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젠우훙옌샤오에서 IG.xiaoxiao까지, 쑨야룽¶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三十一 从剑舞红颜笑 到 IG.xiaoxiao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4년 6월 17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780186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많은 사람이 샤오샤오(笑笑)라는 이름을 아는 이유는 아마 그가 IG 팀 리그 오브 레전드 분팀의 전 주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IG를 이끌고 WCG와 TGA, SWL 등 국내 우승을 여러 차례 차지했고 중국 대표로 여러 번 해외 원정을 다녀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다. 샤오샤오는 한국을 꺾은 영웅이기도 했다. DNF(던전앤파이터) 판에서 이름이 크게 났던 젠우훙옌샤오(剑舞红颜笑)가 바로 샤오샤오라는 아이디의 온전한 형태다. 검이 춤추니 미인이 웃는다는 뜻이다. 그는 중국 군단이 거의 전부 탈락한 상황에서 혼자 결승까지 올라간 적이 여러 번 있었고, 한국에서 개발하고 일본 선수들이 정상을 지키던 격투 게임 DNF에서 중국에 한 자리를 얻어 냈다.
2014년 1월 20일 IG.xiaoxiao 쑨야룽(孙亚龙)이 은퇴한 뒤 그는 전업 게임 해설자가 되었다. 웃기고 익살스러운 그의 방식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e스포츠판의 만담 배우라고 불렀다. 만담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중국 전통 공연 샹성(相声)을 말한다.
그런데 샤오샤오가 걸어온 길 또한 나이 든 샹성 배우들이 스스로를 두고 하는 말과 꼭 같았다. 남을 웃기는 사람이 정작 자기는 웃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쑨야룽은 1988년 3월 24일 충칭시 위중구(渝中区) 바자오촌(巴教村)에서 태어났다. 교사 가족들이 모여 사는 사택 단지였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모두 바수중학(巴蜀中学)의 오래된 교사였고, 아버지는 작은 장사를 했으며 어머니는 공상은행 직원이었다. 사실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직업 습관 때문에 돈을 아주 엄하게 관리했으므로, 샤오샤오의 어린 시절은 정말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정과 모험을 좋아하는 양자리답게 이런 생활은 오히려 샤오샤오의 재치를 끌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궁지에 몰리면 남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쪽으로 지름길을 찾는 재주를 익혔다. 이것이 뒷날 그의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은 중학생 때부터 드러났다. 그때 이미 샤오샤오는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뭐든 다 했다. 스타크래프트, 카운터 스트라이크,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7》과 《'98》, 《스톤에이지(石器时代)》 같은 것들이다. 실력도 아주 좋아서 스타크래프트와 카운터 스트라이크 모두 전교 1위였다. 그런데 늘 놀 돈이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속이고 등쳐 먹는 짓은 할 수 없었고 어린 나이에 일자리를 구할 데도 없었으므로, 남은 것은 세 번째 길뿐이었다. 남이 대신 돈을 내게 하는 것이다. 그게 될 리가 있나.
샤오샤오는 나는 된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가 다닌 곳은 중점 중학, 곧 상위권 학생이 모이는 학교였다. 이 학교 학생들에게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돈이 좀 있다는 것이다. 게임비를 내주는 사람 편에 붙어서 그 사람을 이기게 해 줬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계속 놀았다.
그러나 성적은 할머니가 가르친 국어와 할아버지가 가르친 화학을 빼면 완전히 곤두박질쳤다. 게다가 그때 학교와 사회는 게임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고 샤오샤오도 게임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 년 동안 그림을 몰아쳐 배웠고 나중에 미술대학에 가려고 했다.
소묘, 크로키, 색채를 날마다 연습했다. 일 년을 몰아친 끝에 그럴듯한 작품이 몇 점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일반 교과 점수가 너무 낮아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지역의 한 대학 영상 애니메이션 학과에 들어갔다.
기술은 많을수록 좋다는 옛말은 아주 옳다. 미술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림이 샤오샤오에게 신기한 인연을 하나 만들어 줬다.
대학 1학년의 인물 크로키 수업 때였다. 아주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여학생이 모델을 섰고 샤오샤오는 첫눈에 반했다. 샤오샤오는 그녀의 순수함과 수줍음이 막 나온 게임 같았다고 했다. 끝없이 파고들 내용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쫓아다녔고 됐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그녀에게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헤어졌다.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뒤집힐 줄은 다들 몰랐을 것이다.
물론 쑨야룽이 여기서 포기했다면 뒷날의 샤오샤오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끈질기게 매달리지도 않았고 억지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샤오샤오는 참을성 있게 그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때를 기다렸다. 2학년 때 그는 이 여학생이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눈이 번쩍했다. 기회가 온 것이다. 계획 하나가 그렇게 나왔다.
이 계획은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여학생에게서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녀들이 무엇을 하든 샤오샤오도 따라 들어가서 하고, 가장 짧은 시간에 높은 등급까지 올린 다음, 무심한 척 자연스럽게 그녀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기 게임 재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게임 기술을 파고드는 감각을 다진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가진 것 없는 그가 돈을 들여 높은 등급 계정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게임에서 빨리 올라가는 지름길을 스스로 찾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술과 발상으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셴(诛仙)》 같은 게임에서 《진우퇀(劲舞团, 한국 원판 오디션)》으로, 다시 DNF로 넘어갔다.
그 가운데 진우퇀 시기는 이야기할 만하다. 샤오샤오의 인생에서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이기고 가진 것 없던 쪽이 판을 뒤집은, 머리와 배짱을 함께 쓴 고전적인 한 판이라 할 만하다.
여학생이 진우퇀을 시작했고 재능도 아주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샤오샤오는 충격을 받았다. 이 게임은 그의 기숙사 남학생 전원이 가장 깔보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의 아기자기한 캐릭터 온라인 게임들은 그렇다 쳐도 이번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샤오샤오는 역시 양자리다웠다. 짧게 놀란 뒤 그는 곧바로 기숙사 남학생 전원의 날마다 이어지는 멸시를 견디며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연습을 시작했다. 게다가 그를 더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여학생에게 이미 게임 안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연습은 해서 뭐 하나. 그런데도 샤오샤오는 묵묵히 진우퇀 싱글 모드를 열고 계속 연습했다.
많은 사람이 내가 왜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에 이렇게 긴 분량을 쓰는지 의아할 것이다. 사실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이런 작은 일 하나하나로 갈린다. 그는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으며 끝내 기회를 하나 만났다. 그 기회를 완벽하게 붙잡았을 뿐 아니라 성공했다.
극적인 결말¶
어느 날 여학생의 게임 속 연인이 그녀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꽤 먼 곳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샤오샤오는 먼저 가지 말라고 말렸다. 나쁜 사람을 만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갔다. 샤오샤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은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문자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파악했다.
밤 11시가 넘어 그녀는 정말로 나쁜 사람을 만났다. 상대는 그녀를 붙잡아 두려 했고 지갑과 신분증을 빼앗았다. 그녀가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했지만 샤오샤오는 달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호되게 나무랐고, 자기 기숙사는 이미 문을 잠갔으니 알아서 돌아오라고 했다.
여기서 샤오샤오가 일을 다룬 방식을 눈여겨보자.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를 언제든 기다려 주는 예비 상대로 여겼고 어차피 받아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샤오샤오는 한마디로 자기가 그녀 마음속에서 차지하던 그 자리를 먼저 부정했다. 이것이 꾀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 바로 그 순간 샤오샤오는 기숙사 2층 창문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밖으로 나가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 그쪽으로 달렸다. 이것이 용기다.
30분 뒤 샤오샤오는 그 근처에 도착했고, 그 남자가 아직도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을 한눈에 봤다. 그녀는 지갑을 돌려받지 못해 집에 갈 방법도 없었다.
샤오샤오가 나타나자 그녀는 얼이 빠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신이 내려온 것 같았다. 그 자리의 온갖 느린 화면과 복잡한 표정은 각자 알아서 그려 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그도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아주 사납게 소리를 질러 댔고 건달 같은 행색이었으며, 게다가 여기는 남의 구역이었다. 지갑도 돌려받아야 하고 자신과 그녀의 안전도 지켜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면으로 붙는 것은 애초에 샤오샤오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꺼내,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남자가 어렴풋이 들을 수 있는 자리로 걸어가 자기 형에게 전화하는 척했다. 그런데 이 형이라는 사람은 마침 친구 여럿과 근처에서 밥을 먹고 있어 곧 온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뒤 샤오샤오는 그 남자와 따지지도 않았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길 건너편으로 가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 서 있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샤오샤오는 이유가 셋이라고 했다. 첫째는 상대가 갑자기 덤빌까 걱정해서였고, 둘째는 아무 뒷배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그 남자에게 물러설 구실을 주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허세를 부린 지 5분도 되지 않아 그 남자가 먼저 무너졌다. 갑자기 지갑 같은 물건을 그녀에게 돌려주더니 택시를 잡아타고 달아났다.
그날 밤 샤오샤오가 그녀를 바래다준 뒤 그녀는 정식 여자친구가 되었다.
이 일 전체를 보면 오르내림이 있었고 배짱과 꾀가 함께 있었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큰일도 아니었고 피를 본 일도 아니었지만, 거기서 드러난 재치와 빠른 대응은 뒷날 샤오샤오의 e스포츠 인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DNF로 들어선 반프로 e스포츠의 길¶
샤오샤오는 DNF 비공개 테스트 때부터 이 게임을 접했다. 공개 테스트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존(至尊) 6까지 올라갔다. 게임 안 결투 등급이다. 서남 지역 1위였고 지존 4에 머문 2위와는 차이가 아주 컸다. 2010년 제1회 TGA 도시 챔피언십에서 그는 지역 서버 PK 등급 상위 5위 자격으로 청두에서 열린 서부 지역 결승에 나갔다.
이 대회에서 그는 큰 점수 차로 결승까지 올라갔고, 그때로서는 풀 수 없는 사람 하나와 대회 규칙의 구멍 하나를 만났다. 그 사람은 위안치(元气)이고 뒷날 샤오샤오의 팀 동료가 된다. 대회 규칙의 구멍은 이런 것이었다. 선수가 게임 안에서 쓰는 경기용 장비와 옷은 선수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쓴다. 샤오샤오는 장비를 살 돈이 없어 누더기를 걸치고 결승까지 올라갔고, 위안치의 몸에는 최상급 힘 마법사(力法) 장비 한 벌이 있었으며 이 장비에는 피해 반사 효과가 있었다. 뒤의 TGA 대회는 모든 장비를 개방했고 그 장비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제1회 때 샤오샤오는 답이 없는 이 판을 그대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첫 판을 지고 나서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예전 방식으로 저 피해 반사 장비와 맞붙으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판에서는 연속기가 많고 빠른 광검 대신, 피해는 크지만 기술 수가 적은 둔기로 바꿨다. 그러면 상대의 피해 반사가 터지는 횟수가 줄어 자기가 받는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샤오샤오는 3 대 4로 경기를 졌다.
이 대회를 거치며 샤오샤오는 장비도 꽤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지존 방에 가서 돈 있는 사람을 찾아 제자로 받았다. 돈 있는 사람의 등급을 대신 올려 주고 돈은 받지 않되 계정은 자기가 쓰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돌고 돌아 마침내 안정적인 PK용 장비 계정을 하나 갖게 되었다.
이때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곧 시작될 WCG에 DNF 종목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샤오샤오는 급히 두 사람을 모아 팀을 꾸려 훈련을 시작했고 충칭 지역 팀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해 DNF는 교통비를 대 주지 않았다. 경기를 이겨도 세 사람이 자기 돈으로 상하이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때 중국 DNF에는 이미 고수가 넘쳤으므로 샤오샤오는 가 봐야 헛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 프로를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포기했다.
이때 청두 지역의 한 사람이 샤오샤오를 찾아왔다. 앞서 샤오샤오를 꺾은 위안치였다. 그는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고 그의 팀은 청두 지역 팀전 우승을 차지했지만, 걱정하는 바는 샤오샤오와 같았다. 위안치는 자기 팀의 전력이 모자란다고 여겨 가기 전에 팀을 다시 짜고 싶었고 그러다 샤오샤오를 떠올린 것이다.
조건도 간단했다. 샤오샤오가 위안치 길드의 이름을 달기만 하면 대회 비용을 대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남는 장사를 샤오샤오가 놓칠 리 없을 것 같지만 그는 거절했다. 이미 두 팀 동료에게 가지 않겠다고 말했으므로, 이렇게 하면 친구를 속이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충칭 사람에게는 의리로 맺은 친구가 더 중요했다.
며칠 뒤 게임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모였고 술을 마시다 이 이야기가 나왔다. 샤오샤오의 팀 동료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일은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갔어야 한다. 진짜 친구라면 말리지 않는다.
샤오샤오는 이 말을 평생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위안치와 샤오샤오, AS로 이루어진 청두 대표팀이 상하이로 갔다. 전국의 고수들을 앞에 두고도 쓰촨과 충칭 군단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마지막 판에서 1 대 1인 상황에 샤오샤오가 혼자 상대를 전부 잡아내며 전국 우승을 차지했다.
석 달 뒤 팀전 우승자 셋과 개인전 우승자 하나가 중국 대표로 한국에 가서 DNF 아시아 챔피언십에 나갔다. 가서 보니 위에는 늘 더 나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 DNF는 한국에서 이미 3년 동안 서비스되고 있었고 선수들의 플레이 방식과 발상이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본 팀 선수들은 격투 게임에서 여러 해 쌓은 기반이 있었다. 대회 전부터 이길 가망이 희박하다고 느꼈다. 세 나라 선수 12명이 4개 조로 나뉘어 조별 승점 리그를 치렀는데, 경기가 시작되자 아니나 다를까 중국 팀은 샤오샤오를 빼고 전부 탈락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DNF에서 궁극기를 쓰려면 무색 큐브 조각을 하나 써야 하고 이것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중국 플레이어들은 처음 연습할 때 돈을 아끼려고, 아니면 다른 이유로 암묵적인 규칙을 하나 만들었다. PK에서는 궁극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암묵적인 규칙 때문에 중국 초기 DNF의 플레이는 화려한 연속기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샤오샤오는 이 문제를 알아차린 뒤 다른 길로 갔다. 궁극기 쓰는 것을 따로 연습했고, 보기에는 멋없지만 아주 실용적인 짧은 연속기를 함께 썼다. 이것이 뒷날 DNF의 또 다른 유파인 궁극기 쿨타임 운영이 되었다. 시간을 끌다가 궁극기가 돌아오면 상대와 붙는 방식이다.
이 두 갈래의 선택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샤오샤오가 외국 선수들의 플레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외국의 저 사람들이 무색 큐브 조각을 아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샤오샤오는 4강에서 결승까지 올라갔고 상대는 한국 선수 이진성(李真星)이었다. 3년 가까이 이 게임을 해 온 선수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그는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2 대 3으로 졌다.
샤오샤오는 2위를 했고 상금 1만 위안을 받아 귀국해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프로를 할 생각이 없어 돌아가 학교를 계속 다녔다. 그러다 제2회 DNF 아시아 챔피언십 상하이 대회에서 대중 투표로 출전 선수를 뽑았는데 샤오샤오도 뽑혔다. 다만 그는 텐센트 사람이 알려 주고 나서야 이 일을 알았다.
그 대회는 안방에서 치르는 경기였으므로 관심이 아주 높았고 사람들의 기대도 대단히 컸다. 다만 과정은 딱히 말할 것이 없다. 중국 군단은 샤오샤오를 빼고 또 전부 탈락했다. 짚어 둘 만한 것은 조별 경기에서 샤오샤오가 한국 제일의 독왕(毒王) 창서(长舌)와 좀처럼 승부가 갈리지 않는 경기를 벌인 일이다. 창서는 경기 전마다 혀를 내밀어 상대를 도발하기를 좋아해서 붙은 이름이다. 마지막에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샤오샤오는 상대의 그물에 걸렸다. 다행히 상대도 그의 공격에 떠올라 있었지만, 상대가 일어서기만 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샤오샤오는 홀린 듯이 평소에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기술 하나를 꺼냈다. 연속 찌르기(连突刺)다. 피해가 아주 적어서 평소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샤오샤오는 창서를 마지막 순간에 잡아내고 판을 뒤집었다.
아쉽게도 결승에서 샤오샤오는 일본 선수를 만났다. 상대는 아주 비주류인 직업, 아마 일본 선수들이나 즐겨 쓸 법한 직업인 유도(柔道, 한국 원판의 그래플러)를 꺼냈다. 워낙 비주류라 샤오샤오는 연습해 본 적이 거의 없었고 결국 다시 2 대 3으로 준우승에 그쳤다.
이 경기 뒤로 샤오샤오는 쑨야룽이라는 이름 속 야룽(亚龙)의 야(亚)가 버금을 뜻한다는 이유로, 만년 2등 팔자를 타고났다는 놀림을 네티즌들에게 많이 받았다.
그 뒤 2011년 샤오샤오는 학교에 다니면서 DNF의 크고 작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DNF 판에서는 차츰 물러났다. 동시에 친구 AS의 소개로 중국에서 막 비공개 테스트를 시작한 리그 오브 레전드를 접했다.
새로운 종목, 리그 오브 레전드¶
여러 해 쌓인 게임 감각 덕분에, 리그 오브 레전드 비공개 테스트가 끝날 무렵 샤오샤오는 이미 당시 이름난 멍더위젠(梦的预见)과 중국 서버 1위를 다투고 있었다.
공개 테스트 때 샤오샤오는 젠우훙옌샤오에서 샹두슈(香独秀)로 이름을 바꾼 뒤 반년 동안 줄곧 선두를 달렸다.
그때 중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팀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EHOME과 WE, 그리고 홍콩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CCM 팀이 모두 깃발을 세웠다.
CCM의 주장 White가 샤오샤오를 찾아와 프로를 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팀이 탑 라이너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샤오샤오가 e스포츠 프로화라는 선택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미 국내외 대회 경험이 풍부한 선수였는데도 그랬다.
그때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아직 마법사 둘을 쓰는 전술이 유행했다. 샤오샤오의 대표 챔피언은 블라디미르와 브랜드와 피들스틱이었는데 마침 미드와 탑을 모두 볼 수 있었다. 학교도 졸업할 때가 되었으므로 그는 마음이 움직였다.
2011년 4월 샤오샤오는 어머니에게 바치지 않고 남겨 둔 용돈을 전부 털어 베이징행 비행기표를 샀다. CCM 단장이 제시한 급여는 월 3,000위안에 숙식 제공이었다. 샤오샤오는 우리 쪽 기준으로는 꽤 높은 편이었다고 했다.
베이징, 수도, 이름난 프로 e스포츠 팀, 새로 떠오르는 e스포츠 종목.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샤오샤오는 베이징에 도착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이튿날 이런 말을 들었다. 숙소 임대가 끝나 선수들이 전부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단주 집안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자금줄이 끊겼고 돈이 없었다.
그때 제2회 TGA 대상 대회까지는 두 달밖에 남지 않았고, 샤오샤오와 CCM 선수들은 바로 그 대회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래서 각자 돈을 모아 하루 50위안짜리 작은 여관에 몰려 살았고 훈련은 길모퉁이의 작은 PC방에서 했다.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조건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다들 마음이 하나였다. 그런데 한 달을 버티고 나자 급여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줄이 끊긴 것이고 이것은 큰일이었다.
논의 끝에 다들 청두로 가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단장 HOT과 꽤 가까운 AG 팀에 의지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이징 지역의 EHOME 팀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AG 팀은 주로 크로스파이어 종목을 했고 자기들 PC방도 하나 있었다. 그렇게 CCM은 청두로 가서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훈련한 뒤 TGA 청두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청두에서 훈련하던 때 샤오샤오는 부계정으로 몰래 새 챔피언 하나를 연습했다. 럼블이었다. 그때는 다들 이 챔피언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국내외를 통틀어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샤오샤오는 이것이 상당히 강한 챔피언이고 다만 요령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게다가 그전의 대회 경험이 그에게 알려 준 것이 있었다. 경기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쓸 한 수를 남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이 곧 왔다. 상하이 TGA 결승의 마지막 경기에서 CCM은 WE와 붙었다. 상대는 시작하자마자 브랜드와 블라디미르를 밴하고 피들스틱을 먼저 뽑았다. 보다시피 수마다 급소를 노렸고, 준비가 없었다면 곧바로 밀렸을 것이다.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샤오샤오는 비밀 무기를 꺼냈다. 럼블이었다. 상대가 웃었고 샤오샤오도 웃었다.
그럼 붙어 보자¶
그 경기는 BO1, 곧 한 판으로 승부를 가리는 경기였다. WE는 금세 유리한 판을 만들었다. 뤄펑(若风)이 코르키로 원딜을 보고 있었고 이미 아주 크게 성장해 있었다. 아마 상대편에 자기를 잡을 사람이 없다고 여겼는지 뤄펑은 혼자 봇 라인에서 라인을 밀고 있었다. 샤오샤오는 수풀에서 그를 노리기로 했다. 샤오샤오가 뛰쳐나왔을 때 뤄펑은 도망을 고르지 않고 정면으로 맞붙었고 결국 샤오샤오에게 솔로 킬을 당했다. CCM은 그 틈에 바론을 먹고 판을 뒤집어 그해 TGA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을 하고 샤오샤오 일행은 신이 나서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TGA 상금은 몇 달 뒤에야 나오는데 팀의 급여는 여전히 줄 돈이 없었다. 팀 전체가 완전히 바닥났다.
이때가 2011년 6월이다. 중국 e스포츠는 98년부터 시작해 이미 13년이 지났는데, 명색이 전국 종합 우승 팀이 여전히 배를 곯아야 했다.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며칠을 굶은 뒤 단장 HOT은 팀 전체를 데리고 톈진의 부모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때 팀을 온전히 붙들고 있던 것은 생각 하나뿐이었다. 한 달 뒤의 WCG다. 그것은 꿈이었고 자기를 증명할 자리였다. WCG를 위해 모두가 괴로움을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선수 네 명이 기차역에 도착해 출발을 준비하던 그때 한 선수가 전화를 걸어 왔다. 자기는 계속하지 않겠다고, 더는 굶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앞날이 없다고 여겼고 여자친구가 베이징에서 일자리를 구해 주기로 했으므로 남겠다는 것이었다.
CCM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이 고비에 한 사람이 빠지는 것은 사실상 기권과 같았고 기차는 곧 떠날 참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속이 탔지만 그래도 참을성 있게 전화로 그 선수를 설득했다. 여러 해의 우정, 다섯 사람의 꿈, 오랜 시간 맞춰 온 훈련을 두고 마음에 호소하고 이치로 설명했다. 결국 기차 출발 20분 전에 그 선수가 돌아왔다.
다섯 손가락이 하나의 주먹으로 쥐어졌다.
그렇게 톈진까지 갔다. 샤오샤오는 그날 밤 먹은 가장 맛있는 야식을 지금도 기억한다. HOT의 어머니가 사 온 사오빙(烧饼), 곧 구운 밀전병과 두유였다.
한 달 뒤 WCG 중국 지역 결승에서 또 WE와 붙었다. 다들 WCG라는 꿈이 있었으므로 이 경기는 누구에게나 중요했다. WE가 이번에도 경기의 우위를 잡았고 CCM은 힘겹게 기회를 찾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샤오샤오의 팀 동료 루페이(路飞)가 애니의 점멸 궁극기로 WE 선수 다섯 명을 한꺼번에 묶었다. CCM은 기회를 잡아 상대를 전멸시켰고 한 번에 판을 뒤집어 WCG 중국 지역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가 끝나고 다섯 사람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소리를 지르고 뛰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힌 뒤 내린 첫 결정은 이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해산하고 집에 돌아가 각자 훈련하며 한국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얼마나 잔인하게 꿈에서 깨는 순간인가. 아프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운명은 꿈이 있고 움직이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
극적인 장면은 바로 그날 밤에 벌어졌다. 중국 최고 부자 왕젠린(王健林)의 아들 왕쓰충(王思聪)이 CCM 팀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팀 이름은 IG로 바뀌었고 CCM이 선수들에게 밀려 있던 두 달 치 급여도 곧바로 지급되었다.
샤오샤오는 이때부터 정식으로 프로 e스포츠 선수가 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IG.xiaoxiao였다.
젠우훙옌샤오에서 IG.xiaoxiao까지.
쑨야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