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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긴 머리 흩날리며, DC 둥찬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十九 长发飘飘 DC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2월 9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33467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DC의 중국 이름은 둥찬(董灿)이다. 이름난 프로 도타 팀 EHOME이 가장 빛나던 시기의 주장이자 감독이었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GTV의 이름난 진행자다. 1985년 6월 21일 후난성 샹탄(湘潭)에서 태어났다. DC라는 이름은 그의 전체 아이디 DCLXJDC에서 왔다. 자기 이름과 친한 친구 두 사람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왜 하필 그 조합인지는 죽어도 말하지 않는다.

2011년 이전의 DC는 희고 통통한 몸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작은 눈, 부드러운 눈매, 진중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점 두 개가 더해졌다. 중국에서 중매쟁이의 얼굴에 있다고 여기는 자리의 점이다. 산들바람이 불면 긴 머리가 흩날렸다. 이런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함은 그가 널리 사랑받는 e스포츠 해설자가 되리라는 것을 이미 정해 놓은 것 같았다. (허허. 말 안 한 벌이다.)

DC의 부모는 둘 다 국유 기업 직원이었다. DC는 중학교 이전까지 공부를 잘했고, 그래서 취미가 아주 넓었는데도 부모는 그를 크게 붙잡지 않았다. 패미컴이며 오락실 아케이드며 하는 과정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DC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때 화학 점수가 한 자릿수였다. 자기가 이과 쪽으로 이렇게까지 힘을 못 쓴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고, 공부에 자신을 잃었으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현실을 피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했고 수업 시간에는 온갖 책을 읽었다. 양이 놀라울 정도였고 가리는 것도 없었다. 무협 소설, 세계 명작, 역사책, 심지어 정식 판권판 해리 포터까지 읽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압수당한 책도 상자 단위로 셀 정도였다.

DC는 문과 쪽을 좋아했다. 다른 과목의 총점이 국어 점수 하나와 같을 때가 잦았다. 그러나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는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고를 것이 별로 없었고, 후난 야금 직업기술학원(湖南冶金职业技术学院)에 들어갔다. 이 학교의 전공이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과 맞았기 때문이다.

DC는 이 시절을 이야기할 때 아쉬워하면서도 아주 담담했다. 과거가 없었으면 지금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의 그 마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졸업하면 아버지가 사람을 넣어 마련해 둔 제철소 일자리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렇게 한평생을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 바로 그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이 지금의 DC를 만들었다.

2003년, DC와 동급생 몇은 블리자드의 배틀넷에서 워크래프트 3를 하려고 먹을 것을 아껴 가며 모은 돈으로 정품 몇 개를 샀다. 그런데 안에 든 CD키 가운데 쓸 수 있는 것은 두 개뿐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계정 두 개를 함께 쓰며 돌아가면서 배틀넷에 올라가 경기를 했다. (이 일은 다른 주제와도 이어진다. 블리자드의 초기 중국 패키지 게임 유통사였던 아오메이 전자(奥美电子)의 평판은 왜 그렇게 나빴을까? 워크래프트의 CD키를 되풀이해 팔았기 때문이다. 이면사의 뒷부분에서 다룰 내용이다. 덧붙이자면 아오메이는 2005년 10월에 문을 닫았다.)

일찍이 워크래프트 3가 아직 혼돈의 지배 버전이던 시기, 곧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 DC는 워크래프트 3 RPG를 하기 시작했다. RPG는 플레이어가 워크래프트 3의 지도 편집기로 직접 만들어 낸 놀이 방식이고, 워크래프트 3의 일반 대전과는 다르다. 그는 U9 포럼, 곧 유주왕(游久网)에 들어가 관련 게시판의 운영자가 되었다. 프로즌 쓰론 버전 시기, 곧 2003년 이후에는 3C와 해전, 타워 디펜스 같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워크래프트 3 시대의 웹사이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야기의 배경을 알 수 있도록 2003년부터 2010년 사이 워크래프트 3 게임 사이트 몇 곳의 판도를 간단히 짚어 둔다. 이 사이트들 사이의 은원은 이면사 뒤에 따로 한 장을 두어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요약만 하고 펼치지 않는다.

Replays.net, 줄여서 RN은 저우하오(周豪, Zax)가 2002년 7월 22일에 만들었다. 처음 이름은 클래식 리플레이 다운로드 사이트였고 주로 스타크래프트 리플레이를 다뤘다. RN은 2002년에 이미 워크래프트 3로 갈아탔고 여전히 대전 리플레이와 전적 리포트에 무게를 뒀다. 게다가 RN은 WE 팀, 그리고 유시펑윈(游戏风云)의 전신인 GamesTV와 같은 회사에 속해 있었고, 그 회사 아래에 StarsWar와 RTB 같은 성공한 대회가 있어 서로 밀어 주었다. 덕분에 RN은 워크래프트 3 시대, 곧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남이 갖지 못한 자원을 누렸다. 특히 WE.SKY가 WCG 2연패를 차지한 뒤 RN은 그 기세를 타고 워크래프트 3 시대 중국 e스포츠의 주류 사이트가 되었다.

유주왕(游久网, www.uuu9.com)은 처음에 후이린(灰磷)의 개인 사이트였고 2004년 8월 19일에 만들어졌다. RN과 달리 U9은 워크래프트 3 RPG에 무게를 뒀고 당시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RPG 지도 다운로드 사이트였다. 그래서 U9 포럼에는 MOBA 플레이어가 많이 모여들었다. MOBA는 여러 사람이 함께 접속해 겨루는 온라인 경기 게임을 말한다. 이 성격은 뒷날 U9이 진삼과 도타 시기에 떠오르는 밑바탕이 되었다.

어우유왕(偶游网, www.ogame.net)은 차오지완자(超级玩家, Sgamer.com)의 전신이다. 창립자 주쉐바오(朱学宝)가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대부터 해 온 오래된 e스포츠 사이트다. 그러나 워크래프트 3 시대에 어우유왕은 그리 순조롭게 자라지 못했다. 이들도 주력을 워크래프트 3 대전 리플레이에 뒀기 때문에 RN과 정면으로 부딪혔는데, SG에게는 그때 RN이 가진 때와 자리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도타가 떠오르고 기술을 맡던 펑지다(冯佶达)가 2008년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주쉐바오와 함께 차오지완자라는 회사를 세워 게임 개발로 방향을 틀었고, 차오지완자는 그때부터 또 다른 성공의 길로 갔다. 그들이 개발한 온라인 게임은 텐센트에 넘어간 뒤 월 수입이 1,000만 위안에 이른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일들은 주로 우한(武汉)에서 일어났고 2007년 이후로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얼마간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앞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간단히 말하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이 단계에서는 여러 이유로 워크래프트 3가 줄곧 주류 e스포츠 종목이었다. 워크래프트 3 RPG는 하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e스포츠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도타는 번역과 버전 문제 때문에 아직 힘을 모으는 중이었고, 2007년 워크래프트 3가 기울기 시작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2007년 도타가 중국에서 일어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임이 둘 있다.

하나는 삼국지를 소재로 한 RPG 게임 《푸자톈샤(富甲天下)》이고, 다른 하나는 타이완 사람 lovemoon03이 도타를 본떠 만든 《진삼국무쌍(真三国无双)》 RPG 지도다.

2004년 10월 무렵, 하오팡(浩方)의 《푸자톈샤》 전용 구역에서 놀던 플레이어들이 진삼국무쌍을 접하기 시작했다. 진삼도 같은 삼국지 소재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같은 시기의 아직 불안정하던 도타보다 진삼을 더 쉽게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기억이 뒤엉킨 사람도 있다. 진삼국무쌍이 도타보다 먼저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삼이 먼저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이야기를 돌리자면, 중국의 도타 프로 선수 상당수가 걸어온 길은 《푸자톈샤》에서 진삼국무쌍으로, 다시 도타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DC도 기본적으로 이 노선이었다. 2005년, 워크래프트 3 RPG 게시판 운영자 일을 줄곧 잘해 온 덕분에 그는 U9 진삼 게시판의 운영자가 되었다. 그때 U9에는 이미 이름이 조금 알려진 진삼 팀이 여럿 모여 있었고 그중 하나가 진삼 숫자 팀이다. 뒷날 이름난 도타 프로 선수 조합 1177이 이 팀에서 나왔다. 1177은 820과 357을 더한 숫자이고, 두 사람의 이름도 이 팀에서 나왔다.

그 시기 대부분의 e스포츠 애호가는 워크래프트 3 대전 쪽에 관심이 쏠려 있었으므로 진삼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고 대회는 더 적었다. DC는 2005년에 포럼에서 직접 진삼 대회를 연 적이 있다. 상품이라고는 반년치 하오팡 VIP뿐이었지만 다들 무척 즐거워했다.

이 무렵인 2005년에 좀 아쉬운 일이 하나 일어났다. 진삼을 만든 타이완 사람 lovemoon03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러 가면서 버전 갱신을 놓아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진삼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세상에 화가 많던 DC는 일부러 타이완의 바하무트(巴哈姆特) 포럼까지 찾아가 일을 중간에 내팽개쳤다고 그를 욕했다.

그리고 바로 그 2005년에 도타에도 큰 변혁이 일어났다.

지금 돌아보면 도타의 부상은 "운"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운인가. 이면사의 독자 가운데 e스포츠 종목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많을 테니 먼저 도타의 역사를 간단히 짚는다.

도타는 스타크래프트에서 시작해 워크래프트 3에서 꽃을 피웠다. 스타크래프트 쪽으로 도타를 접한 사람은 아주 적으므로 넘어가고 워크래프트 3 혼돈의 지배부터 바로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 짚을 사람은 eul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펑장(风杖), 곧 바람 지팡이라고 부른다. 그는 워크래프트 3가 아직 혼돈의 지배 버전이던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 첫 번째 혼돈의 지배용 도타 지도를 만들었다. 짚어 둘 것은 펑장이라는 이름을 그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뒤를 이은 지도 제작자들이 그의 공헌을 기리려고 그의 이름을 딴 아이템을 만들었고, 그 아이템 이름이 그대로 그의 별명이 되었다. 앞사람을 이런 식으로 기리는 관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양다오(羊刀)라는 이름은 아이스프로그(IceFrog)가 붙인 것이다.

두 번째로 짚을 사람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guinsoo다. 중국에서는 그를 양다오, 곧 양의 칼이라고 부른다. 양다오는 상상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여러 도타 버전의 영웅 설계를 받아들여 DotA Allstars로 묶어 냈을 뿐 아니라 도타 설계 팀도 꾸렸다. 그 안에 뒷날 그를 이어받는 아이스프로그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 이리저리 튀는 습관 탓에, 그리고 효과를 너무 좇은 탓에 그 시기의 도타는 균형이 맞지 않았고 버그도 많았다. 그래서 도타는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영향력은 있었지만 폭발하기 직전의 임계점에 걸려 있었다.

세 번째로 짚을 사람은 2005년에 도타를 넘겨받은 아이스프로그다. 중국에서는 그를 빙와(冰蛙), 곧 얼음 개구리라고 부른다. 블리자드 출신인 그는 성격이 더 진중하고 일 처리도 더 체계적이었다. 그의 손에서 도타는 안정되고 균형이 잡혔으며 마침내 e스포츠 종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아이스프로그는 2005년 6월에 공식 중국어화 팀을 만들었고, Heintje와 Aegis, Harreke 등 몇 사람의 노력으로 도타는 차츰 중국 e스포츠의 무대에 올라섰다.

다시 말해 마침 2005년에 도타라는 게임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진삼 같은 게임의 갱신은 멈췄다. 그래서 MOBA의 핵심 사용자 다수가 진삼 같은 게임에서 도타로 몰려들었다.

덧붙일 만한 이야기가 있다. 들리는 말로 펑장은 뒤에 HoN 제작에 참여했고, 양다오는 리그 오브 레전드로 갔으며, 빙와는 도타 2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세상 참 좁다.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무렵 DC도 도타로 넘어갔지만 무대 뒤에서 조직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편으로 U9 도타 게시판의 운영자로 가끔 대회를 열었고, 다른 한편으로 밍푸쥐(名傅居)라는 팀에서 온라인 경기를 뛰었다. 그때 그들은 결승에서 늘 다른 반프로 팀과 우승을 다퉜는데, 그 팀이 바로 뒷날 천하에 이름을 떨친 Godlike, 줄여서 GL이다.

2006년, CPL이 청두 대회를 열면서 도타 종목을 넣었다.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제법 큰 규모로 열린 도타 오프라인 대회였다고 하며, 그래서 도타판의 선구자들이 많이 모였다.

당시 GL의 주장은 원저우(温州)의 대학생 둘, 완바오루(万宝路)와 샤오슝마오(小熊猫)였다. 완바오루는 담배 상표 말보로의 중국어 이름이고 샤오슝마오는 레서판다라는 뜻이다. 그 대회를 앞두고 두 사람은 두 팀을 내보내고 싶어 했고, 그래서 온라인에서 자주 마주치던 DC를 2팀에 넣고 팀 이름을 잔궈톈샤(战国天下)라고 지었다. 전국시대의 천하라는 뜻이다. 당시 GL 1팀에는 GL 쌍둥이 별이라 불리던 820과 니(逆)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대회에서 두 팀은 결국 3위와 4위를 가리는 자리에서 만났다. 그해 우승한 팀은 Nebula였고 그 팀에는 다들 잘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뒷날 DC와 운명이 여러 갈래로 얽히는 사람, 중국 이름으로 쯔룽(子龙)이라 불린 LongDD다.

CPL 청두 대회가 끝난 뒤 GL 팀은 두 팀을 합치기로 했다. 진용은 다음과 같다.

3번 포지션 820, 니, 서포터 DC, Snoy, Sai, 주장 샤오슝마오

익숙한 아이디가 많이 보이지 않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2007년이 되었고 WCG가 베이징 지역 예선에 도타 종목을 넣었다. 아주 기묘한 해였다. 이때 도타는 WCG 정식 종목이 아니었고 베이징 지역 예선이 곧 중국 지역 결승이었으므로, 참가 팀에게는 상금도 교통비도 숙박도 없었다. 상장 하나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WCG 아시아 챔피언십(ACG) 출전권이 전부였다. GL 팀에는 돈을 빌려 대회에 나간 사람이 몇 있었고 DC도 그때 2,000위안을 빌렸다. 그해 진용은 이랬다.

820, 니, DC, LongDD, Snoy, 주장 샤오슝마오

경기 과정은 넘어가자. GL은 그 경기를 이겨 싱가포르 ACG 출전권을 땄고, DC에게는 그것이 첫 해외 원정이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적지 않은 풍파가 있었다. WCG 중국 지역 대회가 끝난 뒤 DC와 LongDD가 한바탕 크게 다툰 것이다. 주로 전술 문제 때문이었다.

DC는 지금 돌아보면 결국 다들 너무 어렸고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까지 커질 일이 전혀 아니었고 자기 잘못이 더 컸다고 본다는 것이다. 몇 해 뒤에 자기가 먼저 LongDD에게 사과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 다툼의 결과로 LongDD가 GL을 떠났고, DC 쪽은 급히 오스트레일리아 유학생 DiviDust, 곧 tossgirl을 데려왔다.

ACG를 준비하려고 Snoy가 돈을 내어 모두를 스자좡(石家庄)의 자기 집으로 불러 일주일 동안 합숙 훈련을 했다. 갑작스러운 선수 교체 때문에 다들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이 일주일의 오프라인 훈련이 엄청나게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각자 마음에 있던 그늘이 사라졌고, 이어진 싱가포르에서의 닷새는 거의 힘들이지 않은 우승으로 이어졌다.

DC는 그렇게 쉽게 우승한 것이 주로 당시 외국 팀들이 중국 팀의 운영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8강에서 개최국 팀을 만났을 때 뜻밖의 일이 조금 있었다.

그때 GL은 이미 상대의 두 라인을 밀어 곧 이길 참이었고 상대도 GG를 쳤다. 그래서 경기가 끝난 줄 알고 아무렇게나 놀기 시작했다. 상대 진영 샘으로 뛰어들었다가 두세 번 한타 전멸을 당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는데도 경기가 멈추지 않았다. 의아해진 DC 쪽은 일시 정지를 신청하고 심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심판은 이곳 규칙에서는 GG를 쳐도 항복을 뜻하지 않는다고 했다. GL 선수들은 등골이 서늘해졌고, 그때부터 진지하게 상대를 밀어 끝냈다.

이것은 중국 본토 팀이 딴 첫 국제 도타 우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GL 팀은 귀국한 뒤, 자신들의 반프로 생활이 그 우승으로 프로 생활에 순조롭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원을 이야기하러 온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흐지부지 끝났다.

그래서 2007년 말, GL 팀은 제1회 G리그 도타 대회에서 LongDD가 이끄는 EHOME 팀을 이긴 뒤 해체했다. DC도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DC는 몹시 허탈했다. 운명을 바꿔 보겠다던 노력은 결국 한바탕 꿈이 되었는데, 꿈에서 깬 뒤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DC의 아버지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공을 들이고 인정을 써서 공장 인사부장을 집으로 초대해 DC의 면접을 보게 했다. 그러나 DC는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로 그 운명의 갈림길에서 어떤 사람이 DC를 찾아왔다.

그 사람이 도타판의 전설적인 인물 71이다. 당시 EHOME은 팀을 다시 짜는 중이었다. 전에 GL 팀과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여러 번 붙어 봤기 때문에 71은 옆집 아저씨처럼 진중한 DC의 인상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허허. 말 안 한 벌이다.)

이때의 DC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였고, 2008년 초 베이징으로 와서 EHOME 팀의 주장이 되었다. 월급은 1,500위안이었고 숙소가 나왔다.

그 뒤 71의 선택으로 EHOME은 당시 저장대학 교내 팀 avnc의 주장이던 2009(우성, 伍声)와 옛 GL 시절 DC의 동료 Snoy, 그리고 기존 EHOME 선수 두 명을 받아들여 새 EHOME 팀을 꾸렸다. 진용은 다음과 같다.

DC, 2009, LongDD, Snoy, GK

이어진 2008년은 그야말로 EHOME의 시대였다. 다만 그해 도타 대회 우승의 80퍼센트를 가져갔는데도 당시 도타 대회의 상금은 다들 높지 않았다. 그래서 DC는 상금 3만 위안이 걸린 대회 하나를 놓친 것을 아쉬워한다. 차이나조이(ChinaJoy)에서 하오팡이 연 대회였고, EHOME은 820이 이끄는 상하이의 CaNt 팀에게 졌다. 당시 CaNt에는 TTi에서 임시로 빌려 온 BurNing이 있었다.

그 패배를 이야기하면서 DC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주된 이유는 LongDD와 Snoy가 차이나조이 현장에서 미녀들에게 눈이 팔렸기 때문인 것 같다고.

CaNt 이야기가 나왔으니 간단히 소개해 둔다. 영국 유학생 파사오(发烧)가 상하이에 만든 프로 도타 팀이다. 파사오는 열이 난다는 뜻이고, 중국어에서 무언가에 푹 빠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실력이 아주 강해서 2008년의 도타 대회는 거의 EHOME과 CaNt의 싸움이었다. 양쪽이 드러내 놓고도 싸우고 뒤에서도 싸운 이야기는 정말 볼만하다. 이것은 뒤에서 천천히 이야기한다.

2008년 WCG 아시아 챔피언십(ACG)에서 EHOME은 다시 한번 무난하게 우승했고 그 뒤 2009가 은퇴했다. 그 과정은 다들 잘 아는 이야기이니 더 말하지 않겠다. 대신 그 전에 일어난 심각한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다들 싱가포르로 떠나던 날, 선수 전원이 오후 1시에 상하이로 날아가 오후 6시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때 LongDD가 갑자기 항저우로 여자친구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겠다고 해서 아무도 막지 못했다. 당시 상하이와 항저우 사이에는 아직 고속철도가 없어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고 왕복에 네 시간이 넘게 걸렸다. 모두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LongDD가 마지막에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 일은 대회가 끝난 뒤 EHOME이 그를 내보낸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런 일들을 보면 그때의 LongDD는 감정을 첫째로 두는 사람이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지나치게 기분대로 움직였다. 다행히 지금은 훨씬 성숙해졌다고 DC는 말한다.

2008년 ACG가 끝난 뒤 EHOME은 CaNt에서 820과 357을 데려왔고 LongDD는 CaNt로 들어갔다. 이로써 두 팀의 전쟁은 한 단계 올라갔다. 다만 DC에게 난처했던 것은, 얼마 뒤 한 경기에서 EHOME이 LongDD가 이끄는 CaNt에게 완패했다는 사실이다. LongDD는 EHOME의 고지에서 펜타킬까지 해내며 옛 소속 팀을 철저히 모욕했고, 앞선 일의 앙갚음을 시원하게 했다.

2008년 말에는 EHOME과 CaNt가 함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SMM 대회, 곧 Sendi Mutiara Multimedia Grand National DotA Tournament에 나갔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온 국민이 도타를 하던 참이라 e스포츠 분위기가 대단히 뜨거웠고 우승 상금은 인민폐 8만 위안이었다. 그때로서는 이미 상금이 가장 높은 도타 대회였다.

DC는 그 대회에서 EHOME의 운이 아주 좋았다고 말한다. 대진 추첨에서 만난 팀이 전부 이름 없는 팀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CaNt는 운이 아주 나빠서 인도네시아의 XCN, 말레이시아의 KS처럼 당시 가장 강한 팀만 만났다. 그런데도 CaNt는 하나씩 관문을 뚫고 승자조 결승까지 올라와 EHOME을 만났고 거기서 EHOME에게 졌다. 그리고 EHOME이 끝내 우승했다. 지금 말하고 보니 운명이 사람을 참 얄궂게 굴린다.

2008년이 끝날 무렵 EHOME 안에서 얼마간 요동이 있었다. 당시 선수들의 급여 대우가 여전히 아주 낮았고, 팀을 꾸릴 때 구단이 한 약속 몇 가지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들 이것이 몹시 불만이었다. 그래서 Snoy와 GK는 바로 은퇴했고, DC는 주장으로서 2009년에 새 선수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함께 은퇴했다.

원 없이 꾼 프로 선수의 꿈이 끝났다. 이만하면 됐다. DC는 설을 쇠러 집으로 돌아갔다.

2009년, DC가 집에서 얼마간 쉬고 있을 때 당시 GTV 운영센터 총감독이던 텅린지(藤林季)가 71을 통해 DC를 찾아 GTV에 들어와 도타 해설을 맡아 달라고 청했다.

고민 끝에 DC는 다시 한번 베이징으로 왔다. GTV의 해설이 되었고 EHOME 팀의 감독도 겸했다. 새로운 세계가 DC 앞에 펼쳐졌다.

해설을 막 시작했을 때 DC는 여전히 선수의 시선으로 말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을 때가 잦았다. 그러다 날마다 두 시간짜리 종합 프로그램으로 단련한 뒤부터 DC는 해설에서 더 폭넓은 진행자로 자라기 시작했다.

2009년 말 GTV가 주관한 델 에일리언웨어(Dell AlienWare) 텔레비전 리그에서 DC는 전문적인 해설과 정확한 예측으로 시청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고, 애호가들은 그를 중국 도타 해설 제일인자라고 불렀다. 그 뒤로 DC는 줄곧 GTV에서 일했고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도 그렇다.

2010년 이후의 이야기는 몇 해 더 지난 뒤 다음 이면사에서 하겠다.

하나만 짚어 둔다. 2011년, DC는 여러 해 기른 긴 머리를 잘랐다.

왜 잘랐을까?

그는 여전히 죽어도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