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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NeoTV와 PLU, 은원의 기록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八 NeoTV、PLU恩仇录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22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20939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이 이야기는 1995년부터 시작해야 한다...

왕줴(王珏)는 업계에서 왕 감독으로 불렸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 NeoTV 부사장 겸 총감독이었다. 그는 PLU와 NeoTV를 차례로 거쳤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한 왕줴는 1995년 상하이 이공대학(上海理工大学)의 첫 예술 계열 모집에 붙어 예술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후배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 후배가 천치둥(陈琦栋)이다. 영어 이름은 Friend이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 PLU의 CEO였다.

먼저 왕줴 이야기부터 하자.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했지만 왕줴는 연극부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온종일 대본을 파고 연극 연습에 끼고 무대 디자인을 했다. 덕분에 그는 졸업하자마자 영상 쪽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0년, 왕줴는 자기 스튜디오를 열고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다. 그 뒤 몇 해 동안 뮤직비디오 판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얻어, 한훙(韩红) 같은 당대 일선 스타의 영상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에 뮤직비디오를 찍던 사람 가운데 뒷날 모두가 아는 영화감독 닝하오(宁浩)가 있었다. 당시에는 "북에는 닝하오, 남에는 왕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다 2005년 무렵 두 사람은 각각 방향을 바꾸었다. 하나는 영화로 갔고 하나는 e스포츠로 왔다. 그때부터 둘은 완전히 다른 삶의 궤도에 들어섰다. 방향을 바꾼 이유는 뒤에서 다루겠다. 여기서는 펼치지 않는다.

Friend도 졸업한 뒤 왕줴의 영상 스튜디오에 들어가 동업자가 되었다. 회사의 사업 부문을 이끌었고 감독의 매니저 일도 맡았다.

2000년에 들어와 2003년에 나가기까지, 스타크래프트에 미쳐 있던 Friend는 이미 "플레이어 길드"라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대회 규정이 제각각이고 상금과 선수 급여를 떼먹는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플레이어 길드를 만들어 시장을 정리해 보려 한 것이다.

이 시기에 Friend는 류칭(刘青, Alone)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PLU의 스트리머였다.

2002년 GOC 대회가 끝난 뒤였다. 그날 Alone이 SVS의 주장 zealot을 이겼기 때문에, SVS에 있던 Friend가 그를 불러 여러 사람과 함께 밥을 먹었다. 밥상에서 Alone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음식이 나오고 Alone이 고기 한 점을 막 집어 들었을 때 Friend가 SVS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Alone은 얻어먹는 처지에 거절하기가 뭣하다고 생각해 그러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Alone 본인의 말 그대로다. 그 뒤 Alone은 SVS의 팀 리더가 되었고 제법 좋은 성적을 냈다. Friend는 Alone이 쓸 만한 사람이라고 보고 그를 왕줴의 회사로 불러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플레이어 길드"를 만들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부터 Alone은 저 유명한 "길을 잘못 든 청년"이 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시가 있다. 늑대 굴에 한번 들어가면 바다처럼 깊어서, 그날부터 지조는 남남이 된다.

Friend는 2003년 왕줴의 스튜디오를 떠난 뒤, 2004년 황정강(黄正刚)의 이양 그래픽디자인 유한공사(逸阳图文设计有限公司)에 들어가 여전히 사업 부문을 맡았다. 동시에 당시 독립 감독으로 일하던 왕줴를 끌어들여 3D 디자인 프로젝트 몇 건의 아트 디렉터를 겸하게 했다.

이 시기에 Friend가 여가 시간에 만든 PLU 포럼과 PLU 시리즈 대회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양의 사장 황정강도 게임 애호가였으므로, Friend는 그를 설득해 회사 회의실 한쪽을 간이 스튜디오로 비워 냈다. 그런 다음 왕줴를 데려와 한국의 OGN(온게임넷) 모델과 WCG 모델을 설명했고, 이것이 왕줴에게 e스포츠에 대한 짙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마침 그때가 2005년이었다. 그해 중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긴 일이 하나 있었다.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 걸(超级女声)》이다. 2005년 《슈퍼 걸》이 리위춘(李宇春), 저우비창(周笔畅), 장량잉(张靓颖) 같은 엄청난 영향력의 풀뿌리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다들 알지만, 그 뒤에 중국 음악에 남긴 거대한 부정적 영향은 잘 모른다.

잠시 시간을 들여 "음악 이면사"라는 곁가지 이야기를 하겠다.

2005년의 슈퍼 걸은 여러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시청자에게서도 대단히 높은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 음악에는 무거운 타격을 입혔다. 그 시즌 뒤로 많은 음악인이 이 판에서 물러났고 뮤직비디오 산업은 궤멸적인 타격까지 입었다. 닝하오와 왕줴처럼 이름 있던 뮤직비디오 감독들이 잇따라 업종을 옮겼다. 왜 그랬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유는 몇 가지다.

슈퍼 걸의 모델에는 결함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아이팟을 내놓은 뒤 하드웨어로 저작권 보호를 강화해, 음악인에서 음반 제작사까지, 음악 애호가에서 하드웨어 업체까지 모두가 이익을 보는 다자 승리 모델을 세웠다. 아이팟과 뒷날의 앱스토어가 모두 같은 발상이다. 애플은 아이팟 자체의 뛰어남으로 폭넓은 잠재 사용자 시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음악이라는 사슬 위의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슈퍼 걸은 그렇지 않았다. 슈퍼 걸 출신들이 총애를 받으면서 잘나가던 가수 다수가 밀려났고, 그전의 여러 음악 장르도 함께 도태되었다. 그해 국내 음악 시장은 거의 전부 슈퍼 걸 음악에 먹혔고 많은 음악인이 손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리위춘 같은 가수의 등장은 여러 음반사의 제작 사고방식을 뒤집었다. 쉽게 말해 당시 중국 음악계는 시장이 갑자기 드러낸 취향에 놀랐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의 무료 확산, 바이두 음악 같은 곳의 mp3 무료 내려받기, 저작권 의식이 약한 방송국이 파이를 혼자 차지하고 나누지 않은 것, 음반사들이 화가 나도 말은 못 한 것 등이 겹치면서, 음반사들이 대거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뒤로 중국 본토 음악 시장에서 뮤직비디오는 점점 줄었고 공들여 만든 음악도 점점 줄었다. 그 자리를 《쥐는 쌀을 사랑해(老鼠爱大米)》나 펑황촨치(凤凰传奇) 같은 풀뿌리 음악의 부상이 대신했다. 가오샤오쑹(高晓松)의 말처럼 중국의 음반 산업은 이미 죽었다.

슈퍼 걸의 마지막 결과는 이랬다. 음악인이 거부하고, 음반 제작사가 거부하고, 동종 방송국이 거부했다. 공짜로 음악을 듣게 된 대중만 즐거웠고 나머지 고리는 전부 다쳤다. 이것은 건강한 발전 모델이 아니다. 어떤 식당이 날마다 공짜 밥을 준다고 하면 먹는 사람은 즐겁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업계에 오는 결과는 파괴적이다.

슈퍼 걸 모델의 등장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맞고, 나 자신도 그때 량펀(凉粉)이었다. 장량잉의 팬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업계의 높이에서 보면 이것은 중국 음악계에 대한 거친 대청소였고, 우리는 모두 그 참가자였다.

업계의 높이에서 일하지 못한 것, 이것이 슈퍼 걸이 시장을 얻고 미래를 잃은 핵심 원인이다.

지금의 《더 보이스 오브 차이나(好声音)》에 온갖 층위의 음악 요소가 참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메리칸 아이돌》과 《슈퍼 걸》을 겪고 나서 다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무명을 뽑아 올리는 과정일 뿐 아니라, 이미 이름을 얻은 가수도 인정을 받고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예를 들어 양쿤(杨坤)의 서른두 번 공연, 나잉(那英)의 개인 이미지 상승, 황링(黄玲)과 장웨이(张玮)가 함께 부른 《하이거(high歌)》가 그렇다. 음악 산업의 각 고리가 이 한 편의 쇼에서 실질적인 이익을 나눠 가졌다. 이렇게 해야 멀리 갈 수 있고, 한때의 시원함을 노리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2005년 슈퍼 걸 이후 왕줴는 한편으로 업종을 옮길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 Friend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OGN과 WCG가 괜찮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양의 사장 황정강, Friend, Alone과 함께 PLU 대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5년 이전에 열린 PLU 1회부터 3회까지는 시청자 반응이 좋아서 다들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고 당시 왕줴의 여자친구 안자(安佳)는 방송 진행을 전공한 사람이라 카메라 앞에 설 기회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2005년 왕줴, 황정강, Friend가 각각 20만 위안 남짓을 내놓고 함께 PLU 회사를 세웠다. 이 액수에는 이견이 있다. 그들은 바오산(宝山)에 별장 두 채를 빌려 하나는 스튜디오와 사무실로, 하나는 직원 숙소로 썼다. 당시에는 영상 방송 플랫폼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으므로, PPS의 룬쯔(轮子)를 끌어들여 방송 채널을 맡겼고 XXX가 기술을 맡았다.

PLU는 2006년에 정말 잘나갔다. 제5회 PLU는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 두 종목을 다루었고 PPS에서 대단히 높은 시청률을 얻었다.

저우닝(周宁)과 XIXI도 그 무렵 PLU에 들어와 워크래프트 3 해설을 맡았다. 그때부터 PLU는 스타크래프트만 있는 채널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 다들 아는 진행자 더우더우(兜兜)도 그 시기에 PLU에 들어와 진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왕줴가 e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을 주제로 찍은 다큐멘터리 《그 꽃들(那些花儿)》도 e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 강한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e스포츠는 어떻게 돈을 버는가?"라는, 당시 다들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다시 한번 PLU 앞을 가로막았다.

2006년 말 PLU의 자금은 점점 줄었다. 대회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얻었지만 기대에 이르지는 못했다. 왕줴는 당시 PLU의 소규모 공방식 발전에는 앞날이 없다고 보았고, 황정강은 회사가 상업적 관점에서 알맞은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한다고 여겼다. Friend는 참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NeoTV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잘나가고 있었다.

2005년, 텔레비전 미디어 쪽 출신인 슝젠밍(熊剑明, Neo)이 게임 텔레비전 채널 기획안을 들고 당시 상하이 문화계에서 제법 무게가 있던 사람인 장순더(张顺德)를 찾아갔다. 이 사람이 이 글을 쓰는 시점에 NeoTV의 사주인 린위신(林雨新, Ken)의 작은아버지다. 장순더가 기획안이 괜찮다고 보아 린위신 가문이 돈을 냈고, 2006년 초 NeoTV가 세워졌다. 당시 Ken은 아직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슝젠밍이 그때 NeoTV의 실무 책임자였다.

Neo는 2006년 초에 이미 왕줴를 찾아가 데려가려 했지만 왕줴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PLU 내부에서 발전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 쌓여 갔고 프로젝트는 점점 아득해졌다.

여자의 청춘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들 한다. 방송 진행을 전공한 왕줴의 여자친구 안자는 더욱 마음이 급했다. 그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청춘이 빠르게 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NeoTV가 게임 분야의 미녀 진행자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자는 PLU에서 NeoTV로 옮긴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안자가 자리를 옮긴 뒤로 왕줴에게는 날마다 NeoTV 곳곳의 정보가 들어왔고, 이것이 2006년 말 왕줴가 과감히 손을 끊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왕줴가 PLU를 떠날 때 그의 지분은 0으로 정리되었다. 서른 살 전에 번 돈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때가 2010년 이전 PLU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고 본다. 왕줴만 다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주주인 Friend와 황정강이 넣은 돈도 거의 바닥났기 때문이다. 이상을 위해 버틴 사람들이 마지막에 현실의 정면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그래서,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왕줴 등의 그 이직을 두고 당시 아무리 격렬하게 다투었든, 서로 얼굴을 붉히며 갈라섰든, 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간단히 판단할 수 없다. 그 뒤 몇 해를 보면 다들 이룬 것이 있고 모두 e스포츠 발전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높이에서 그때를 돌아보면 아마 아무도 틀리지 않았고, 다만 운명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했을 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 싸울 것은 싸웠고 갈라설 것은 갈라섰다. 역사는 고쳐 쓸 수 없다. 왕줴는 결국 PLU를 떠나 NeoTV에 들어갔고, 저우닝과 XIXI도 뒤이어 NeoTV로 갔다. PLU의 손실은 컸다. 셰이셴(谢逸仙)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PLU 게임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의 프로그램조 총프로듀서였는데, 그때는 왕줴 밑에서 기술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앞으로 밀려 나와 혼자 판을 감당하게 되었다. 더우더우도 그 무렵 밀려 올라왔다. 다행히 이들은 억지로라도 버텨 냈다.

NeoTV와 PLU의 은원도 이때 심어졌다. 뒤에 벌어진 샤오써와 다스의 다툼은 두 회사를 극단까지 적대하게 만들었다.

샤오써(小色)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NeoTV 대회부 책임자였다. 원래 PLU의 정식 구성원은 아니었고, 8DA 포럼과 PLU 포럼에서 활동하던 열성적인 스타크래프트 애호가였다. 쓰촨 사람이고 성격이 아주 직선적이어서, 왕줴 등이 아직 PLU를 떠나기 전부터 PLU 포럼에서 프로그램 해설의 오류를 자주 지적했다. Friend는 무대 뒤로 물러나기 전에 다스(大师)를 데려왔다. 본명은 위샤오강(郁小刚)이고, PLU의 스타크래프트 해설이었으며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SCNTV 책임자였다. 다스는 자연스럽게 샤오써의 새로운 비판 대상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샤오써와 다스 사이의 일은 NeoTV와 PLU의 갈등이 아니라, 애호가와 해설 사이의 기술적인 토론이었다.

그리고 2007년 초, 왕줴가 NeoTV에서 워크래프트 3만으로 치른 제1회 NSL을 성공적으로 열고 제2회에 스타크래프트 종목을 넣으려 하면서, 포럼에서 아주 활발하던 샤오써를 전업 해설로 데려왔다. 이것이 제대로 불을 붙였다. 큰 갈등이 배경에 깔려 있던 터라, 샤오써와 다스의 다툼도 기술적인 층위에서 부채질을 받아 NeoTV와 PLU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그러나 두 사람 자체는 상대를 없애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소동 뒤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점은 다들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이야기는 NeoTV 쪽 줄기로 넘어간다.

2005년, 나는 당시 QQ 대전 플랫폼 책임자이던 Cody를 알게 되었다. 본명은 장위(张宇)이고, NeoTV 부사장을 지냈으며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MarsTV를 이끌고 있었다. 그때 QQ 대전 플랫폼은 막 나온 참이라 StarsWar2를 통해 홍보하려 했고, 상업 후원 자원을 낼 뜻이 있었다. 마침 내가 그 부분을 맡고 있어서 함께 후원 유치를 했다. Cody는 실제로 국제적인 대형 업체들의 자원을 많이 가져왔다. 그러나 뒤에 여러 이유로 협력은 성사되지 못했고, 텐센트가 QQ 대전 플랫폼을 두고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그 뒤로는 연락이 줄었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지금까지도 나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Cody는 나중에 텐센트 LIVE 플랫폼의 이름으로 한국 WCG 조직위원회와 협상해 WCG 세계 결승 생중계 권리를 따냈다. 그리고 e스포츠를 알고 프로그램 제작 능력이 있는 회사를 찾아 현지 협력을 맡겨야 했다.

그때 StarsWar2 협력이 성사되었더라면 WCG라는 사업은 그 뒤 몇 해 동안 우리가 있던 GamesTV, 곧 유시펑윈의 전신에 떨어졌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러나 일이 엇갈려 이 건은 NeoTV의 것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나 개인의 작은 아쉬움일 뿐이고, NeoTV는 그 뒤 몇 해 동안 WCG를 잘해 냈다.

이 중계권이 당시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NeoTV에 떨어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해 Neo가 100만 위안을 내고 중계권을 샀다는 말이 있는데, 이 일은 Ken조차 몰랐다. 이것이 뒷날 Neo가 Ken에게 팀에서 밀려난 주된 이유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그때 WCG 생중계가 비교적 단순해서, 상대가 넘겨주는 것이 이미 다 갖춰진 영상 신호였고 중국 쪽 현지 생중계는 분산 전송만 안정적으로 유지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WCG 조직위원회는 텐센트 LIVE의 하드웨어 실력을 비교적 중요하게 보았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2007년부터 지금까지 NeoTV의 해마다 주된 일은 WCG 중국 지역의 조직과 실행, 그리고 WCG 세계 결승 생중계가 되었다. 이것은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먼저 2008년 NeoTV에서 일어난 심각한 내부 사건을 이야기하자.

바로 Neo의 퇴출이다.

나는 Neo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경로로 들은 바로는 논란이 제법 있는 사람이었고, 특히 성격 쪽이 그랬다. 유시펑윈과 WCG 중계권을 다투면서 큰돈을 냈는데, 판의 규칙을 깨고 동종 업계의 미움을 샀을 뿐 아니라 투자자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 뒤 Neo가 동종 업체를 상대로 벌인 여러 인력 빼내기도 NeoTV가 곳곳에 적을 만들게 했다. 이 때문에 한때 다른 영상 미디어 회사들이 뒤에서 손을 잡고 NeoTV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가는 부정적 영향을 남겼고, 어떤 갈등은 지금까지도 일부 협력에 영향을 주고 있다.

2008년 초 린위신(Ken)이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회사가 Neo 때문에 발칵 뒤집혀 있었다. 왕줴는 화가 나서 회사를 떠났고, Cody는 Neo와 몸싸움까지 벌였다는 말이 있다. 당시 Neo의 구상에도 다들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게임 전문 영상 주문형 플랫폼을 만들려 했다. 지금 말로 풀면 독립된 유쿠(优酷) 게임 채널 같은 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램 생산자가 되겠다는 왕줴 등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Ken은 이 일을 처리하는 데서도 아주 과감했다. Neo에게 회사를 떠나 달라고 한 다음, Cody와 자기 작은아버지 장순더를 데리고 직접 몇 번이고 찾아가 왕줴에게 NeoTV로 돌아와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앞으로 NeoTV는 영상 주문형 플랫폼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만들고 WCG 같은 대회를 하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왕줴는 결국 마음이 움직여 NeoTV로 돌아왔고, 2008년 WCG 중국 지역 일에 착수했다.

2008년 WCG 중국 지역에서 NeoTV는 무척 고생했다. 지역 예선 생중계를 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전국에 15개 지역 예선이 있었고 매주 두 개 지역을 동시에 치렀는데, 그중 큰 지역 하나를 골라 중국의 인터넷 카페인 PC방(网吧)에 중계 부스를 세우고 현장 생중계를 했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겠다. 이 일을 통해 나는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WCG의 지역 예선 모델은 2008년에 이르러 이미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지역의 수준도 참가 열기도 높지 않았으니, 이렇게 생중계를 하는 것은 힘만 들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일이었다. 그래서 2009년에는 그들 스스로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평이하다. 2008년 WCG 중국 지역 결승은 푸단대학 정다 체육관(复旦大学正大体育馆)에서 열렸고, 2009년에는 광다 회의전시센터(光大会展中心)로 옮겨 지금까지 그곳에서 열리고 있다. WCG는 브랜드 자체의 영향력이 커서 많은 업체가 부스를 세우며 참여하려 했다. 그래서 NeoTV는 모델 면에서 차이나조이(ChinaJoy) 같은 전시회형 노선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도타(DOTA)가 뜨겁던 2007년부터 2012년까지의 시기와 맞물렸다. 그리하여 WCG 중국 지역 결승은 e스포츠판 차이나조이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했다.

이 모델은 WCG처럼 종목이 많은 대회에 아주 잘 맞는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종목이 걸렸을 때 관객은 여러 부스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 인기는 움직이는 가운데 유지되고 여러 쪽이 함께 이기는 판이 만들어진다.

자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NeoTV가 "e스포츠 2차 애호가"를 이해하는 방식이 StarsWar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시회를 보러 오는 관객 가운데 상당수는 골수 게이머가 아니다. 핵심 게이머의 친구나 가족일 수 있다. 이들을 잘 챙기고 경기를 보러 오게 만드는 일은 e스포츠 핵심 게이머의 수를 넓히고 대회 브랜드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2010년 이후 NeoTV와 PLU는 발전 방향이 점점 멀어지면서 은원도 서서히 옅어졌다. 중국 게임 영상 미디어도 2010년 이전 유시펑윈, NeoTV, PLU 세 곳이 맞서던 구도에서 지금의 다자 경쟁으로 바뀌었다. GTV는 베이징에 있어 충돌이 비교적 적었다. 새로운 은원의 기록은 여전히 상연 중이고 배우도 제법 늘었지만, 이 이면사에서는 아직 다루지 않는다. 어쩌면 몇 해 뒤 다음 이면사를 쓸 때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적을 수 있고, 더 복잡한 인간의 본성을 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나는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