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e스포츠 첫 여성 구단주 RuRu 판제¶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四十三 电竞第一女老板 RuRu潘婕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7년 2월 20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5198233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RuRu는 웃으며 말했다. "설이 되니 친척 어른들까지 나를 '태후(太后)'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하, 그분들은 이 별명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면서 아주 살갑게 그렇게 부른다. 나로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RuRu는 자기를 놀리면서 음식을 시켰는데, 시킨 것 가운데 매운 것이 많았다.
이번이 한 달 사이에 그녀를 만난 세 번째였다.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았다. 옷차림은 편했고 몸집은 작고 말랐으며,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르고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e스포츠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해져 젓가락을 휘둘렀고, 밥을 먹을 때는 상에 엎드려 한 손으로 턱을 괬다.
"요즘 게임 운영사와 협상하느라, 그리고 LGD 클럽의 새 투자 유치 건으로 바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미안하다." 그녀는 먹으면서 말했다. 배가 고팠던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이 기업 가치 6억 위안에 가까운 인터넷 회사의 대표이며 e스포츠판에서 무게가 만만찮은 직함을 여럿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LGD e스포츠 클럽의 구단주, VPgame의 창립자, 중국 도타 엘리트 연맹 CDEC의 창립자다.
어느 업계든 핵심 영역의 경쟁은 몹시 혹독하다.
중국 프로 e스포츠판은 거의 남자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RuRu는 관료 집안 자제도 부유층 2세도 아니다. 미술 디자인과 프런트엔드 개발을 하던 기술자로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고, 그 출발은 구단주가 도망친 뒤 남은 난장판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업계가 인정하는 바이고, 왕쓰충(王思聪)도 그녀의 회사에 투자했다.
다만 관리자로서 RuRu가 성격 면에서 성숙하지 못한 점 또한 뚜렷하다.
"내 가장 큰 잘못은 나 자신을 무대 앞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RuRu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RuRu는 클럽과 선수 사이의 고용 갈등 때문에 심한 욕을 먹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인신공격과 사생활에 관한 소문도 많이 따라붙었다.
처음에 그녀는 이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전에 e스포츠가 그렇게 어렵던 때에는 다들 서로 받쳐 주며 견뎌 왔다. 그런데 형편이 나아지고 나니 하루 종일 서로 물어뜯기 시작한다. 분명히 일을 하고 있는데 나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8개국 연합군의 중국 침공 역사를 본떠 'e스포츠 황태후'라는 글을 지어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와 통제욕을 비꼬았다.
RuRu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전에 아주 감성적인 사람이어서 남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늘 인터넷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가 바로잡으려 할수록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진짜라고 더 믿었다. 2016년 중반이 지나 회사 일이 정말 너무 바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신경을 끌 수 있게 되었다."
극단적인 처녀자리의 성장¶
RuRu, 곧 판제(潘婕)는 1986년 9월 12일 장쑤성 난퉁(江苏南通)의 건설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극단적인 처녀자리가 극단적인 어머니를 만난 셈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판제를 가르치는 방식은 하나였다. 무엇이든 1등을 못 하면 때렸다.
"우리 엄마는 아주 강한 사람이다. 내가 사귀는 남자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참견했다. 나는 엄마와 아주 닮았고 성격도 닮았다. 어릴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모든 것에서 1등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판제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를 놀리는 말투였다.
학교에서 칠판 신문(黑板报)을 만들면 그녀는 매번 1등이었다. 칠판 신문은 교실 뒤 칠판에 분필로 꾸며 만드는 학급 벽보다. 그녀의 칠판 신문은 그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어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치자꽃을 주제로 잡았다. 보통 분필 그림으로는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아서 가장 좋은 분필을 사다가 가루로 갈았다. 종이를 꽃 모양으로 오려 내 칠판에 대고 가루를 한 송이씩 불어서 얹었다. 그다음에 테두리를 그리고 잎과 가지를 그렸다. 그러면 꽃이 도드라져 보여서 아주 선명하고 입체적이었다." 판제가 돌이켰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뒤에 칠판 신문을 만들었지만 그녀는 학교에 혼자 남아 밤을 새웠다.
다만 눈에 띄기를 좋아하고 무엇이든 1등을 차지하려는 성격 탓에 미움도 많이 샀다. 악의는 전혀 없었는데도 익명 투표에서 반에서 가장 싫은 사람으로 뽑히기까지 했다.
"한번은 새 반에 갔는데 다들 익명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투표를 했다. 나는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뽑혔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고, 한 학기가 지나자 다들 나를 알게 되어 사이가 아주 좋아졌다."
판제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중학교 때는 방학마다 혼자 항저우(杭州)의 중국미술학원(中国美术学院)에 찾아가 교수에게 배움을 청했다.
고3 미술 실기 시험에서는 후베이미술학원(湖北美术学院) 전공 실기 17등을 했고,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 점수는 합격선의 두 배가 넘었다. 그녀는 장쑤성에서 유일한 합격자가 되어 우한(武汉)의 후베이미술학원 의상 디자인 전공에 들어갔다.
별난 대학 생활¶
"지금 대학 때 한 일들을 떠올리면 나는 그냥 별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 판제는 옛일을 이야기하며 조금 흥분했다.
2004년 가을, 대학 첫날, 어머니에게서 천 리 떨어진 곳에 온 판제는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그날 그녀는 아주 많은 일을 했다.
반에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다들 두어 마디 하고 내려갔다.
판제는 올라가서 먼저 자기를 소개하려고 쓴 긴 시를 낭송했다. 그다음 차이이린(蔡依林)의 노래 《사랑의 36계(爱情三十六计)》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며 춤췄다. 10분 넘게 이어진 이 소동에 좌중이 얼어붙었고, 그때부터 4년 동안 대학 동기들은 그녀를 '36계'라고 불렀다.
무용단 신입 모집 때는 늦게 가서 이미 끝난 뒤였는데, 그녀는 기어이 교사를 붙잡아 두고 사람들 앞에서 즉흥으로 춤을 췄다. 또 한 번 좌중을 놀라게 했고 그렇게 무용 동아리에 들어갔다.
왜 늦었을까. 그날 교내 방송국, 예술단, 소설, 시 같은 여러 동아리에도 함께 가입했기 때문이다.
밤이 되어 다들 잠자리에 들 무렵, 그녀의 흥은 그제야 시작되었다. PC방에 가서 게임을 할 참이었다. 밤을 새울 생각이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일이었다. 여기서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를 가리키며, 한국의 PC방과 똑같은 곳은 아니다.
그날 밤 그녀는 PC방에 있는 게임을 하나씩 열어 보다가 《워크래프트 3》을 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이 있다니. 그런데 내가 지다니." 처녀자리의 사고방식은 역시 달랐다. 판제는 밤새 쉬운 컴퓨터에게 졌고,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나는 미쳤던 것 같다. 수업과 잠을 빼면 PC방에서 밤새 WAR3만 했다. 이기지 못하면 공략을 뒤지고 리플레이를 보고, 그러고 나서 또 했다."
그렇게 판제는 쉬운 컴퓨터 하나에게 지던 데서 미친 컴퓨터 셋을 상대하는 데까지 갔다. 또 그 PC방에서 우한이공대학(武汉理工大学)의 WAR3 반프로 선수 무리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e스포츠와 인연을 맺었다.
Aconcagua.Rurutia.Asuka¶
이것이 게임 안에서 쓰던 판제의 온전한 이름이다. Aconcagua는 화산의 이름이고, Rurutia는 일본 여성 가수다. 그녀가 부른 《길 잃은 나비(迷途的蝴蝶)》를 어릴 때부터 나비를 좋아한 판제는 자기 인생의 자화상으로 삼았다. Asuka는 어느 WAR3 선수가 그녀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나는 나비의 맹목적이고 제멋대로이고 짧은 점을 특히 좋아한다. 내 QQ 닉네임은 중학교 때부터 뎨우폔셴(蝶舞蹁跹)이었다. 나비가 너울너울 춤춘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오카오 첫 문제가 '폔셴(蹁跹)' 두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는 것이어서 나를 아는 동기들은 다 맞혔다. 하하하."
화산, 나비, WAR3. 판제는 그때 자기 상태를 잘 요약하는 아이디를 지은 셈이다.
"그런데 나중에 다들 내 아이디는 부르기가 너무 번거롭다면서 그냥 RuRu라고만 불렀다." 판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운이 남아도는 RuRu¶
온갖 동아리 활동에 시험 요점을 짚어 주는 학교 게시판까지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2004년 대학 1학년의 RuRu는 자기 사업을 하나 벌일 기운까지 남아 있었다. '남의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이것이 뒷날 e스포츠 사업의 바탕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RuRu는 미술 전공이라는 강점이 있었고 프런트엔드 개발도 독학했다. 그녀가 만든 사이트는 남다른 데가 있었고 값도 아주 쌌다. 회사 홈페이지 한 건에 남들이 1만 위안을 부를 때 그녀는 2,000위안만 받고 유지 보수까지 해 줬다. 중소기업 주문이 몰려들었다.
"나는 백엔드 개발은 못 했지만 인터넷에는 원래 오픈 소스로 나온 사이트 전체 코드가 많았다. 나중에 손에 익고 나서는 혼자서 하루에 사이트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서버도 빌려서 도메인 신청과 서버 구축까지 한 번에 해결해 줬다."
곧 RuRu는 중소 상인들 사이에서 이름이 점점 알려졌고, 입소문을 타고 2005년에는 큰 고객군을 만났다. 이름난 휴대폰 상가 상하이 부예청(上海不夜城)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상하이 부예청은 원래 휴대폰 도매를 하던 곳인데 그때 마침 도매에서 소매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그런데 소매를 하려면 자기 브랜드와 트래픽, 사람들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체 사이트와 콘텐츠가 필요했다. 나는 그 기회를 잡았고 모듈로 나눈 서비스 메뉴판까지 따로 만들어 보냈다.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얼마인지 적어 두고 표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휴대폰 상가에 가 본 사람은 안다. 그곳에는 휴대폰 가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RuRu의 장사는 폭발적으로 잘되어 사이트가 하나씩 하나씩 열렸다. 그녀는 푸단대학(复旦大学)에 다니던 남동생까지 불러들여 이 사이트들의 콘텐츠를 오래 관리하게 했고, 그것도 또 한 몫의 수입이 되었다.
"나는 동생에게 뭔가 사 주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옷, 컴퓨터, 먹을 것, 쓸 것, 학비까지 다 내가 줬다. 동생 친구들은 걔가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 하하하." RuRu에게는 타고난 모성적 강인함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한편 도타(DOTA)가 떠오르면서 RuRu는 e스포츠에 점점 더 열을 올렸다. 게다가 우한은 스타크래프트 시대부터 e스포츠 분위기가 짙은 도시여서 그녀가 아는 선수와 인재도 점점 늘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들 가난했고 프로화도 되어 있지 않아서, 그녀는 자주 PC방에 가서 사람들에게 닭다리를 사 줬다.
"나는 남이 어려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돕는 사람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 손해도 많이 봤고 친구도 많이 얻었다."
러시아 팀 Rush3D가 RuRu의 인생을 바꾸다¶
2007년, 러시아의 강팀 Rush3D가 초청을 받아 중국에 교류전을 하러 왔다. 팀에는 갱킹의 왕으로 불리던 V신 Vigoss와 세계 제일의 1대1 고수로 통하던 PGG가 있었다. RuRu는 이 팀이 중국 방방곡곡을 휩쓸고 상금과 관심을 실컷 챙긴 뒤 유유히 떠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당한 쪽에는 우한의 가까운 친구들도 많았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났다.
"그때 바로 팀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들을 못 이길 리 없다고 봤다. 그런데 돈도 모자라고 자원도 없고 e스포츠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방 하나 메고 상하이로 갔다. e스포츠 운영을 배울 기회를 찾고 싶었다."
RuRu가 일자리를 구한 과정도 별났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녀는 WCG 중국 지역을 어느 회사가 맡고 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NeoTV였다. WCG 감독이 왕줴(王珏)라는 것을 알아내고 주소를 찾아 곧장 NeoTV 사무실로 쳐들어가서는, 안내 데스크에 왕줴와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안내 직원이 왕줴에게 알렸다. 마침 왕줴도 사람을 뽑던 참이라 별생각 없이 RuRu를 만났고, 이야기가 네다섯 시간 이어졌다. 왕 감독은 이 젊은 여성이 e스포츠에 열정이 있고 전문 기술도 갖췄으니 괜찮다고 보고 그대로 채용했다.
NeoTV는 월급 2,800위안을 줬고 맡은 일은 영상 패키징과 웹사이트 디자인이었다.
일자리는 그렇게 구해졌다.
이때 RuRu는 아직 대학 3학년으로 졸업 전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월급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낮에는 무대 앞뒤의 온갖 경험을 죽기 살기로 배웠고, 퇴근하면 계속 남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팀 자금을 모았다.
"NeoTV에서 보낸 2년 동안 나는 많이 자랐다. 특히 무대 뒤 전체를 알게 된 것이 그렇다. WCG 대회가 중국에서 어떻게 굴러가는지, 여러 영상 프로그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다 겪었고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RuRu는 이 시절을 고마워한다.
RuRu는 상하이에 온 처음의 뜻도 잊지 않았다. 2007년 말, NeoTV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그녀는 그동안 홈페이지를 만들며 모은 돈으로 바오산(宝山)에 복층 주택을 빌려 7L 팀을 만들었다. 7L이라는 이름은 당시 RuRu에게 홈페이지 일감을 주던 '치롄왕(企联网)'이라는 회사에서 왔다.
7L 진용: LongDD, BurNing, PD, 단처(单车), DGC
도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지금 봐도 쟁쟁한 진용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특히 덥수룩한 수염의 BurNing은 뒷날 도타판에서 'B신(B神)'으로 불렸고, LongDD를 비롯한 이들도 모두 뒷날 중국 도타의 기둥이 되었다.
다만 2007년, 도타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던 무렵의 이들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7L이 만들어지기 전 BurNing은 상하이의 CaNt 팀에 있었다. 그런데 CaNt는 자금 문제로 이미 버티지 못하는 상태였고 몇 사람은 살길을 찾고 있었다.
RuRu는 BurNing에게 월급 3,000위안을 제시했다. 지금 들으면 많지 않을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업계 최고액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상금이 걸린 도타 대회조차 드물었다.
석 달 동안 합숙 훈련을 하면서 RuRu는 아무도 어떤 대회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출근 시간을 빼면 온종일 이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2008년 3월, Rush3D가 또 돈을 벌러 왔다. 우리는 기회를 잡아 단번에 이름을 알렸다. 연습 경기에서 사흘 내리 그들을 이겼다. 7L은 중국 도타의 자랑으로 불렸고, 많은 중국 플레이어가 CNDOTA도 아주 강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RuRu는 이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7L은 Rush3D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중국 팀이었다. 특히 2009년 톈이배(天翼杯)에서 7L은 PS로 이름을 바꾼 Rush3D를 이겼다. 유럽 팀은 신이라고들 여기던 시절에 이 승리는 중국 사람들에게 큰 자신감을 줬고, 많은 신인이 도타 세계 제패의 여정에 뛰어들도록 북돋웠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 위기가 RuRu의 꿈을 완전히 깨뜨렸다. 업체마다 제 앞가림을 걱정하던 대불황기에 RuRu는 자기 저축이 모두 타 없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수익 모델이 없던 7L 팀은 곤경과 다툼에 빠졌다.
"그때 7L을 굴리는 데 한 달에 3만 위안쯤 들었다. 금융 위기 전에는 낮에 출근하고 밤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팀을 떠받칠 수 있었다. 그런데 금융 위기 뒤에는 홈페이지 주문이 갑자기 끊겼다. 사이트 하나에 500위안까지 값을 내려도 주문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RuRu는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이 방식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급여를 주지 못하자 선수들의 불만이 터졌고, 거의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새 후원사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RuRu는 앞으로 상금을 5대 5로 나눌 수 있겠느냐고 선수들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8대 2, 곧 팀이 2할만 가져가는 것만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RuRu는 몹시 서럽고 화가 났다.
"나는 그때 최고의 급여와 훈련 환경을 이미 제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공을 들였고 날마다 그렇게 지쳤다. 이 클럽이 계속 존재하고 건강하게 굴러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이해해 주기는커녕 나를 욕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나서 그 분배 비율을 바로 거절했고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RuRu와 선수들의 이야기는 결국 틀어졌고 DGC를 빼고 모두 떠났다. 한 시대의 전설이 될 수도 있었던 7L 팀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일을 돌이키며 RuRu는 무척 후회한다. 자기가 그때 너무 강경하게 처리했다고, 사실 많은 일은 다시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때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달이 나가는 돈과 들어오는 돈을 다 펼쳐 놓고 이야기했다면 이 일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화가 나 있었다. 이렇게 힘든데 배신까지 당한다고 여겨 소통을 끊어 버렸다. 너무 미숙했다." RuRu는 몹시 아쉬워했다.
7L의 실패는 RuRu에게 새로운 생각을 열어 줬다. 중국 도타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팀 하나로는 안 되고, 모두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CDEC의 탄생¶
2009년 6월 22일 CDEC가 만들어졌다. 정식 명칭은 China Dota Elite Community, 곧 중국 도타 엘리트 연맹이다. 도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모를 수 있는데, CDEC의 핵심은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매칭 시스템이다. 선수들이 토막 난 시간을 충분히 쓰면서 언제든 수준 높은 경기를 시작해 훈련량을 크게 늘리고, 그럼으로써 중국 도타 선수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전에 프로 팀이 훈련하려면 단장이 사람을 붙잡고 직접 경기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실력도 있고 너와 붙어 줄 마음도 있는 팀은 아주 드물었다. 하루에 수준 높은 BO3, 곧 3판 2선승제를 두 번 잡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팀을 못 잡으면 그 시간은 그냥 버려졌다. 내가 CDEC를 만든 것은 프로 선수가 언제 어디서든 경기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개인 전적에 따라 팀을 나누고 서로 다른 클럽 사람들이 섞여서 하니 전술을 감춰야 할 걱정도 없었다. 여기서는 자기 생각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CDEC는 그 시대의 래더, 곧 개인 랭킹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처음에 IHPA 연맹이 GG 플랫폼을 기반으로 굴리던 점수 시스템을 썼지만 기능이 아주 제한적이었다. RuRu는 기술 쪽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저우슝펑(周雄峰)을 찾아가 손봐 달라고 부탁했다.
저우슝펑이라는 이름은 대중에게는 낯설지만 정보 보안 쪽에서는 이름이 높다. 그는 중국의 이름난 해커 조직 0x557의 일원이고 알리바바의 24번째 직원이며, 판구(盘古) 탈옥의 고참 기술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자기 제자 Darkmage를 소개해 RuRu를 돕게 했다. 이 사람은 QQ를 역컴파일해 사흘 만에 QQBOT, 곧 QQ 봇을 만들어 냈다. QQ 단체 대화방 안에서 자동 매칭, 점수 순위, 리그 승강 같은 기능을 굴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서버는 0x557의 고수 La0wang이 지원했고 프런트엔드 커뮤니티는 RuRu가 만들었다.
초기 CDEC의 이용 방식은 이랬다. 선수는 QQ 번호로 게시판에 가입하고 CDEC의 QQ 단체 대화방에 들어가 정해진 경기 신청 명령을 입력하면 되었다. 그러면 QQBOT이 실력이 비슷한 다른 아홉 명을 두 진영으로 짜고 서버를 세운 뒤 비밀번호를 알려 줬다. 게임을 열고 그대로 들어가면 끝이었다.
경기를 마치면 시스템이 게임 안에서의 활약에 따라 점수를 매겼다. 몇 번 자리를 맡았는지에 따라 따로 점수를 매길 수도 있었다. 특히 주장 평가 항목을 뒀는데, 모두가 투표로 주장을 뽑으면 시스템이 그 사람의 통솔력을 기록했다. 이것은 뒷날 클럽이 인재를 뽑을 때 참고할 데이터가 되었다.
CDEC에서 시즌 TOP10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는 지도자급 강자였다.
대회 쪽에서 CDEC는 마스터 리그, 엘리트 리그, 예비 리그 같은 계단식 리그 등급을 뒀다. 신인은 아래 리그부터 시작해 점수와 경기 결과에 따라 올라갔다. 리그는 2주마다 점수를 지우고 다시 시작해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었다.
RuRu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스템은 나오자마자 큰 환영을 받았고 중국 도타 프로 선수들의 훈련량을 크게 늘렸다. 그런데 단점도 뚜렷했다. 어쨌든 QQ를 역컴파일해 만든 시스템이다 보니 안정성이 그리 좋지 않아서 새벽 두세 시만 되면 접속이 끊겼다. 그러면 다들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일어나서 원격으로 서버를 다시 켰다."
그 뒤 몇 해 동안 RuRu는 시스템을 더 안정적이고 쓰기 편하게 만들려고 전담 팀을 꾸려 CDEC의 프로그램을 새로 짰다. 이용자는 웹 페이지에서 클릭만으로 예전 기능을 다 쓸 수 있게 되었고 데이터도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이것이 지금의 VPgame이다. 그 사이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펼치지 않는다.
RuRu는 어떻게 LGD에 들어갔나¶
2010년, 우성(伍声), 곧 2009가 RuRu를 찾아와 친구 한 사람이 클럽의 VI 디자인을 한 벌 만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RuRu는 아주 흔쾌히 받아들였다. 2004년부터 그녀는 팀 로고를 열몇 개나 디자인해 줬고 DK 팀의 초기 로고까지 만든 적이 있어서 이런 일은 손에 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 이 사람은 요구가 유난히 많았고 게다가 꼭 MSN으로 요구 사항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요구를 맞추려고 인쇄 기술까지 공부했다. 사실 명함 같은 것들이었다. 어쨌든 끝까지 다 만들어 보내 주고 나는 그 일을 잊었다."
RuRu는 이어서 말했다. "몇 달 뒤에 갑자기 09가 연락해서, 지난번 그 디자인 값을 주는 것을 잊었다며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돈은 됐다고, 작은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09가 그 사람이 LGD 팀의 구단주라고 알려 줬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이 와서 LGD 팀의 단장을 맡을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좋다고 했다."
RuRu는 그렇게 LGD 팀의 단장이 되었다. 급여는 한 푼도 없었지만 무대 뒤의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재무, 미디어, 게다가 타오바오 가게 운영까지였다.
이때 RuRu는 광저우(广州)에서 LGD 팀이 있던 톈진(天津)으로 막 옮겨 와 광고 미디어 회사에 들어가 있었다. 낮에는 광고 일을 하고 밤에는 LGD 일을 했다. 타오바오 가게는 혼자 꾸려서 LGD 티셔츠를 팔았는데 디자인도 제작도 촬영도 발송도 다 직접 했다. 옷의 인쇄 품질을 더 좋게 하려고 온갖 인쇄 기계 기술까지 공부했다.
이런 것은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RuRu가 다달이 구걸하듯 여기저기 돈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는 점이다.
LGD의 구단주는 돈을 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을 대는 쪽은 그의 친구 몇 사람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라오간뎨(老干爹) 고추 소스를 인수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다달이 구단주가 RuRu에게 몇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면 RuRu는 그 사람들 뒤를 쫓아다니며 돈을 받아 냈다.
"난처했다. 남이 밥 먹으면 따라가고 걸으면 따라가고 어디를 가든 따라가고 집 앞을 막고 섰다. 어쩔 수 없었다. 팀에 급여 줄 돈이 없었으니까. 타오바오 가게는 한 달에 아무리 잘 벌어야 5,000위안이었다." RuRu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게다가 IG 팀이 선수를 빼 가서 YYF, Chuan, CH, 830이 떠났다. 클럽에는 ZSMJ와 나만 남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그렇게 빼앗겨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계약서를 다 준비해 뒀는데 구단주가 선수와 계약하기를 스스로 마다했으니까." RuRu는 답답해했다.
이틀 뒤 RuRu가 집에서 샤워를 하는데 욕실의 강화유리가 갑자기 깨졌다. 수많은 파편에 맞아 온몸에 상처가 났고 특히 다리는 열몇 바늘을 꿰맸다. 불행은 겹쳐서 왔다.
그 뒤 ZSMJ가 새 선수 몇 명을 LGD로 데려와 당시 진용은 이렇게 되었다.
xiao8, YAO, ZSMJ, DDC, DD
그러나 LGD의 불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2011년 설이 다가올 무렵 구단주가 갑자기 사라졌다. 회사 장부는 4만 7,000위안 넘게 마이너스였다. RuRu는 석 달 치 급여를 자기 돈으로 메웠고 이제 돈이 없었다. 사람들은 구단주가 약속한 연말 상여금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RuRu는 그해 7L 팀 때와 같은 난처한 처지에 다시 놓였다. 게다가 온몸에 상처가 있어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통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아주 예쁜 후원 유치 PPT를 만들었다. 광고 회사에서 배운 광고 단가표 만드는 경험을 전부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수많은 회사에 전화를 걸어 후원을 부탁했다. 온갖 음료 회사와 식품 회사, 이름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다 걸었고 싼이중공업(三一重工) 마케팅 부서에도 걸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해커 자료 더미에서 360의 창업자 저우훙이(周鸿祎)의 개인 전화번호를 찾아냈고 통화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RuRu는 LGD가 해체되지 않을 기회라면 하나하나 미친 사람처럼 찾아다녔다. 이 전화들은 결국 다 흐지부지되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무너지기 직전이던 2012년 초에 타오바오 게임과 협력을 맺었다.
사실 그 사이에 RuRu는 부유층 2세들의 후원을 여러 번 거절했다. 부유층 2세 구단주가 술에 취해 기어이 경기에 나가겠다고 하는 일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미드에서 섀도우 핀드(影魔, Shadow Fiend)를 골라 0킬에 10데스 넘게 했다. 다들 화가 나도 말을 못 했다. 그것도 중요한 온라인 경기였다. 나는 이 방식은 도저히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RuRu는 분해하며 말했다.
"타오바오 게임의 후원을 따낸 뒤에 나는 LGD 선수들에게 나와 함께 항저우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할 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조건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들 나를 따라 항저우로 갔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무척 고맙다." RuRu는 감격해 두 손의 엄지를 세웠다.
WDC 8강에서 멈춘 그날 밤, ZSMJ가 눈이 벌게진 채 xiao8을 찾아와 마음이 여기에 없다고, 한동안 쉬려 한다고 말했다.
2012년 ZSMJ가 갑자기 팀을 떠난 뒤 RuRu는 WE 팀에서 4+1 조건, 곧 반년 안에 우승하면 5만 위안을 더 주는 조건으로 Sylar를 데려와 실력이 탄탄한 팀을 짰다. LGD 팀은 TI2에서 크게 빛나 17연승으로 승자조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에 결정적인 한 판에서 초보적인 실수를 여러 번 저질러 경기를 내줬고 멘털까지 무너져 3위에 그쳤다.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2014년 xiao8이 갑자기 NB 팀으로 갔고 다른 선수들의 계약도 다 끝나 YAO만 남았다. e스포츠판 거의 전부가 LGD가 해체될 것이라고 여겼다.
"함께 일하던 생중계 플랫폼까지 우리가 해체될 것이라고 여겨서 서명하던 계약서도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나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녔고 알리바바의 십팔나한(十八罗汉)까지 한 사람씩 다 찾아가 봤다. 선수를 몇 명 다시 잡고 싶었다. 그때 Sylar는 이미 다른 팀에 가 있었지만 그 시절 그의 상태는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싼 값에 그를 잡기로 했다."
2014년 가을, 생중계 플랫폼이 막 나오던 시절에 RuRu는 70만 위안에 Sylar와 2년 계약을 맺고 싶어 했다. Sylar는 2년은 너무 길다며 1년만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국 양쪽이 한 걸음씩 물러나 1년 반으로 계약했다. 나는 70만 위안을 한 번에 다 줬고 재계약을 하면 100만 위안을 주기로 했다. 2016년 3월에 Sylar가 아시아 챔피언십을 마치면 떠나겠다고 했는데 마침 1년 반 계약이 끝나는 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그를 대신할 선수를 하나 구해 뒀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나니 Sylar가 다시 남고 싶어 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을 구해 둔 뒤였고, 그는 몹시 화가 나서 내 사생활을 폭로하겠다고 웨이보에 올렸다." RuRu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e스포츠 첫 여성 구단주, RuRu 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