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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장. 중국 e축구 올해의 선수, 피파 챔피언 리쥔 SkylinE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四十二 中国电子足球先生 FIFA冠军 李君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6년 7월 14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21482568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리쥔(李君, SkylinE)이 지금 대외적으로 쓰는 직함은 왕쓰충(王思聪) 산하 '바나나 게임(香蕉游戏)'의 부사장이다. 그가 LPL 등 대회의 조직과 운영 업무를 맡은 지 이미 5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클럽 연맹 L.ACE의 초대 책임자로서 L.ACE 연맹의 정관과 규정을 직접 기초해, 중국 LOL 대회의 프로화에 바탕을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모르는 또 하나의 직함이 그에게 있다. 중국 e축구 올해의 선수(中国电子足球先生), WCG 2003 중국 결승 피파 종목 우승자다. 그는 여러 차례 중국을 대표해 WCG 세계 무대에서 싸웠다.

다만 이것은 모두 나중의 일이다. 처음에 그는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 하던 '축구 소년'일 뿐이었다.

1982년 11월 13일, 리쥔은 허난성 정저우(郑州)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렬한 축구 팬이어서 틈만 나면 어린 리쥔을 데리고 집 뒤 마당에서 공을 찼다. 어머니는 리쥔에게 조리 있게 말해 주는 데 능해서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리쥔은 공부가 중상위였고 축구를 몹시 좋아했으며 여름방학에나 게임기를 만지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다 1996년, 집에서 1만 위안 남짓을 들여 그에게 컴퓨터를 한 대 사 줬다. (이 전개, 어딘가 눈에 익다.)

이때의 리쥔은 전자 제품을 아주 좋아했고 프로그래밍에 짙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신문을 보고 프로그래밍을 배우던 중에 《피파 96》이라는 축구 게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자주 가던 컴퓨터방(电脑房)에 그 게임이 있었다. 컴퓨터방은 뒷날의 PC방보다 앞선 형태의 공간이다.

그렇게 해서, 전자 제품 애호가가 전갈자리 프로그래머로 자라나는 이야기는 끝났다.

e축구의 길이 시작되다

리쥔은 《피파 96》을 집으로 복사해 와서 날마다 컴퓨터를 상대로 조작을 익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만 상대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영어를 모르는 채로 컴퓨터 한 대에서 둘이 대전하는 방법을 더듬어 찾아냈고, 사택 단지의 아이들을 불러와 한 사람은 마우스, 한 사람은 키보드를 잡고 겨뤘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보고 차 왔으므로 리쥔은 축구의 전술과 포메이션, 원투 패스 같은 기술에 익숙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단지 안에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어졌다. 그는 예전에 함께 공을 차던 사람들을 찾아가 승부를 걸었지만 역시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잘하니까 좋아하게 된다.

리쥔은 자기가 축구 게임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 자기를 이길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 고3 때 집에 56K 회선이 깔렸고 그는 인터넷에서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 시절 피파 애호가들은 시나(新浪)의 축구 게시판에 자주 모여, 서로 대전을 약속하고 IP 주소로 접속해 기량을 겨뤘다.

그는 그렇게 상하이의 피파 챔피언 Crazy 덩룽(邓荣)을 만났고, 어렵사리 《피파 2001》 한 판을 잡았다.

결과는 10 대 0이었다. 손도 써 보지 못했다.

리쥔은 지금도 그 경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상대의 포메이션은 3-4-3이었다. 그는 이를 갈 만큼 분했지만 남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뒤처져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고, 진 것을 깨끗이 인정했다.

두 번째 일은, 베이징과 상하이 고수들의 경기 방식이 자기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리쥔이 그전까지 하던 방식은 아주 단순했다. 실제 축구의 방식대로 계속 원투 패스를 넣고, 패스하고, 안으로 몰고 들어가 슛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도시의 피파 고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더듬고 시험해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각도로 어느 정도의 힘으로 차면 이 공은 반드시 들어간다는 것을 찾아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지역의 고수들이 아주 닫힌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새로 찾아낸 기술을 이야기했고, 큰 대회 밖에서는 그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 사람 몸의 급소를 몰래 알아낸 것과 같았다. 그와 겨루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해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데, 그쪽은 한 수로 승부를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은 게임을 속속들이 파헤쳐야만 나오는 고급 기술이었다. 리쥔은 그제야 깨달았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었구나.

눈은 트였지만 기술은 여전히 스스로 찾아내야 했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분명히 모자랐다. 주위에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고, 똑똑한 사람들이 무리를 이뤄 함께 연구해야 했다.

그래서 2001년, 허난농업대학(河南农业大学)에 붙은 리쥔은 웹 페이지를 만들 줄 아는 반장을 끌어들여 베이징과 상하이를 본떠 첫 허난 피파 연맹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많았고, 그 가운데 몇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같은 해 리쥔은 뉴스 보도를 통해 WCG라는 대회를 알게 되었고, 중국 선수 린샤오강(林晓刚)과 옌보(阎波)가 한국에서 WCG 2001 피파 종목 2인조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다. 국기를 두르고 시상대에 선 그들의 모습과 2만 달러의 상금을 본 것이다.

리쥔은 이렇게 말했다. 게임을 해서 나라의 이름을 빛내고 상금까지 받는다니, 이러면 죽기 살기로 연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곧바로 목표를 하나 세웠다. WCG 2002에 나가는 것이었다.

이때의 리쥔은 흥분해 있었지만 머리는 맑았다. 오프라인 대회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해는 경험을 쌓는 해로 삼았다.

그래서 《피파 2002》 버전이 나온 뒤 그는 전체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춘 훈련을 했다. 대회가 가까워지자 계획대로 먼저 아버지의 돈 300위안을 훔쳤다. 정저우에는 예선 지역이 없어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시안 지역이었고, 적어도 사나흘 치 먹고 자는 비용이 필요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리쥔은 이것이 혼자서 낯선 도시에 간 첫 경험이자 첫 오프라인 경기였다고 말했다.

첫 경기에서 심판이 시작을 알리는 순간, 그는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얼굴 근육이 계속 떨렸다.

리쥔은 그날 압박이 너무 컸다고 했다. 첫 경기에서 졌다면 그 뒤의 일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리쥔은 시안 지역 2위를 했다. 1위는 자리를 따내려고 광둥에서 올라온 세미프로 선수였고, 두 사람은 함께 베이징에서 열리는 결승에 나갈 자격을 얻었다.

덧붙일 만한 일이 있다. 시안 지역에서 리쥔은 그때 아직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고향 사람 SKY를 만났다. 다만 SKY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아서, 그는 조별 리그에서 지고 분한 나머지 PC방 2층에서 뛰어내릴 뻔했다. PC방은 중국의 인터넷 카페(网吧)로, 한국의 PC방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므로, 이면사 《리샤오펑이 Sky가 되었을 때》 장을 보면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리쥔은 베이징에 가서 2002년 WCG 중국 결승 현장에 들어가긴 했지만, 자기가 경기 경험이 적고 전국의 고수들과 차이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WCG는 세상 구경을 하러 온 것이었으므로, 8강에서 탈락했을 때도 뜻밖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리쥔은 그해 우승자가 베이징 지역의 천디(陈迪)였다고 했다. 크고 잘생긴 천디가 높은 시상대에 서 있는 모습을 무대 아래에서 보며 그는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2002년 WCG에서 리쥔이 얻은 가장 큰 느낌은 이것이었다. 이 게임은 조작만으로는 안 되고, 더 강한 기술을 연구해 내야 하며, 그것도 남이 모르는 기술이어야 한다.

다만 피파 종목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해마다 한 번씩 대규모 버전 업데이트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업그레이드 패치만 나오는 다른 게임과 달리, 새 버전의 피파는 축구라는 주제만 그대로일 뿐 나머지는 전부 바뀐다. 엔진도 시스템도 득점 기술도 완전히 새 게임이다. 지난해에 쌓은 경험이 올해는 쓸모없어진다는 뜻이고, 버전마다 모두가 새 출발선에 선다는 뜻이다.

이것은 리쥔에게 매번 0에서 다시 시작하는 습관을 들여 줬다.

2003년, 피파가 새 세대 엔진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었다. 상하이와 후난, 광둥 지역 선수들이 빠르게 요령을 잡아 가장 강한 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모두 차이나텔레콤(电信) 회선이었고 허난은 왕퉁(网通) 회선이었다. 고수들과 훈련하기 위해 리쥔은 온갖 방법을 다해 정저우에서 차이나텔레콤 회선을 쓰는 PC방을 찾아 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임 사이트가 빈약하고 신문 공략이 뒤늦던 그 시절에 정보를 남보다 먼저 얻기는 아주 어려웠다. 그래도 허난 피파 연맹의 동료들이 있었고, 다들 시간을 다투며 미친 듯이 연구하고 있었다.

리쥔도 그랬다. 그는 날마다 경기장의 위치 하나하나, 포메이션 하나하나, 힘의 세기 하나하나가 득점에 어떤 결과를 내는지 시험했고, 꿈에서까지 그 결정적인 전술을 찾아다녔다.

신기하게도 그는 끝내 꿈속에서 몇몇 득점 지점의 위치에 어떤 규칙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고, 컴퍼스를 꺼내 골문을 중심에 두고 그 점들을 이어 봤다.

깼다. 흥분해서 깬 것이다!

정말로 컴퍼스로 그 반원을 그려 보니, 그 원 위의 모든 점에서 슛을 하면 득점률이 아주 높았다.

새로운 세계의 문이 그에게 열렸다.

리쥔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선수마다 능력치가 다르므로 그는 온갖 능력치의 선수로, 여러 세기의 힘으로, 여러 각도로 슛을 해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수백 가지 조합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는 미친 듯이 연습해 모든 가능성을 손에 넣었다.

연구를 끝낸 뒤에도 그는 우쭐대며 바깥사람들에게 써 보이지 않았다. 계획대로 기술을 감춰 두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주말마다 여전히 PC방에 가서 훈련하며 티끌만큼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리쥔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때는 모든 선수가 비장의 수를 감추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다들 자기 수순을 짜 두고, 마지막에 WCG 결승에서 꺼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2003년에는 사스(非典) 때문에 WCG 예선을 온라인으로 치렀다. 리쥔은 인터넷 속도에 문제가 없도록 일부러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바오지(宝鸡)의 친구 집까지 가서 경기 준비를 했고, 다행히 순조롭게 시안 지역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의 리쥔은 더 이상 10 대 0으로 지던 그 신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국 피파 사이트에서 상위 세 손가락 안에 들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베이징에서 열린 WCG 중국 결승에서 리쥔은 4강에서 천디를 만났다. 1년 전 바로 이 무대에서 크고 잘생긴 천디가 상을 받던 장면이 눈앞에 선한데, 눈 깜짝할 사이에 디펜딩 챔피언이 자기 상대가 되어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이 경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정확히 말하면 천디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일부러 경기를 메인 무대에서 치르게 했다.

리쥔은 더 큰 압박을 느끼게 한 것이 따로 있었다고 했다. 베이징은 천디의 홈이었다. 객석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전부 천디를 응원했다. 그때는 방음 헤드셋 같은 것도 없어서 그는 그 응원 소리에 아주 큰 압박을 받았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화를 잔뜩 품은 채 경기를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천디를 이긴 순간, 그는 그대로 컨트롤러를 내리쳤다. 쌓였던 것이 한꺼번에 풀렸다.

이어서 순조롭게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 3만 위안에 3만 위안짜리 컴퓨터였다. 그는 시상식에서 받은 대형 수표 모형의 스티커를 떼어 내 둘둘 말아 가방에 꽂았다. 집에 가져가 벽에 붙일 생각이었다. 평생의 추억이었다.

그런데 집에 닿기도 전에 리쥔은 놀라 자빠질 뻔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현수막이 보였고,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허난 피파 연맹 맹주 리쥔의 WCG 피파 우승을 뜨겁게 환영합니다!

알고 보니 현지 포털 사이트 상두신시강(商都信息港) 사람들이 일부러 역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그 뒤 《정저우완바오(郑州晚报)》 등 현지 매체도 그의 우승을 크게 보도했고, 집안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축하하러 왔다. 어쨌든 꿈만 같았다.

이해에 리쥔은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그때 자신감이, 심지어 자만심까지 생겼다고 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 결승에 가서도 기세가 아주 높았고 우승을 노렸지만, 자기가 아직 신인이고 국제 대회 경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최고 수준의 대회에서 겨루는 것은 바로 큰 대회 경험과 수순이다.

리쥔은 상대의 수순에 걸렸다. 4강에서 독일 선수에게 탈락했는데, 경기 도중 자기 수가 전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상대가 자기를 속속들이 연구해 둔 것 같았고, 그는 당황했다.

특별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이 독일 선수가 결국 우승자였고 준우승자도 독일 선수였는데, 우승자와 쌍둥이 형제였다. 두 사람은 아주 닮아서 신분증도 그 둘에게는 별 쓸모가 없을 정도였다.

리쥔은 나중에 깨달았다. 그날 연습실에서 자기 뒤에 앉아 있던 쌍둥이 동생이, 신분증에 적힌 그 동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진 것은 진 것이다. 리쥔은 젊은 날의 객기와 방심에 값을 치렀고, 경기장을 나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울다 보니 옆에서 우는 사람이 또 있었다. 보니 조금 전에 독일 쌍둥이 동생에게 탈락한 한국 선수 Volcano였다. 정말 처지가 같은 사람끼리였다. 그 아이가 자기보다 더 서럽게 울어서, 그는 다가가 간단한 영어로 한참 동안 어색하게 달래 주는 수밖에 없었다.

리쥔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고 했다. 1년 뒤에 자기보다 더 서럽게 울던 이 한국 아이가 WCG 2004 세계 챔피언이 되고, 곧바로 은퇴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질 줄은.

2003년은 리쥔에게 아쉬움이 있긴 해도 아주 빛나는 해였다. 그는 국내의 모든 피파 대회에서 우승했고 20만 위안이 넘는 돈을 벌었다. 뒷날 집을 산 것도 이 돈 덕분이었다.

다만 이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전화 한 통을 받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일생을 바꿨을지도 모르는 전화였다.

2003년 말, 리쥔은 자기를 Lion.KinG이라고 밝히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Lion.KinG이 누구입니까?

상대가 말했다. 저는 페이러라고 합니다.

리쥔은 더 어리둥절해졌다. 페이러(裴乐)라니, 중국어로는 '손해를 봤다(赔了)'와 소리가 같은 말이다. 세상에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페이러 KinG이 말했다. 자기가 베이징에서 프로 팀을 하고 있으니 프로 선수를 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리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허난의 피파 판은 아주 작고 아주 닫혀 있어서 그는 e스포츠 프로화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프로를 한다는 게 뭡니까?

페이러 KinG: 월급을 줄 테니 대회에 나가면 됩니다. 우리 팀 로고만 달면 됩니다.

리쥔은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 사기꾼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페이러에게 말했다. 방금 한 말을 글로 써서 공인(公章)을 찍어 보내 주십시오!

페이러 KinG: ...

그렇게 리쥔은 베이징으로 가서 막 만들어진 YolinY(友菱电通) 클럽, 곧 WE 클럽의 전신에 들어갔다. 당시 팀원으로는 워크래프트 3 종목의 쑤하오(苏昊)와 SKY, 스타크래프트의 CQ2000과 마톈위안(马天元) 등이 있었다.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가는 듯했다.

2003년 11월, e스포츠는 국가의 체육 종목이 되었다. 피파 종목은 CCTV-5의 《e스포츠 세계(电子竞技世界)》 프로그램의 친아들이나 다름없었다. 리쥔의 피파 대회 경험은 갈수록 풍부해졌고 이름도 갈수록 알려졌으며, 당시 가장 강한 프로 클럽에도 들어갔다.

2004년 중국과 한국, 독일의 피파 대항전이 열렸다. 현실의 중국 축구가 한국을 두려워하던 이른바 공한증 시기였는데, 리쥔은 경기에서 한국 선수를 12 대 0으로 이겼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제목은 하나같이 이랬다. 중국 용이 태극 호랑이를 완파하다!

리쥔은 이것이 아마 자기 선수 생활의 정점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의 2004년은 아마 중국 e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4월 12일, 광전총국(SARFT)이 게임 프로그램 방송 금지령을 내려 《e스포츠 세계》를 내렸고, 야심 차게 짜 놓은 CEG 대회 계획도 흐트러졌다.

리쥔은 눈을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방송 채널을 잃은 CEG라는 거대한 배는, 이미 CEG 산시(陕西) 대표팀이 되어 있던 YolinY 클럽을 싣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중국에서 피파는 원래 소수 종목이었고, 워크래프트 3가 떠오른 뒤로 피파 대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리쥔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WCG만 남았구나.

그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WCG 2004 세계 결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고 리쥔은 어렵지 않게 출전권을 땄다. 그러나 미국 9·11 사건 이후의 비자 강화 정책에 걸려 중국 대표단 전원이 비자를 거부당했다.

갑자기 나갈 대회가 없어졌고 리쥔의 모든 계획이 흐트러졌다.

2004년 말, 늘 계획을 세워 움직이던 리쥔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막막한 기다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페이러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 밖으로 나가 부딪쳐 보기로 했다.

2005년, 반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먹고살던 리쥔은 싱가포르 WCG 결승에서 중국 최초의 WCG 영상 동시 생중계를 만들러 온 GamesTV 채널의 편집 연출 야오모(妖魔), 곧 장저시(张哲希)를 만났다. 야오모도 축구 게임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두 사람은 이야기가 잘 통했고, 귀국한 뒤 리쥔은 초청을 받아 GamesTV, 곧 유시펑윈(游戏风云)의 전신에 들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집 연출이 되었다.

그 뒤 몇 해 동안의 피파 종목을 지금 돌아보면, 독일 선수들은 2004년 이후 여러 차례 우승했지만 중국은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리쥔은 그 이유를 이렇게 본다. 유럽에는 대회가 아주 많다. ESL 피파 리그가 있고 IEM 리그가 있으며, 특히 FIWC e축구 월드컵이 있다. 이것은 EA와 국제축구연맹(FIFA)이 함께 여는 대회로, 해마다 세계 챔피언이 세계 올해의 축구 선수(메시, 호날두 등)를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유럽 전체의 인터넷 연결 속도는 아주 빨라서 가장 느린 이탈리아도 핑이 34였다. 피파는 네트워크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은데, 중국의 복잡한 네트워크 사정은 국내 교류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대회 쪽을 보면, 국내에서 규모가 좀 되는 피파 대회는 거의 WCG만 남았다. 게다가 버전 심의 문제 때문에 중국의 피파는 새 버전마다 다른 나라보다 반년 넘게 늦었다. 나중에 피파가 콘솔 플랫폼 쪽으로 기울자 EA는 아직 콘솔이 풀리지 않은 중국 시장을 아예 포기했고, 대회까지 홍콩으로 옮겼다. 홍콩까지 가서 대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중국 본토에서 피파 종목이 그대로 공급을 끊긴 셈이었다.

리쥔은 지금까지도 《피파 온라인 3》이 여전히 피파 2013 엔진을 쓰고 있어 패키지판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고 말했다. 여러 이유가 겹쳐 중국의 피파 애호가들은 계속 시대에 뒤처져 왔다.

이런 일들이 리쥔에게는 몹시 안타깝고 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올해 곧 나올 《피파 17》을 하면서 외국 고수들과 교류하려고 일부러 큰 공을 들여 차이나텔레콤의 국제 프리미엄 회선을 신청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지금 더 이상 접수하지 않는다. 교류의 통로가 또 한 번 좁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2012년 10월, 정저우에서 이미 결혼해 아이를 낳고 회사를 차린 리쥔은 다시 한번 페이러의 전화를 받았다. 왕쓰충이 e스포츠 연맹을 하나 만들었으니 나와서 LOL 쪽을 맡아 달라는 초청이었다.

리쥔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물었다. 왕쓰충이 누구입니까?

페이러 KinG: ...

리쥔이 상하이에 와서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클럽 연맹을 넘겨받았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거의 백지 상태였다. 중국 e스포츠의 특수한 이력은 독특한 인터넷 구조와, 제도권과는 완전히 다른 운영 방식을 만들어 냈다.

2011년 무렵은 중국 e스포츠 업계가 빠르게 자라기 시작한 때였지만 질서는 세워지지 않았다. 클럽들은 암흑의 숲 법칙 속에 있어서 서로 의심만 있을 뿐 규칙이 없었고, 걸핏하면 자원을 빼앗고 뒤에서 수를 썼으며 소모전이 심했다.

리쥔은 국제축구연맹의 방식을 참고하자고 제안해 연맹의 여러 규정을 만들었다. 지금 모두에게 익숙한 이적 시장 기간과 각 대회 정관은 모두 그가 앞장서서 만든 것이다.

연맹이 생기면서 아무도 관리하지 않던 e스포츠에 규칙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의 이익을 건드렸다.

리쥔은 규정을 어기고 선수를 빼 간 클럽을 처리했다가 조직폭력배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전화에서 상대는 그의 신변 안전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정저우에 있는 그의 가족 주소까지 읊으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 일은 리쥔에게 큰 충격이었다. 자기가 맡은 자리와 일이 가족의 안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리쥔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 e스포츠는 아주 독특해서 우리 앞에 그대로 참고할 만한 비슷한 사례가 하나도 없다. 해마다 완전히 새로운 피파 게임을 마주해야 하는 것과 같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개척이다. 부족한 곳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탐색으로 경험을 쌓아 가면 이 과정이 점점 빨라지고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2016년 LPL 스프링 시즌은 라이엇(Riot)과 텐센트, 바나나 게임 세 곳이 처음으로 함께 LPL을 연 대회였다. 그 사이의 소통과 실행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는 행사를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스프링 시즌이 잘 끝나서 리쥔은 아주 벅찼다. 이해에 팀 전체가 아주 큰 압박을 짊어졌고 이제야 겨우 궤도에 올랐다. 다만 오랜 피파 프로 선수 생활은 그에게, 지난날이 아무리 빛났어도 그것은 추억일 뿐이며 내년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

중국 e축구 올해의 선수, 피파 챔피언 리쥔 Sky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