인에 성공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에서는 중국 플레이어의 게임 수요가 점점 커졌고,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이 경쟁 게임을 네트워크화해 직접 개발하는 능력이 한참 뒤처져 있었다. 사실 이 일은 최근 몇 년에야 겨우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시절 외국 회사가 중국 플레이어의 요구를 살펴 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IT 기술자들은 떠밀리듯 계속 길을 더듬었고, 마침내 중국의 네트워크 환경과 플레이어의 수요를 채울 제3자 e스포츠 대전 플랫폼을 하나씩 세워 나갔다.
롄중의 보드게임 플랫폼¶
1998년 3월, 기술 개발자 세 사람 바오위에차오(鲍岳桥), 젠징(简晶), 왕젠화(王建华)가 20만 위안을 모아 베이징 상디의 한 여관에서 온라인 보드게임을 주력으로 하는 베이징 롄중 컴퓨터기술 유한공사를 세웠다. 줄여서 롄중이고, 영문 이름은 아워게임(Ourgame)이다. 2000년 롄중의 등록 사용자는 70만 명, 동시 접속은 9,000명에 이르렀고, 2003년 말에는 동시 접속이 단숨에 50만 명 고비를 넘었다.
롄중의 보드게임은 네트워크와 사양을 크게 따지지 않아 그 시대의 수요에 맞았고, 그래서 롄중 사람들은 e스포츠에서 가장 먼저 단맛을 본 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보면 롄중은 다음 수가 부족했다. 보드게임 플랫폼은 진입 문턱이 낮아 핵심 경쟁력이 약했고, 그래서 텐센트 QQ가 보드게임 플랫폼을 내놓자마자 롄중의 사용자를 그대로 쓸어 갔다.
블리자드 배틀넷의 모방자들¶
1997년에 이미 문을 연 블리자드 배틀넷(http://battle.net)은 전략적 안목이 대단한 설계였다. 인터넷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싱글 플레이 게임과의 결합을 생각해 냈을 뿐 아니라, 네트워크 대전의 핵심이 자동 매칭 시스템이라는 것을 이미 분명히 보고 있었다. 전적에 따라 실력이 비슷한 사람을 붙여 주는 그 기능이다.
이 하나를 두고도 중국의 많은 대전 플랫폼이 아주 긴 시간과 힘을 들여 모방했다.
아쉽게도 블리자드 배틀넷의 서버는 줄곧 해외에 있었고 2008년에야 중국에 들어왔다. 그래서 모방자들에게 배우고 고칠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다. 그 결과 블리자드 배틀넷은 중국 e스포츠 역사에서 거의 내내 고급스럽고 소수만 쓰는 플랫폼이었다. 이 브랜드 이미지는 이후 블리자드의 전략 배치에 큰 영향을 줬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하겠다.
스타크래프트 시대, 사설 배틀넷이 넘쳐나다¶
FSGS 기술이 나오면서 중국 각지의 로컬 서버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FSGS는 Free Standard Game Server, 곧 무료 표준 게임 서버의 줄임말이다. 독일 NETGAMES가 개발했고, 블리자드의 게임 대전 플랫폼 배틀넷을 흉내 낸 제3자 소프트웨어다.
1998년부터 2001년 사이 중국의 스타크래프트 사설 배틀넷은 대단히 많았다. 불완전한 집계만으로도 100개에 가까웠다. 다만 대부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제약을 받아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중 비교적 영향력이 있던 곳은 이렇다. 베이징 263 배틀넷, CGOL(아시아게임) 배틀넷과 DM(아시아게임 둥메이), 유샤 배틀넷, 베이베이 배틀넷, 왕롄 배틀넷 등이다.
이 가운데 263 배틀넷은 프로그램 차원에서 '팀'이라는 단위를 분명히 했다. 이것이 팀의 규모화를 크게 밀어 주어 플레이어들이 소속감을 갖기 시작했고, 조직을 갖춘 팀 소통이 e스포츠의 발전을 앞당겼다. CSA 팀은 그때 263에서 정말 크게 번성했다.
그리고 이름난 아시아게임 배틀넷이 있다. 이것은 제대로 짚고 넘어갈 사례다.
1999년부터 무료로 운영한 아시아게임 배틀넷은 비교적 두둑한 자본으로 고사양 서버를 갖추고 FSGS 상위 버전을 사들여, 리눅스판의 999 제한을 받지 않고 래더 게임을 최고 속도로 지원할 수 있었다. 안정적인 대전은 스타크래프트 플레이어 대다수를 끌어들였고, 중국의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을 사실상 하나로 통일하다시피 했다.
중국 e스포츠 플레이어의 열기가 처음으로 정점까지 올라갔다. 이대로 가면 한국 e스포츠를 따라잡고 앞지르는 것도 머지않았다고 거의 모두가 생각했다.
2001년 12월, 아시아게임 배틀넷은 홍콩 둥팡메이리의 자금을 받은 뒤 유료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요금을 받기 시작하자 플레이어들은 하룻밤 사이에 흩어졌고, 아시아게임은 그렇게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 먼저 시점이다. 찾아보니 텐센트 QQ의 회원 기능이 나온 때는 2000년 12월 18일이었는데, 요금을 걷을 통로가 없어 오랫동안 별 성과가 없었다.
2001년 초 중국이동통신이 이동 멍왕(Monternet) 서비스를 내놓았다. 이동 멍왕은 휴대전화 요금으로 대신 걷는 '2대 8 분배' 협약을 썼다. 통신사가 2할,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가 8할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텐센트는 여기에 모바일 QQ 사업을 열어 유료 회원을 늘리고 부가 서비스를 더 내놓았다. 가장 많을 때 텐센트는 이동 멍왕 콘텐츠 사업자 사업의 7할을 차지했다.
2001년 말 텐센트는 마침내 현금 흐름을 흑자로 돌렸고, 2002년 3월에야 동시 접속이 막 300만을 넘었다.
다시 말해 2001년 말에야 텐센트는 겨우 손익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중국 플레이어가 매달 인터넷 회사에 10위안을 내는 습관도 텐센트가 여러 해를 들여 길러 낸 것이다. 지금 이 시기를 이야기하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타오바오도 울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결제 통로가 없었다는 것과 결제 습관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다는 것이 아시아게임이 실패한 주된 이유다.
아시아게임은 e스포츠 대전 플랫폼 가운데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일을 가장 먼저 한 쪽이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다친 쪽이기도 했다. 나는 그 시대의 e스포츠 개척자들을 존경한다. 그들의 용기와 모색이 e스포츠를 앞으로 밀고 간 원동력이다.
하오팡 플랫폼의 흥망¶
하오팡 플랫폼을 이야기하려면 창업자 리리쥔(李立均)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에서는 리리쥔의 배경 자료를 찾을 수 없고 나도 말하기가 곤란하다. 당대사를 쓰는 일이 어려운 지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도 이미 나와 있는 자료로 미루어 볼 수는 있다.
상하이 하오팡 과학기술은 1998년에 세워진 첨단기술 민영 기업이다. 주력 사업은 소프트웨어 개발, 시스템 통합, 네트워크 시스템 응용 같은 분야였고 당시 연간 생산액은 4억 위안 안팎으로 안정돼 있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상하이 전신의 개조 공사를 따낼 수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하오팡 플랫폼은 2003년에 중국 전역의 전신 기계실에 서버를 빠르게 배치할 수 있는 회사였다. 이것은 QQ 대전 플랫폼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여기에는 판권 문제를 두고 텐센트가 결정을 미룬 사정도 있었다. 그때 QQ 보드게임 플랫폼이 롄중을 막 눌러 버린 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회사는 '배경이 두텁다'는 네 글자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2001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지나간 뒤 리리쥔은 하오팡의 제품을 더 다양하게 만들려고 2002년 하반기에 '게임 상하이탄' 플랫폼을 인수했고, 이를 바탕으로 상하이 하오팡 온라인 정보기술 유한공사를 세웠다. 당시 플랫폼 개발자는 두 사람이었다. 서버 쪽을 맡은 쉬신(徐欣), 곧 하오팡 계정 번호가 01인 번텅(奔腾)이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치판의 대표다. 클라이언트 쪽을 맡은 사람은 쩡팡페이(曾芳飞), 아이디는 라오후(老虎), 곧 호랑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맡은 GAR 등 몇 사람이 더 있었다.
하오팡은 기술력 자체가 강했고, 시장 쪽으로 꾸린 진용도 약하지 않았다.
2002년 말, 그때 가장 뜨겁던 중국어 CS 커뮤니티 Ccsk 팀의 수뇌부에서 다툼이 한 번 벌어졌다. 한쪽은 사이트 소유자 DDM과 총괄 책임자 라오멍(老梦)이었고, 다른 한쪽은 대외협력 책임자 양천(杨晨)과 기술 책임자 궈줘(郭茁)였다. 양천은 뒷날 하오팡의 마케팅 총괄이 되었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자기 회사를 차렸다. 궈줘는 아이디가 싱싱(星星), 곧 별이라는 뜻이고, 뒷날 하오팡의 운영 총괄이 되었으며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치판의 대표 보좌역이다.
그때 DDM과 라오멍, 양천 등은 베이징에 있었고 궈줘는 상하이에 있었다. 그래서 다툼은 Ccsk 내부 포럼에서 벌어졌다. 나는 그때 막 Ccsk 뉴스팀 부팀장이 된 참이라 이 글들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양천과 궈줘는 왜 떠났을까? 그들은 그때 포럼에 서로 다투는 글을 아주 많이 썼는데, 쓴 내용은 대부분 예전의 갈등이었다. 작은 갈등이 쌓인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는 하다. 그러나 진짜 주된 이유는 그때 e스포츠가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아무도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주사위 도박에서 크게 나올지 작게 나올지를 거는 것과 같다. 주사위 통을 열기 전에는 한쪽은 크다 하고 다른 쪽은 작다 하는데 둘 다 나름의 근거를 댈 수 있다. 이런 정보 비대칭이 만들어 낸 갈라섬은 지금 돌아봐도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앞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이 다툼의 결과로 Ccsk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무리는 베이징으로 갔다. 그때 한 여성 투자자가 E로 시작하는 회사를 여러 개 만들어 개념을 띄우고 상장할 생각이었고, 그래서 Ccsk는 이싸이(Esai)가 되었다. 양천은 궈줘와 장란(张然)을 데리고 상하이 하오팡 온라인으로 가서 시장과 기술을 맡았다.
양천의 합류로 e스포츠 기자 주재소라는 개념이 CGA에 들어왔다. 그러나 CGA는 어쨌든 새로 나온 것이어서, 한동안은 Ccsk의 방문자 수가 CGA보다 훨씬 많았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하오팡 플랫폼은 시장 홍보 작업을 아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하오팡은 중국중앙방송 CCTV5와 전략적 협력 협약을 맺고, CCTV5의 프로그램 《e스포츠 세계》에 콘텐츠와 인력을 일부 지원했다. 그때 CGA의 편집장 K4, 대회 총괄 페이잉(飞影) 등은 프로그램 진행자 돤쉬안(段暄), 연출진과 매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2003년에는 XPC 시스템을 만들던 하오신, 곧 셔틀(Shuttle)이 당시 절정에 있던 스웨덴 SK 팀을 중국에 초청했고 CGA가 전 일정을 보도했다. 상하이 메이뤄청(Metro City)에서 열린 시범 경기가 끝난 뒤 팬 수백 명이 버스를 쫓아 달렸다. 중국에 처음 온 SK 팀은 크게 감격했다. 이 나라에 e스포츠 애호가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그들은 그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돌아간 뒤 그들은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널리 알렸고, 중국 e스포츠의 열기는 그때부터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하오팡 플랫폼은 중국 전역의 전신 기계실에 서버를 빠르게 배치했다.
당시 하오팡의 기회는 대단히 좋았다. 아니, 그 무렵 중국의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가 행복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2002년 무렵 네트워크 사업자에게는 콘텐츠가 부족했다. 예를 들어 창청 브로드밴드가 막 일어섰을 때 망은 아주 빠르게 깔았는데, 깔고 나니 자기 망 안에 콘텐츠가 없었다. 사용자는 여전히 다른 망으로 건너가 사이트를 보고 게임을 해야 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 건너감은 속도에 큰 영향을 준다. 시간이 지나면 사용자는 그 브로드밴드를 쓰지 않게 된다.
그래서 당시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콘텐츠를 잡으려고 사이트와 게임 운영사에 대량의 무료 대역폭을 내줬고, 하오팡의 출발이 마침 이 물결에 올라탔다. 여기에 전신과의 협력 관계가 더해져 하오팡의 서버 배치는 그렇게 빠르게 끝났다. 그때 전신 채널 개설을 맡은 사람도 하오팡의 창업 공신 황춘위(黄春雨, Rain)였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상하이 유취의 대표다.
e스포츠 CS 황금기에 하오팡 대전 플랫폼이 빠르게 떠오른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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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가 접속하는 절차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복잡한 네트워크 상황을 자동으로 많이 처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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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방방곡곡에 서버를 빠르게 배치할 자본과 조건이 있어서, 수많은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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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A 사이트에 국내외 뉴스를 취재할 보도팀을 내보낼 만한 힘이 있어서, 플레이어를 뉴스에 더 가까이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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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인 하오팡 플랫폼과 CGA 사이트가 묶여서 함께 자라며 e스포츠 애호가를 모으는 데 서로 힘을 보탰다.
이런 이유들이 겹치면서 하오팡 플랫폼의 클라이언트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중국 각지 PC방의 바탕화면에 올라왔다. 여기서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CGA 시절을 이야기하면 정말 자랑스럽다. CGA 근무복을 입고 나가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었다.
나는 지금도 CGA 뉴스팀이 e스포츠 시대의 가장 강한 팀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뉴스팀의 핵심 인물은 편집장 K4, JOJO, 페이샹더허란런(飞翔的荷兰人), Sfred, 바이샤오성(百晓生), BBC 장훙성(张宏圣), Jkidd, bigxia, MagiCGoA, treebear, 사부쓰런(杀不死人), Kevin, mint 등이었다. 모두 능력이 뛰어나 혼자서 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페이샹더허란런은 하늘을 나는 네덜란드인, 바이샤오성은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사부쓰런은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훙성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GamesTV의 BBC이고, 당시에는 CGA 워크래프트 3 분사이트의 사이트장이었다.
하오팡 플랫폼과 CGA는 그렇게 1999년부터 2004년까지의 CS 시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이제 하오팡 플랫폼의 쇠락을 이야기할 차례다. 뭐라고? 전환이 너무 빠르다고?
어쩔 수 없다. 역사는 원래 그런 것이고, 우리가 좋아하든 아니든 쇠락은 2004년부터 조용히 시작되었다.
나는 줄곧 중국 e스포츠 종목의 5년설을 말해 왔다. 미신 같은 숙명론처럼 들리지만 십몇 년 동안 지켜보며 얻은 규칙이다. CS는 1999년에 시작해 2004년이 딱 다섯 번째 해였다. 바로 그해에 CS가 쇠락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 나온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 3는 1년을 지나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 낡은 것과 새것이 교대하는 결정적인 시점인 2004년, 성다가 하오팡 플랫폼 인수 계획에 들어갔다. 그때 보기에는 대단히 앞날이 밝은 자원 통합이었지만, 지금 보면 거기에는 다른 씁쓸함이 있다.
이 인수와 협력은 왜 생겼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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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팡 플랫폼은 2002년부터 2004년 초까지 줄곧 무료로 운영되었다. 편리함과 빠른 속도, 무료라는 점이 하오팡 플랫폼에 거대한 동시 접속자를 안겨 줘서, 기억으로는 2004년 초 하오팡 플랫폼의 동시 접속이 90만을 넘었다. 그런데 돈은 벌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 같은 웹 게임도 없었고 e스포츠 플레이어에게 지금 같은 소비력도 없었으며 결제 수단도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고 광고 수입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하오팡 플랫폼은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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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성다의 빠른 부상은 중국 게임 업계에 길을 보여 줬다. 2004년 성다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려 했고, 하오팡의 동시 접속자 수를 눈여겨봤다. 당시 재무제표에서 동시 접속자 수는 아주 중요한 지표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성다는 하오팡에게 어서 내 그릇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일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당시 유행하던 광고 대사를 빌린 말이다.
이 인수는 2004년에 시작해 2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과정이 너무 내부에서 진행되어서 이것이 실적 조건이 걸린 계약이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본 것은, 2004년부터 하오팡 플랫폼이 수익 기능을 몇 가지 억지로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료 회원의 밀어내기 기능이 그렇다.
이 기능이 나온 배경을 먼저 설명하겠다. 하오팡 대전 플랫폼은 방을 단위로 사용자를 수용했는데, 방 하나의 정원은 많아야 몇백 명이었다. 그런데 다들 고수와 빨리 붙고 싶어 해서 어떤 서버는 늘 꽉 차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유료 회원 밀어내기 기능은 이 배경에서 태어났다. 돈을 낸 회원이 이런 서버에 들어가면 시스템이 무작위로 비유료 사용자 한 명을 밀어냈다. 이것이 사용자 결제율을 크게 올리기는 했지만, 수가 훨씬 많은 비유료 사용자에게는 대단히 나쁜 경험이었다.
이에 대해 내가 그때 들은 이야기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게 한 것은 사용자 결제율을 올려 나중에 플랫폼을 더 좋은 값에 팔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아주 짧은 시간에 하오팡 플랫폼의 동시 접속자는 100만에 가깝던 데서 30만 정도까지 떨어졌고, 마지막에는 조금 회복해 50만 안팎에서 안정되었다.
성다가 하오팡을 인수하는 데 도대체 얼마를 썼을까?
어떤 사람은 성다의 2005년 4분기 재무 보고에서 6,000만 달러라는 숫자를 읽어 냈고, 어떤 사람은 리리쥔이 인민폐 3,000만 위안을 들여 하오팡을 만들어 3,000만 달러에 팔았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숫자가 얼마인지는 깊이 따지지 않겠다. 이것은 하오팡에게 좋은 출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성다가 하오팡의 자리매김을 혼란스럽게 잡았고 회사 관리에서 내부 소모가 생겨, 하오팡은 3년에서 5년에 이르도록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것이 당시 수많은 경쟁자에게 기회를 만들어 줬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야오치린란(妖气凛然)의 답변을 보면 된다. 아주 자세하다. 그가 바로 궈줘이고, 그 시절 CGA의 운영 총괄이자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GG 플랫폼¶
GG 대전 플랫폼은 지금 가레나(Garena)로 이름을 바꿨고 중국어 이름은 징우타이다.
GG 플랫폼의 창업자가 바로 지금 쥐메이유핀(Jumei)의 창업자 천어우(陈欧)다. 세상 참 좁다.
2006년 1월, 제2회 StarsWar가 시작되기 전날 밤에 나는 기술 조정을 하러 온 천어우를 만났다. GG 플랫폼이 개발한 GGTV가 세계적인 대회의 현장 생중계에 처음으로 쓰인 자리였다. 그때의 천어우는 수줍게 웃기만 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노트북에 고개를 파묻고 밤늦게까지 조정 작업을 했다.
GG 플랫폼의 기술은 당시 대전 플랫폼 가운데 아주 특별했다. 천어우 자신은 자기 기술이 복잡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네트워크 연결 속도는 대단히 좋았고, 특히 중국에서 해외 경기에 접속할 때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2005년은 워크래프트 3가 빛나기 시작한 때다. 나는 이미 http://Replays.net에 합류해 창립자 ZAX와 함께 미국의 가상 아이템 거래 플랫폼 IGE 밑에서 일하고 있었고, WE 팀도 KinG이 이끌어 IGE로 들어갔다.
IGE 중국 책임자 쉬윈보(许云波)가 개인적으로 워크래프트 3를 아주 좋아했고, 가상 아이템 거래를 중국에서 알리는 데 e스포츠가 더 편했으며, 여기에 IGE의 좋은 현금 흐름이 더해지면서 중국 e스포츠 역사에서 대단히 안정적인 발전 단계가 만들어졌다. Sky의 WCG 2연패도 그때 나왔다.
그러나 그 시기는 싱가포르에서 공부를 마치고 막 귀국한 천어우에게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GG 플랫폼이 더 크게 자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때는 동시 접속자가 가장 많던 하오팡 플랫폼조차 수익 모델이 분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GG 플랫폼의 투자 협상은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http://Replays.net의 창립자 ZAX가 천어우와 손을 잡고 힘겨운 자력갱생을 시작했다. ZAX는 당시 워크래프트 3 플레이어의 관심이 가장 높던 http://Replays.net 포럼의 사용자를 GG 플랫폼으로 끌어왔다. 사용자는 BBS 계정으로 바로 로그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내놓은 GGTV, 팀과 친구 기능, 랙 방지와 부정행위 방지 기능도 사용자를 많이 끌어들였다.
그런데도 GG 플랫폼의 성장은 여전히 더뎠다. 천어우는 한때 GG 플랫폼을 IGE에 팔 생각도 했지만, 쉬윈보는 그때 IGE의 회사 중심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보고 받지 않았다.
그렇게 천어우는 GG 플랫폼을 들고 싱가포르로 가서 투자를 받아 창업했다. 이것이 지금의 가레나다. 뒤에 몇 가지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자본이 창업자를 밀어내는 진부한 이야기가 다시 한번 되풀이되었다. 천어우는 자기가 가진 지분을 팔아 치우고 미국 스탠퍼드로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 다시 일어섰는데,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인 쥐메이유핀의 앞 이야기다.
VS 플랫폼의 부상과 쇠락¶
VS 플랫폼과 그 뒤의 장먼런 같은 플랫폼이 성공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플랫폼 기술이 무르익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놓인 시기가 하오팡 플랫폼 때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WE.Sky가 2005년과 2006년 WCG 2연패를 거둔 뒤 중국 e스포츠는 점점 더 많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때 협력을 이야기하러 나가면 e스포츠가 무엇인지 애써 설명할 필요가 더는 없었다.
전자 결제 수단 쪽에서도 타오바오와 알리페이 같은 수단이 2007년 무렵 이미 대단히 무르익었다. 게다가 e스포츠 1세대 플레이어들은 서른 줄에 가까워져 소비력도 크게 올라갔다. e스포츠는 그때 처음으로 좋은 앞날을 보여 줬다.
VS 플랫폼은 워크래프트 3 시대에 하오팡 플랫폼과의 정면충돌을 아주 영리하게 피했다. 수준 높은 프로 선수를 앞세우는 브랜드 노선을 골랐고, 사용자의 수준을 보여 주는 VS 점수 등급이라는 개념을 내놓아 남과 견주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 심리에 맞췄다. 또한 하오팡은 플레이어는 많지만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파고들어 작고 빠른 전략으로 갔고, 워크래프트 3의 핵심 사용자를 많이 끌어들였다.
소수 취향이던 VS 플랫폼은 워크래프트 3 시대에 넉넉하게 살지 못했다. 그러나 하오팡 플랫폼과 팔자가 달라서 VS는 좋은 때가 올 때까지 버텼다.
2005년에 문을 연 VS 플랫폼은 2년을 참고 견딘 뒤 2007년 도타의 부상을 만났다. 동시 접속자가 계속 올라 도타가 가장 뜨겁던 2010년에는 VS의 동시 접속이 100만에 이르러 하오팡 플랫폼을 완전히 넘어섰다.
매출 쪽에서도 VS는 좋은 시기를 만났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광고 붐이든 웹 게임 공동 운영 모델이든, VS 플랫폼이 쥔 자원을 돈으로 바꾸는 방법이 모두 무르익어 갔다. 돈이 생긴 VS 플랫폼은 자체 게임 VS 삼국을 직접 투자해 개발하기 시작했다. 1억 위안을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VS 삼국의 시장 반응은 밋밋했고, VS 플랫폼 자체의 기술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기에 후발 주자인 11 대전 플랫폼이 내놓은 도타 래더 시스템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장사판은 전쟁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밀린다는 옛말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VS 플랫폼은 2010년부터 천천히 쇠락했다.
이 글은 주로 1998년부터 2010년까지를 쓰기 때문에 11 대전 플랫폼의 역사는 당분간 다루지 않겠다. 다만 역사가 흘러온 방향에서 보면 한 가지 방향은 예측할 수 있다.
e스포츠 대전 플랫폼은 싱글 플레이 게임에서 시작해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일어섰고, 게임에 대해 소통하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의 수요에 맞았다. 그러나 그 핵심인 매칭과 소통 기능은 사실 게임의 일부다. 경쟁 게임이 온라인 게임이 된 뒤 게임 제작사들은 자기 게임의 매칭과 소통 기능 개발을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과도기에 주어진 e스포츠 대전 플랫폼의 역사적 사명이 곧 끝나 간다고 본다. 대전 플랫폼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점점 변두리로 밀려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