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U9, 거침없다¶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二十一 U9,凶猛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2월 11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35193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이것은 대단히 사나운 이야기다. uuu9.com이 어떻게 자랐는지 읽어 내려면 먼저 그 보스인 류량(刘亮)을 읽어 내야 한다.
류량은 지금 360유주(360游久)의 CEO이고 1980년 산시성(陕西省) 시안(西安)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관중(关中) 렁와(冷娃)의 얼굴이다. 렁와는 산시 사람들이 관중 평원의 무뚝뚝하고 억센 젊은 사내를 부르는 말이다. 둥근 얼굴에 위로 째진 봉황 눈, 중간 키에 순박하고 다부진 몸. 병마용(兵马俑)을 닮지 않았는가? 관중 렁와의 성격도 특징이 뚜렷하다. 하는 일에 고집이 세고 외곬이며 겉은 차갑고 속은 뜨겁다. 류량은 이 모두에 들어맞는 듯하다. 다만 앞으로 벌어진 귀와 빛을 모으는 듯한 작은 눈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비쳐 나온다.
류량은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머리도 잘 돌아갔다. 오락실의 아케이드 기계 대부분을 동전 하나로 끝까지 깰 수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면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말없이 흩어질 정도였다. 다만 나이가 조금 있는 동네 건달이 굳이 하겠다고 나서면 그는 자리를 내줬다. 이 작은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렁와이기는 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눈앞의 손해는 보지 않는 노련한 여우이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는 싫어하면서 머리는 잘 돌아가던 류량은 경찰학교에 들어갔다. 한번 대담하게 가정해 보겠다. 류량이 홍콩에서 태어났다면 이 줄거리대로 잠입 수사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뒤에 벌어진 일들로 보면 그가 보여 준 재치와 유연함, 담이 크면서도 세심한 태도, 정해진 수순대로 가지 않는 방식은 정말 잠입 수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류량은 비교적 조용한 도시 시안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학교 생활이 몹시 지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온갖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고, 경찰학교를 나와 반년 동안 경찰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결국 가족이 그를 억지로 군대에 보냈다. 그때 군대는 인터넷 중독 교정반처럼 쓰였다.
물론 머리가 잘 돌아가고 처세에 밝은 류량은 군대에서도 잘 지냈다. 트럭 운전을 배울 기회까지 따냈다. 큰 집단군에서 운전을 배울 사람으로 뽑히는 것은 대단히, 대단히 드문 기회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미 거침없이 달려들어 차지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2000년 류량은 제대했다. 선전에는 황금이 널려 있다는 말을 듣고 두말없이 그리로 쳐들어갔다. 광저우에 도착하고서야 광저우에서 선전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아직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전에 들어가는 것도 지금처럼 신분증 하나 내밀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특구 통행증을 만들어야 했고, 광저우와 선전 사이에는 철조망을 두른 경계선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장애물도 사나운 류량 앞에서는 별것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차를 타고 광저우와 선전의 경계까지 가서 초소를 피해, 철조망을 두른 높은 담을 따라 사람이 적은 곳까지 걸어간 다음 그대로 넘어갔다. 어떻게 넘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정말 모른다. 자료에 적혀 있지 않으니 나중에 그를 만나면 자세히 물어보겠다.
그런데 넘어가서 보니 눈물이 날 뻔했다. 맞은편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였다. 그나마 류량은 군대를 다녀와 몸이 단련되어 있었다. 10여 킬로미터를 달리고서야 사람을 봤다. 그러니 지금이 좋기는 좋다. 광저우에서 선전까지 고속철 표를 끊으면 3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선전에 왔으니 일을 찾아 돈을 벌고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자기가 할 줄 아는 기술이 참 애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어느 컴퓨터 학원의 전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전단을 돌리는 일조차 류량은 남보다 마음을 썼다. 남들이 하루에 800장을 돌릴 때 그는 2,000장 넘게 돌렸다. 한 달에 900위안이었는데 그는 이것이 꽤 큰돈이라고 여겼다.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수당이 70위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서 한마디 끼워 넣겠다. 왜 외지에서 온 사람 중에 일을 착실하게 하는 사람이 많을까? 대도시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자기가 전에 살던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하려 하고 무엇이든 배우려 한다.
한동안 전단을 돌린 뒤 류량은 원장에게 승진을 요구했다. 원장은 그가 남보다 일을 열심히 한다고 보고 청소 담당으로 승진시켰다. 류량은 그때 청소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신이 나서 집에 전화를 걸어 승진했다고 알렸다. 나중에야 그것이 매일 수업이 끝난 뒤 교실을 치우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밖으로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 그는 날마다 교실 맨 뒷줄에 엎드려 자면서 선생이 수업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나는 그가 분명히 수업을 듣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뒤에 컴퓨터를 가르치던 선생 하나가 갑자기 그만두자 류량이 원장에게 달려가 자기가 가르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생이 수업에서 하는 말을 다 외운다고 하면서 원장 앞에서 한 대목을 외워 보였다. 원장이 들어 보니 제법 그럴듯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두 번째 승진을 이뤘고 월급도 900위안 남짓에서 3,000위안 넘게 올랐다.
선전에서 반년 동안 컴퓨터를 가르친 뒤, 사나운 류량은 시안으로 돌아왔다. 자기 실력이면 컴퓨터 학원 하나쯤 열 수 있겠다고 여긴 것이다. 무엇을 무서워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는 젊은이의 배짱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곧장 학교 하나를 찾아가 학교 선생들에게 컴퓨터 기술을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학교 컴퓨터실이 자주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수업이 없을 때 학생 컴퓨터 강좌를 열면 어떻겠느냐고, 한 사람에 50위안만 받겠다고 제안했다. 학교는 좋은 일이라고 보고 그러라고 했다. 류량은 다시 선생들을 찾아가 학생 한 명을 데려오면 5위안을 주겠다고 했다. 그 결과 그해 여름방학에 류량은 학교 두 곳에서 30만 위안을 벌었다.
30만 위안이면 2001년 시안에서는 시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자리도 나쁘지 않은 집이었다. 이것이 류량의 첫 종잣돈이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이 일 저 일을 옮겨 다녔다. 개인 사이트 운영자, 사이트 트래픽 판매, 사용자 유입 판매 같은 것들이었다. 2003년 무렵 중국 인터넷의 두 번째 봄에 벌어진 광기와 혼란을 그는 거의 다 겪었다. 이것이 운명이다.
류량과 유주왕¶
2004년 류량이 《미르의 전설(传奇)》 사설 서버(私服) 사업을 정식으로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자산이 1,000만 위안대였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게임은 여전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워크래프트 3(WAR3) RPG도 그 사랑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워크래프트 3 지도 편집기로 직접 RPG 지도를 만들어 보기까지 했다. U9 사이트와 닿은 것도 이 무렵이다.
U9의 창립¶
U9왕의 창립자는 후이린(灰磷)이라고 한다. 지금도 U9 포럼의 사용자 번호 1번은 그의 것이다. 대단히 조용한 사람이어서 U9의 오래된 사람들조차 그를 잘 모를 정도다. 2004년 U9은 아직 무료 공간에 올려져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계속 늘었다. 그래서 U9의 모든 것이 한계에 걸려 있었다.
유주왕 워크래프트 RPG¶
이때 류량의 사업은 마침 순조로웠고 손에 쥔 돈도 넉넉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U9을 사들여 유주왕 워크래프트 RPG(优久网魔兽RPG)로 이름을 바꿨다. 유주라는 이름의 첫 글자는 그때 优였고, 2008년에야 지금 사이트가 쓰는 游 자로 바뀌었다. 그는 이 사이트만 맡는 회사로 쉐쥔 과기 유한공사(雪君科技有限公司)를 세웠고, 이 회사는 2009년에 산시 유주 디지털 과기 공사(陕西游久数码科技公司)로 이름을 바꾼다. 몇 사람을 뽑아 관리를 맡긴 뒤 류량은 이후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당시 U9을 사들인 것은 자기 취미였고 e스포츠를 조금 거드는 일이었으며 돈도 그리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량은 전혀 몰랐다. 무심코 놓아 둔 이 한 수가 뒷날 자기를 살리는 지푸라기가 될 줄은.
후이린은 인수된 뒤 뒤로 물러났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관리자 QQ 대화방에 있었고 가끔은 포럼에서 글에 답글을 달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U9 회사는 달마다 급여 명세를 만들 때 후이린 몫의 겸직 급여를 넣는다. 여러 대에 걸친 책임자들이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 왔다.
워크래프트 3 RPG가 여물다¶
2005년 무렵 주류 e스포츠 종목은 이미 워크래프트 3의 대전 방식이었다. 이때 YollinY 클럽은 막 IGE의 후원을 받아 WE 클럽이 되었고, WE의 쑤하오(苏昊)와 Sky는 이미 중국 e스포츠 판에서 가장 정상급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워크래프트 3 대전은 입문 문턱이 높고 조작이 복잡해서, 보는 사람은 많아도 하는 무리는 크지 않았다. 그에 견주면 워크래프트 3의 RPG 지도는 훨씬 가볍고 선택지도 많았다. 그래서 플레이어 무리가 계속 커지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감회에 젖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2005년 가장 인기 있던 RPG 지도로는 《환샹췬샤좐(幻想群侠传)》, 《성춘다카오옌(生存大考验)》, 《진삼국무쌍(真三国无双)》, 《서우후야뎬나(守护雅典娜)》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중 진삼국무쌍은 U9이 연 첫 번째 포럼 전용 구역이고, 이 구역은 진삼의 제작자 우허우샹룽(武侯降龙)이 신청해서 만들어졌다. U9 포럼에서 잡담 글을 올리며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다른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BYB82다. 2005년 말 U9은 도타 포럼을 열었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하겠다.
이때의 U9 사이트는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매출은 사실상 없었다. 실제로 e스포츠 전문 사이트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문제는 8년이 지난 지금도 흔한 일이다.
당시 U9의 가장 큰 수입은 구글 광고 띠에서 나왔고 액수도 아주 적었다. 류량은 돈이 있었지만 U9을 넉넉하게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늑대를 키우는 원칙을 지켜 U9의 기본 지출만 대 줬고 U9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달리고 싶으면 먼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기 위해 2005년 U9 팀은 정말 한바탕 힘을 쏟았다.
먼저 U9을 무료 공간에서 옮겨 냈다. 류량 자신이 사설 서버를 운영하고 있어서 서버와 대역폭이 넉넉했으므로 이 문제는 금방 풀렸다. 손만 뻗으면 되는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플레이어에게는 더없이 큰 혜택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게임 소식은 안 볼지 몰라도 최신 RPG 지도는 늘 내려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플레이어에게 절대적인 수요였고, 이렇게 해서 아주 많은 사람이 U9을 알게 되었다.
이어 U9은 "중국 워크래프트 RPG 창작 지도 사이트"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때부터 원칙을 세웠다. 창작 지도만 밀고 IMBA 지도, 곧 균형이 무너진 지도는 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창작 지도 제작자를 많이 길러 냈고 동시에 이 게임의 수명도 지켜 냈다. 그전의 《레드 얼럿(红色警报)》은 IMBA 지도가 넘쳐나면서 무너졌다.
이 계획에 따라 2005년 U9은 하오팡(浩方)에서 《톈디제(天地劫)》와 《주중빙치(九种兵器)》의 제작자를 데려왔다. 여기에 U9 자체 제작자 몇 사람을 더하고 GA 고블린 연구원(GA地精研究院)까지 흡수해 퉁모 공방(通魔作坊)을 꾸렸다. 지금도 U9 기술 부서 문에는 퉁모 공방과 고블린 연구원의 명패가 각각 걸려 있고, 사장실 문패에는 왕의 계곡(国王之谷)이라고 적혀 있다. 워크래프트 3 RPG 창작 지도의 시기가 U9에 얼마나 깊은 문화의 자국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지도를 풍성하게 하고 다운로드를 다듬었으니, 다음은 새 사용자 무리를 키울 차례였다. 새 사용자를 어떻게 넓힐 것인가?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은 입문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U9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지도 설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플레이어 컴퓨터에서 워크래프트 3를 스스로 찾아내 설치까지 끝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해서 컴퓨터를 잘 모르는 새 사람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어서 지도 제작 강좌와 도구 사용법을 적극적으로 알렸고, 특히 지도 용량 제한을 뚫는 패치를 내놓았다. 블리자드는 지도 편집기에 제한을 걸어 완성된 지도가 3MB를 넘지 못하게 해 뒀는데, 이 패치가 그 제한을 뚫어 사람들이 더 많은 생각을 지도에 담을 수 있게 했다. 지도 제작자들의 창작 열기가 달아올랐고 곧 200MB짜리 지도까지 나왔다. 이 정도면 거의 작지 않은 게임 하나다.
이 조치들은 곧바로 U9에 실제 보상으로 돌아왔다. U9은 개인 사이트에서 1,000만이 넘는 페이지뷰를 가진 워크래프트 3 RPG 전문 포털로 빠르게 올라섰다. 기술 인력이 통계를 내 보니 당시 U9은 플레이어 한 사람당 평균 15번의 클릭이 나왔다. 사용자가 사이트에 붙어 있는 정도가 대단히 높았다는 뜻이고, 광고 클릭에서 나오는 수익도 늘기 시작했다.
U9 안의 작은 사회¶
RPG를 하는 무리는 나이대가 비교적 낮았으므로 초기 U9 포럼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 자주 터졌다.
《청하이 3C(澄海3C)》에는 서로 따로 일하는 제작자가 둘 있었다. 쓰선(死神)과 JJJ8이다. 쓰선은 죽음의 신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U9은 두 사람의 작품을 모두 밀어 줬는데, 뒤에 쓰선이 자기 사이트를 만들고 그것을 유일한 공식 사이트라고 내걸었다. 그리 떳떳한 처사는 아니었으므로 U9은 JJJ8만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역사는 그렇게 갈림길로 들어섰다. 이 이야기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고, 다음 이야기는 좀 섬뜩하다.
진삼 시기에 U9에는 큰 조직이 둘 있었다. 하나는 환칭(幻情)이고 하나는 숫자(数字)다. 이 두 조직에는 지도 제작자뿐 아니라 플레이어도 많았는데 서로 도무지 함께 설 수 없어 하루 종일 다퉜다. 2005년 포럼에서 "진삼 미드 법사 솔로" 대회를 연 적이 있는데, 어떤 플레이어가 다른 사람과 지면 새끼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정말로 져서 정말로 잘랐고, 사진을 찍어 포럼에 올렸다. U9은 이런 일이 너무 지나치다고 보고 그때부터 포럼에서 비슷한 내기를 거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짚어 둘 것은, 손가락 자르기 내기나 부자 내기 같은 것들이 지금 e스포츠 판의 문화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 내기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기다.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이런 분위기를 보면 e스포츠 무리 전체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여물고 자라기까지는 시간이 얼마간 필요하다.
U9의 도타¶
2005년 말 U9이 도타 전용 구역을 연 뒤에야 경쟁이 진짜로 시작되었다. U9은 RPG에서 물려받은 MOBA 시장 점유율이 컸지만, 뒤늦게 올라온 사이트와 조직 몇이 이미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운 U9은 포기하지 않았고 도타 중국어화 전쟁이 그렇게 막을 올렸다.
2005년 HTJ가 자기가 중국어화한 도타를 U9에서 처음 내놓았고 미친 듯한 다운로드가 이어졌다. 그때부터 중국어화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왜 중국어화를 두고 다퉜을까? 버전이 갱신되면 다들 최신 버전 도타를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이트가 중국어화 패치를 가장 먼저 내놓느냐에 따라 그 사이트의 다운로드 수가 상대의 몇 배,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시장 점유율이 많은 상업적 보상을 결정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로 시간이 곧 돈이다, 친구여.
당시 U9의 가장 큰 경쟁 상대는 DCN, 곧 도타 중국어 사이트(DOTA中文网)였다. DCN에는 중국어화 팀이 둘 있어서 동시에 작업했으므로 U9에게는 압박이 컸다. 버전이 갱신될 때마다 류량은 다들 밤을 새워 일하자고 불러 모으기 일쑤였다. 겨루는 것은 오로지 속도였다. 그렇게 U9의 속도는 올라갔지만 실수도 나왔다. 한번은 U9의 중국어화에서 섀도 핀드(影魔)의 이동 속도를 100 빠르게 적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욕을 하러 왔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뒤에 DCN이 원칙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도타에 들어갈 때 뜨는 화면에 다른 도타류 게임의 광고를 넣은 것이다. 아이스프로그(IceFrog)는 이 일에 몹시 화가 나서 더는 DCN과 함께 일하지 않았고, 이 경쟁도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2006년에 이르러 U9에서 RPG 지도를 만드는 일은 돈이 되는 일이 되었다.
U9은 지도 제작자와 계약하는 방식을 내놓았다. 인터넷 문학 사이트가 작가와 계약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은 지도 제작자가 겸업으로 지도를 만들면 한 달에 몇천 위안의 급여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단숨에 뛰어난 인재를 많이 끌어들였고 꽤 괜찮은 지도도 여럿 쏟아졌다. 《셴즈샤다오(仙之侠盗)》나 나루토(火影忍者) 계열 지도 같은 것들이다.
동시에 U9의 지도 제작 팀은 여러 해 쌓은 기술 경험을 통해 워크래프트 3의 지도 편집기를 속속들이 파악했고 이전의 여러 기술적 한계를 뚫었다. 편집기로 연속기가 들어간 KOF 게임과 1인칭 슈팅 게임을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셴젠치샤좐(仙剑奇侠传)》 같은 대작 게임을 그대로 복각해 낸 사람까지 있었다. 정말 막을 수 없는 창의력이었다.
플레이어는 U9 포럼에서 지도 제작 기술을 계속 배우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고, U9은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기까지 했다. 상상해 보라.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논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성취감이겠는가.
덧붙여 말하자면, 그 시절 RPG 지도 제작자 가운데 많은 이가 지금은 큰 게임 회사의 게임 메인 기획자가 되었다. U9이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U9은 승세를 몰아 도타를 겨냥한 제품을 잇따라 내놓았다.
먼저 도타 영웅 시뮬레이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U9 사이트 맨 위에는 시뮬레이터 하나만 있었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정보를 찾아보기에 대단히 편했고 방문자도 크게 늘려 줬다. 같이 내놓은 것으로 리플레이 분석기와 U9 슈퍼 리그(USL)가 있다. 이 대회는 시드 팀과 풀뿌리 팀을 두고 달마다 열렸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 이름난 도타 고수 가운데 많은 이가 이 대회에서 나왔다.
특히 짚어 둘 것은, U9이 중국 최초의 정식 도타 리그인 유주 리그(游久联赛)를 열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름난 해설자이자 진행자인 DC도 이 대회의 운영진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도타를 하는 사람은 하오팡 쪽에 더 많았지만 어떤 이유로 U9과 하오팡은 협력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U9은 그때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던 VS 플랫폼 쪽으로 돌아섰다. 바로 이 관계 덕분에 2006년 이후 VS 플랫폼은 자랄 기회를 얻었다. 2011년 U9은 11 플랫폼과 다시 손을 잡았고 양쪽 모두 큰 수익을 얻었다. 이 이야기는 이면사에서 앞서 쓴 대전 플랫폼 발전사 장에서도 언급했다.
이때의 U9은 이미 창작 지도에서 e스포츠의 여러 층위로 뻗어 있었다. 게임 운영, 대회, 스타 포장, 미디어가 그것이다. 2007년 GodLike 팀이 가장 바닥에 있을 때 그들을 사들일 수 있었다면 e스포츠의 전체 체계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해 U9은 자기 매출에서 안정된 방식을 아직 찾지 못했으므로 마음은 있었으나 힘이 없었고 GL 팀을 놓쳤다. 이 일은 U9에게 몹시 아픈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006년에서 2007년의 U9은 점점 커졌지만, 이 시기의 류량은 몹시 힘들게 지냈다.
2005년 사설 서버 판에서 발을 뺀 뒤 류량은 여러 가지를 해 봤다. 그중 가장 크게 손해를 본 것이 QQ예펑쾅(QQ也疯狂)이라는 제품이다. 이름은 QQ도 미친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용자를 대신해 QQ에 접속해 두어 QQ 등급을 올려 주는 것으로, 한 사람에 10위안이었다. 본래 시장성이 아주 좋은 제품이었지만 정식으로 돈을 받기 전에 텐센트가 알아차리고 등급 계산 방식을 바꿔 버렸다. 그런데 제품은 이미 다 깔린 뒤였다. 뒤에 류량이 각 지역 대리상에게 물어 준 돈만 1,000만 위안이 넘었고, 손에 남아 놀던 200여 대의 서버도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 이 한 번으로 그동안 번 돈이 거의 다 날아갔다.
그러나 류량의 사나움은 그의 삶이 평탄하고 밋밋하게 흐르지 않도록 정해 두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U9왕의 뜻밖의 부상, 그리고 17173 같은 온라인 게임 포털의 번성이 류량에게 희망을 보여 준 듯했다. 그는 계획을 세워 U9을 종합 게임 포털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 RPG 플레이어는 대부분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RPG를 하는 이유는 이 게임이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게임 사용자는 이 무리와 성격이 꽤 달랐다.
그래서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류량은 아주 애를 쓰면서도 아주 조급했다. 차를 팔고 집을 팔며 버텼다. U9 사이트의 트래픽은 제법 커졌지만 관심도를 돈으로 바꾸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때는 웹 게임 공동 운영이나 타오바오 가게 같은 방식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류량은 어둠 속에서 힘겹게 길을 찾았다.
사실 류량과 똑같이 갈피를 못 잡던 것이 당시 중국 e스포츠의 판 전체이기도 했다. 다들 거대한 관심도를 손에 쥐고도 그것을 어떻게 돈으로 바꾸는지 몰랐다. 돈이 없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는 뜻이고, e스포츠의 발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는 균형점이 있어야 한다.
2009년 류량은 쉰레이(迅雷)와 손잡을 기회를 잡았다. U9이 쉰레이에 게임 소식 콘텐츠를 대고 쉰레이는 U9에 사용자 트래픽을 보내 주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서로 모자란 것을 채우는 전략적 협력으로 양쪽 모두 큰 이익을 봤다. 뒤에는 쉰레이가 보내 준 트래픽이 RPG 쪽 트래픽을 넘어섰다. 묶음 방식의 광고 판매도 사이트 수익을 크게 끌어올렸다. U9은 같은 시기에 쿠6(酷6), 런런왕(人人网)과도 같은 유형의 협력을 벌였고, 그 결과 U9의 연간 수입은 해마다 200만에서 300만 위안이던 것이 2,000만에서 3,000만 위안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2010년 U9은 사이트 전체를 개편해 정식으로 게임 포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U9은 게임 포털로는 몹시 늦게 도착한 축이었다. 그런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은, 여러 경쟁 상대와 견줄 때 U9의 가장 큰 강점이 얼굴이 새롭고 뒤에 게임사가 없다는 점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178 뒤에는 퍼펙트 월드(完美)가, 17173 뒤에는 소후가 있었다. U9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다의 아이온(永恒之塔) 프로젝트 공식 협력 매체는 U9이었고, 뿌려진 설치 CD에는 모두 U9의 사이트 주소가 찍혔다. 리그 오브 레전드 북미 서버 전용으로 만든 U9 슈퍼 어시스턴트(U9超级助手)도 시장 점유율이 높아서, 리그 오브 레전드 중국 서버 테스트 기간에는 텐센트가 홍보를 거들어 주기도 했다.
2010년 류량을 가장 들뜨게 한 것은 스타크래프트 2의 출시였다.
류량은 블리자드 게임의 충실한 팬이었다. 특히 U9이 여기까지 자란 것을 보면, 그는 워크래프트 3 지도 편집기가 가져다준 모든 것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타크래프트 2에 딸려 오는 지도 편집기가 U9을 새로운 높이로 데려가리라고 믿었다. 류량은 몹시 흥분했다. 그는 회사 전 직원을 동원해 스타크래프트 2 전문 사이트를 만들게 했을 뿐 아니라 사무실에 커다란 현수막까지 걸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주에게 스타크래프트 2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류량은 여전히 그렇게 거침없다. 하기로 하면 대가를 따지지 않고 온 힘을 쏟는다. 지금 U9에는 열정이 있고 영광이 있으며 돈도 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e스포츠 사이트 하나에서 지금 이 자리까지 자란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히 드문 일이다.
2011년 말 유주는 360 세이프박스(360保险箱)와 합쳐져 360유주 베이징 과기 유한공사(三六零游久北京科技有限公司)를 세웠다. 류량은 360유주와 《정투 2(征途2)》의 공동 운영을 주도했고, 《첸쥔(千军)》의 월 매출은 곧 2,000만 위안을 넘겼다. 국내 대형 클라이언트 게임 공동 운영의 길을 처음으로 연 것이자 게임 쪽에서 360의 잠재력을 캐낸 일이었다.
동시에 유주는 여전히 게임 포털이기도 하다. 지금 있는 자원과 어떻게 통합해 관심도를 높이고 그것을 돈으로 바꿀 것인가가 류량과 360유주 사람들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올해 그들의 방향은 e스포츠라고 한다. 대회 취재팀과 U9 슈퍼 리그를 다시 가동할 계획이고 MOBA 주제 포럼까지 따로 내놓았다. 그들이 e스포츠 업계를 더 크게 밀어 주고 더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UUU9, 거침없다.
(주: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촹예방(创业邦)》 잡지 징제(境界) 칼럼의 류량 특집을 참고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2013년 8월 19일은 360유주왕의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중국 e스포츠에 크게 기여해 온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