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TI4 세계 챔피언이자 Newbee 주장, 장닝¶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十三 TI4世界冠军Newbee队长 张宁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4년 7월 28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810782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장닝(张宁)은 TI4 결승에서 이겼을 때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다고 했다. 친구들은 시상식 내내 그가 몽유병 환자처럼 보였다고 말했고 그도 정말 꿈을 꾸는 줄 알았다고 했다. 예전에는 남이 우승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우승 팀이면 어떨까 상상만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진짜로 우승을 한 것이다. 이튿날 잠에서 깨고 나서야 그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튿날 전 세계의 언론이 장닝이 속한 Newbee 팀이 미국 시애틀에서 TI4 《도타 2》 세계 챔피언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보도가 3,000만 위안이 넘는 그 상금에 관심을 집중했다.
돈 이야기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했으니 우리는 사람 이야기를 해 보자.
장닝은 음력 1989년 12월 14일 후난성 사오양(邵阳)에서 태어났다. 온라인 닉네임은 xiao8이다. 이 이름은 그가 《멍환시유(梦幻西游)》를 할 때 쓰던 닉네임 샤오샤오(小小)에서 나왔다. 도타를 하면서 VS 플랫폼에 이름을 등록하려니 xiao1부터 xiao7까지는 이미 다 등록되어 있었고 그래서 xiao8이 되었다.
장닝의 아버지는 건설 도급업자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다섯 살 위인 친형이 하나 있다.
이론대로라면 이것은 부잣집 아들의 이야기여야 했다. 장닝은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고 지금 어머니가 달마다 하는 주된 일은 여기저기 다니며 집세를 걷는 것이다. 그러나 장닝의 말을 빌리면 그의 부모는 중국의 오래된 교육 미덕 하나를 물려받았다. 인색함이다. 아니, 엄격함이다. 그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지주와 양바이라오(杨白劳)의 구도로 흘러갔다. 양바이라오는 가극 《바이마오뉘(白毛女)》에 나오는, 지주에게 빚으로 시달리는 소작농이다.
사실 초등학교 때 장닝의 성적은 아주 좋았다. 거의 늘 전교 1등이었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았으며 선생님마다 칭찬했고 부모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에게 약속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도 전교 1등을 하면 컴퓨터를 사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닝에게 정말 큰 유혹이었다. 그전까지 PC방에 놀러 가면 돈이 많이 드는 데다 아버지에게 끌려 나와 맞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결과는 전교 1등을 해냈지만 컴퓨터 이야기는 깨끗이 잊혔다. 어려서부터 맞고 자란 장닝은 드센 부모에게 이유를 물을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렇게 풀이 죽은 채 중학교로 올라갔으며 반항의 길로 들어섰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장닝은 몹시 말썽을 부렸다. 당신이 중학교에 다니던 때 선생님이 반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아이를 교탁 옆에 따로 앉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아이를 비웃지 말자. 그 녀석은 나중에 세계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장닝은 예전에 부모와 사이가 아주 나빴다. 아버지는 몹시 드세서 때리지 않으면 욕을 했다. 어머니는 말은 모질어도 마음은 여렸지만 그래도 장닝은 숨 막히게 살았다. 어릴 때 눌린 만큼 사춘기에는 더 크게 반항하는 법이다.
장닝은 그렇게 동네 불량배의 길로 들어섰다. 학교를 빼먹고 게임을 했으며 여기저기서 사고를 쳤고 주마다 부모가 학교에 불려 왔다. 200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는 학교를 쉬고 친구 서너 명과 함께 《멍환시유》 게임 대리 육성 작업실을 열었다. 달마다 비용을 빼고도 손에 1만 위안 넘게 떨어졌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열여섯 살짜리에게는 오히려 더 막막한 일이었다. 그 나이에는 별다른 필요도 없고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많이 벌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아버지가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가서 견문을 넓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겨 광둥성 중산(中山)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배우러 갔다.
집에서 멀어지자 오히려 공부가 잘됐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아주 좋아했지만 무척 외로웠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낯선 땅이라 주위에 친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마다 PC방에서 사오양 고향 친구들과 음성 채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후난의 친구들 사이에서 《진삼국무쌍(真三国无双)》이라는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으로 말하자면 정말 중국 도타 프로 선수들의 발원지다. 뒷날 이름을 날린 상당수의 e스포츠 프로 선수가 당시 진삼(真三)을 하던 시절의 상대이자 동료였다. 장닝은 여기서 뒷날 그의 인생 궤적에 큰 영향을 미친 상대 하나를 만났다. 주쓰마지(诸司马技) ZSMJ다.
2009년, 아직 진삼을 하고 있던 장닝은 이미 도타로 넘어간 ZSMJ가 우성(伍声), 곧 2009의 LGD 팀과 함께 쿠알라룸푸르 SMM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것을 봤다. 그때부터 그는 도타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반년 동안 진삼을 하면서 도타를 연습했다.
어쨌든 진삼 시절의 만만찮은 성적 덕분에 그의 전향은 곧바로 주목을 받았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ZSMJ였다. LGD에 갈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2009는 이미 은퇴했고 팀에는 주전이 한 자리 비어 있었다.
세계 챔피언의 후광을 두른 팀이었으니 장닝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VS 플랫폼의 최상위 방인 1번 방에서 한 달 동안 도타만 파고들었다.
이때 장닝은 스스로 목표를 하나 세웠다. 프로를 하겠다, 세계 챔피언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뒤에 LGD의 옛 선수 샤오츠(小池)가 갑자기 팀에 돌아오면서 장닝의 자리가 없어졌고 이 일은 그대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래도 장닝의 운은 끊기지 않았다. 또 다른 이름난 도타 프로 선수 xB가 장닝을 찾아와 LongDD 등이 있는 국내 강팀 청두 CH 팀에 들어오라고 청했다. 비행기표까지 끊어 줘서 그는 사오양에서 창사로 가 청두행 비행기를 탈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창사의 친한 친구 YAO가 장닝에게 남으라고 힘껏 권했다. 창사에서 새 팀을 하나 꾸리는데 그 지역의 자금이 넉넉한 사장이 돈을 대고 팀은 전부 고향 친구들로 채워지며 무엇보다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었다. 형제와 친구를 중히 여기는 장닝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렇게 뒷날의 Dream 팀이 만들어졌다.
당시 Dream 팀의 동료는 YAO, DD, LI, 라오수(老鼠), 장닝이었다. 라오수는 쥐라는 뜻이다.
한 사람당 1,500위안이었고 숙식은 제공되지 않았다. 그래도 장닝은 아주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친구들과 다시 모였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를 막 시작해 모든 것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팀을 꾸린 지 2주 만에 태국에 도타 대회를 하러 갔다가 첫 라운드인 16강에서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팀에게 탈락한 일이다. 그날 밤 다들 호텔에서 크게 울었고 밖에 나가 놀 마음도 나지 않았다.
국내 대회에서도 2위와 3위를 많이 했다. 머리 위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팀 하나가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팀이 EHOME이다. 2010년의 EHOME에는 820, DC, Burning, KinGJ 같은 고수들이 있었고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렸다. 장닝 일행은 1위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어리고 새로 생긴 팀이었으므로 다들 의욕이 넘쳤고 서로를 계속 북돋웠다.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가는 듯했다. 세계 챔피언도 그리 멀지 않았다. 장닝과 동료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잔혹하다. 2011년 설을 앞두고 Dream은 갑자기 베이징의 어느 대회에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마침 설 연휴 대이동 기간이라 좌석이 있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몇 사람은 그대로 베이징까지 내내 서서 갔다. 떠나기 전에 단장은 또 영문 모를 말을 한마디 했다. 이번 대회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이번 달 급여는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지치고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서 Dream은 3위를 했다. 그런데도 그달 급여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 가서 설을 쇠고 나니 단장과는 연락도 되지 않았고 이 팀은 그렇게 영문도 모르게 흩어졌다. 다만 이것은 당시 e스포츠판에서는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많은 팀과 클럽이 회사 형태를 갖추지 않았고 선수들 사이에 계약서조차 없었으므로 없어진다고 하면 그대로 없어졌다.
그래도 실력 있는 사람은 결국 찾는 데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후난 고향 사람인 도타 프로 선수 zhou와 또 다른 프로 선수 거우거(狗哥)가 CCM 팀을 만들어 베이징의 한 사장에게서 투자를 받았고 장닝에게 월 5,000위안에 숙소 제공을 제시했다. 거우거는 개 형님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프로를 하고 세계 챔피언을 차지하겠다는 마음이 있던 장닝은 이를 받아들였고 가족에게는 베이징에 일하러 간다고 속인 채 고향 밖의 새 여정에 올랐다.
이때 CCM의 진용은 430, DDC, zhou, 거우거, 장닝이었다.
그러나 좋은 꿈은 석 달뿐이었다. 석 달 뒤 사장과 연락이 끊겼다. 그 뒤로 우승을 몇 번 하기도 했고 IPDC라는 말레이시아 대회도 있었지만 주최 측이 상금을 그대로 들고 달아났다. CCM은 곤경에 빠졌고 다들 훈련할 마음도 나지 않아 날마다 각자 놀았으며 팀에 대한 장닝의 불만도 점점 깊어졌다.
2011년 8월, WCG 중국 지역 결승이 열린 그날 밤이었다. 이 이면사의 앞 장에서 이야기한 샤오샤오(笑笑) 일행이 CCM의 리그 오브 레전드 분팀으로 우승을 차지한 바로 그날 밤이다.
완다 그룹 이사 가운데 한 명인 왕쓰충(王思聪)이 CCM 도타 분팀 전원과 자리를 함께해 CCM을 정식으로 인수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팀 이름은 IG로 바뀌었고 밀려 있던 급여도 지급되었으며 급여를 두 배로 올려 주겠다는 약속과 계약금도 있었다. 장닝의 급여가 1만 위안으로 오르고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곧바로 큰돈이 손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장닝은 떠나기로 했다. 돈이 싫어서가 아니라 앞서 어려울 때 이 팀이 보여 준 흐트러진 모습에 마음이 식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한 친구 DDC의 한마디가 떠나겠다는 생각을 더 굳혔다. DDC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뭐 하나. 같이 즐겁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뒤 장닝과 DDC는 옛 친구 ZSMJ의 초대를 받아 후난 고향 사람 넷에 마카오 사람 하나로 이루어진 LGD 팀으로 갔다. 진용은 장닝, DD, DDC, YAO, ZSMJ였다.
이때 LGD의 책임자는 도타판에서 이름난 여걸 RuRu였다. 장닝에게 제시한 급여는 월 4,000위안에 숙식 제공이었고 훈련은 톈진의 한 복층 주택에서 했다. IG가 제시한 것보다 급여는 적었지만 장닝은 아주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옛 친구들과 다시 모였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훈련 기지에 청소와 밥을 맡은 아주머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를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고 그때 처음 느꼈다.
그러나 한동안 LGD의 성적이 아주 좋지 않았다. WDC에서 8강에 그친 그날 밤 ZSMJ가 눈이 벌게진 채 장닝을 찾아와 자기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한동안 쉴 생각이라고 했다.
WDC 뒤에 장닝의 프로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ZSMJ가 은퇴했다. 그래도 팀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으므로 LGD는 클럽 간 이적 협약을 통해 WE의 선수였던 Sylar를 데려왔고 팀 성적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LGD에는 규정이 있어서 상금은 전부 선수에게 주고 클럽은 나눠 갖지 않았으며 대회에서 결승에만 오르면 급여를 올려 줬다. 1년 뒤에는 모든 선수의 급여가 1만 위안 넘게 올라 있었다. 국내 e스포츠 환경도 점점 좋아졌고 장닝도 더 유명해졌다.
2014년, 원래 은퇴할 생각이던 장닝은 옛 친구 왕웨(王玥)의 권유로 새로 만들어진 Newbee 팀에 들어가 Banana(香蕉), 거우거, HAO, MU와 함께 자신의 세계 챔피언 꿈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TI4, 꿈을 이룬 여정¶
장닝은 이렇게 말했다. 2012년 자기가 있던 LGD가 시애틀에서 TI2 세계 결승을 치를 때는 앞이 너무 순조로웠다. 17연승으로 승자조 결승에 올라 우승이 눈앞에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팀 전체가 영문 모르게 온갖 소통 실수와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그렇게 자기들에게 졌다. 지고 나서는 마음가짐까지 무너져 결국 3위에 그쳤다. 정말 아까운 일이었다.
2014년 TI4 세계 결승은 정반대였다. Newbee는 조별 경기에서 계속 졌고 마지막에 타이브레이커를 치러 간신히 8강에 들었다. 벼랑 끝에서 목숨을 하나 주워 온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유난히 소중하게 경기했지만 압박도 엄청났다. 날마다 밥맛도 없었고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내일 어떻게 싸울지 몇 시간을 생각해야 잠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압박이 팀 전체의 잠재력을 끌어냈다.
아슬아슬했던 결승¶
결승 전에 이틀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이틀 동안 Newbee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상대의 경기를 보고 상대를 연구하느라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까 봐 조바심을 냈고 그러느라 키보드와 마우스를 아예 잡지도 못했다. 그 결과 결승 첫 경기에서 VG를 상대로 손이 굳은 데다 압박도 컸던 탓에 지고 말았다. 그래도 첫 경기를 지고 나서 다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이며 그것만 되돌리면 이길 수 있다고 여겼고 결국 3대 1로 TI4 세계 챔피언을 차지했다.
여자를 쫓는 일도 세계 챔피언을 다투는 일만큼 마음을 써야 한다¶
지금의 장닝은 정말로 승진하고 급여도 오르고 세계 챔피언이 되고 예쁘고 집안도 좋은 여자와 결혼해 인생의 정점에 올랐다. 다만 결혼이 먼저였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을 이룬다. 이 순서도 때로는 제법 일리가 있다.
2011년, 장닝은 동트기 직전 가장 어두운 때에 뒷날의 아내가 되는 상하이 사람 자오제(赵洁)를 만났다. 당시 자오제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은 스타였고 장닝은 생활도 안정되지 않은 이름 없는 게임 마니아였다. 자오제는 처음에는 게임을 하지도 않았고 친구를 대신해 사인을 받으러 WCG에 온 것이었으며 도타는 볼 줄도 몰랐다.
고백은 거절당했고 멀리 떨어져 연애를 해야 했으며 상하이의 장모는 반대했다. 보통 사람 눈에는 그야말로 넘기 힘든 세 가지 벽이다.
그러나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장닝은 첫눈에 이 밝고 말 많은 여자가 자기가 꿈꾸던 사람이라고 정해 버렸다. 염소자리인 그는 나서지 않으면 않았지 목표를 정하고 나면 아주 집요했다.
벽은 하나씩 넘어졌다. 장모는 심지어 밤을 새워 그의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했다. 짚어 두자. 이 모든 일이 3,000만 위안의 상금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러니 장닝의 사례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준다. 여자를 쫓을 때는 역시 마음을 써야 하고 다른 것은 다 핑계다.
꿈을 쫓는 일과 똑같이.
TI4 세계 챔피언 Newbee 주장 장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