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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이타오와 2009, 숙명의 충돌

《ONE MORE WAY: 중국 e스포츠의 이면사》 중 한 장. 저자 BBKinG(류양, 刘洋).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九 海涛和2009的宿命撞击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3년 11월 25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622500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1986년 6월 18일, 유명한 도타(Dota) 해설자 저우링샹(周凌翔), 곧 하이타오(海涛)가 장시성 주장(江西九江)에서 태어났다. 하이타오는 바다의 큰 물결이라는 뜻이다. 9개월 뒤인 1987년 3월 23일에는 유명한 도타 세계 챔피언 우성(伍声), 곧 2009가 산시성 윈청(山西运城)에서 태어났다. 운명이 이 시대를 조금 더 시끌벅적하게 만들기로 정해 둔 것만 같다.

하이타오는 유시펑윈(游戏风云) 시절 나의 옛 동료이고, 2009는 지금 WE 클럽의 동료다. 나는 두 사람과 각각 아주 오래 함께 일했다. 지금은 둘 다 도타 해설 일을 하면서 제법 잘되는 타오바오(淘宝) 가게도 함께 꾸리고 있지만, 나는 줄곧 이 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하이타오를 인터뷰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을 한자리에 놓고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인터뷰가 깊어질수록 두 사람이 자란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했다. 같은 것도 있었고 정반대인 것도 많았다. 둘을 나란히 놓고 쓰면, 2011년의 그 떠들썩했던 타오9 대전이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었고 두 사람만을 대표하는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타오9는 하이타오의 "타오"와 2009의 "9"를 붙여 만든 말이다. 그것은 오늘의 중국 사회에서 완전히 다른 두 사고방식이 길러 낸 숙명의 충돌이었다.

하이타오는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장 현지의 요식 서비스 회사 지배인이었다.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성격이 무던하고 시원시원해서 친구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하이타오가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하이타오는 부모가 이혼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다만 그때 부모가 다시 합치기를 몹시 바랐다고만 했다. 그때부터 6년 가까이 양쪽을 오가며 설득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가 열다섯 살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는 마침내 다시 합쳤지만, 이 경험은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하이타오를 그때부터 무척 독립적이고 조숙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성(2009)은 산시성의 배경이 제법 괜찮은 집에서 태어났다. 몇 해 전 온 가족이 시안(西安)으로 옮겼는데, 우리가 시안으로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어머니가 차를 몰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적이 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아주 자애롭고 슬기로운 분이었다. 2009와 함께 캠퍼스 투어를 다닐 때 그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고위 임원인 듯했는데,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고 나도 그때 깊이 캐묻지 않았다. 아주 전통적인 엄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대개 웃음기 없는 기 싸움이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 윗세대가 "컴퓨터 게임"에 대해 품은 뿌리 깊은 의심이 겹쳤다. 그래서 막 도타 프로 선수를 시작한 2009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고집이 센 2009는 밖에서 지지 않겠다며 버텼고, 어머니는 한편으로 중간에서 사이를 누그러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몰래 2009에게 돈을 부쳐 생활을 유지하고 꿈을 이어 가게 했다. 많은 사람이 모를 텐데, 2009가 처음 팀을 먹여 살린 돈은 모두 어머니가 몰래 준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2009를 비롯한 e스포츠인들을 위해 한마디 해 두고 싶다. 많은 사람이 그들이 나중에 거둔 것만 보고, 처음에 압박과 위험을 무릅쓰며 대가를 따지지 않고 쏟아부은 것은 보지 않는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

태어난 배경으로 보면 2009와 하이타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같은 점은 둘 다 여러 이유로 무척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이타오는 아버지의 성격이 아주 너그러웠기 때문이다. 2009는 2002년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집에서 그를 상하이 위차이 중학(上海育才中学)으로 옮겨, 이른바 가오카오 이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오카오 이민은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를 더 유리한 조건에서 치르려고 다른 지역으로 학적을 옮긴 학생을 가리킨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열다섯 살 소년의 타지 유학이 시작되었고, 그러고도 2005년에 높은 점수로 저장대학(浙江大学)에 들어갔다. 이것은 아주 강한 자기 통제력뿐 아니라 상당히 독립적인 주체 의식도 필요한 일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하이타오는 중국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话)를 잘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방송실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하이타오의 가족 중에 푸퉁화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사투리 억양이 없는 그의 푸퉁화는 전부 독학으로 익힌 것이었고, 이 별난 결과는 남들이 보기에 잘 이해되지 않는 취미 하나에서 나왔다. 하이타오는 어려서부터 뉴스 보기를 좋아했다. 진행이 빠르고 바깥세상의 새로운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좋아한 것이다. 어릴 때 뉴스 앵커를 흉내 내던 일이 지금 하이타오가 가진 해설과 진행 스타일의 밑바탕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만 봐도 두 사람은 이미 완전히 다르다. 하이타오는 전통적인 의미의 모범생 같아 보이고, 2009는 사납고 예민한 상어에 가깝다. 다들 알아챘겠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다른 가정의 사고방식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 대학 시절에 이르면 두 사람의 가치관 차이는 더 벌어진다.

2004년 하이타오는 사오관대학(韶关大学) 법학과에 붙었다. 법학과를 지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하이타오는 자기가 말솜씨는 제법 좋으니 변호사가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법이란 말솜씨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한동안 방향을 잃기도 했다. 1학년 때 동아리를 고르면서 그는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학교 방송국만은 일부러 피했다. 그러나 정해진 일은 결국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어느 동아리 연설 행사에서 그는 참관하러 온 학교 방송국 책임자의 눈에 들었고, 다시 방송국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 대학 방송국에서 하이타오는 당시 동료이자 지금의 아내인 자오자(赵佳)를 만났다. 따져 보면 10년 가까운 인연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때문인지 하이타오는 가족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인생에서 큰 결정 여러 개가 가족과 얽혀 있는데, 이것은 뒤에서 차차 이야기하겠다. 다시 2009를 보자.

2005년 우성은 저장대학 생물의학 전공에 들어갔다. 2009에게 대학 진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드디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2009의 성격은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끝까지 간다는 쪽이다. 그는 전 여자친구가 《오투잼(劲乐团)》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 게임을 비인간 등급까지 파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임 안에서는 실력에 따라 신인, 중급, 고급, 비인간의 네 등급으로 나뉜다. 또 자기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도타의 미드 자리를 아무도 당해 내지 못할 수준까지 갈고닦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2009는 2학년 때 도타를 접했고, 3학년 때 저장대학 학생들로 이루어진 avnc 팀에 들어갔으며, 2008년에는 Ehome에 합류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ACG 아시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2009에게 이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지 않으려는 마음과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이 있었고, 그것이 온갖 어려움을 밀어낼 수 있었던 핵심 이유다. 이 성격을 기억해 두면 뒤에 벌어지는 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004년 대학에 들어간 뒤 하이타오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워크래프트 3를 계속했다. 2006년 초 StarsWar2 이후 유시펑윈의 워크래프트 3 황금 해설 콤비 "BBC + 라오양(老杨)"이 가장 잘나가는 시기에 들어갔고, 하이타오는 날마다 유시펑윈에서 그들의 해설을 봤다. 그러나 2009 같은 광적인 면은 없었다. 하이타오는 줄곧 학교에 다니고 게임을 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2007년 어느 날, 유시펑윈 공식 사이트에 "보톈보디(播天播地)"라는 해설 영상 공모전이 올라왔다. 대략 하늘도 중계하고 땅도 중계한다는 뜻이다. 접수 사이트에는 게임 해설 영상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었을 뿐 아니라, 하이타오의 마음을 끄는 상품도 걸려 있었다. 1등을 하면 상하이에 무료로 다녀오면서 BBC, 라오양과 함께 워크래프트 3 경기 하나를 해설할 수 있었다. 하이타오는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DV 카메라가 있는 친구를 찾아 촬영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나서는 해설을 했다. 뒤에 이 출품작은 1등을 했고, 하이타오는 바라던 대로 상하이에 오게 되었다.

하이타오의 이 영상은 유시펑윈의 책임자인 천젠수(陈剑书)와 야오모(妖魔)의 눈길을 끌었을 뿐 아니라 PLU의 수장 Friend의 관심까지 끌었다. Friend는 하이타오를 PLU로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천젠수가 놓아주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유시펑윈과 PLU는 전략적 협력 관계였으므로 이 일은 작은 삽화로 끝났다.

상하이에 다녀온 뒤 하이타오는 잠깐 생각한 끝에 유시펑윈에 인턴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수당은 500위안뿐이었고 상하이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는 결단을 내려 대학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시험은 제때 보러 오고 성적도 떨어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가족과 여자친구에게 작별을 고한 뒤 상하이로 왔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유시펑윈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하이타오에게 그 시기는 정말로 고통스러우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베이구(闸北区) 다닝 인터내셔널(大宁国际) 옆 단지의 공동 임대 주택에 살았는데, 방 셋에 거실 하나인 집에 열네 명이 함께 있었다. 월 280위안짜리 작은 칸막이 방이었고 인터넷도 없고 여유 공간도 없어 몸 하나 누일 정도였다. 밤이면 옆방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그 때문에 귀마개와 안대를 해야 잠들 수 있는 버릇이 생겨 지금까지도 고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하이타오의 동료였던 내가 그 시기에 받은 인상은 늘 웃는 얼굴이었다.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비바람을 뚫고 다녔고, 어떤 프로그램에 더빙이나 출연이 필요하든 한마디만 건네면 다 하겠다고 했다.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무엇이든 붙잡아 자기를 단련했고 대가는 전혀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BBC가 출장을 가자 하이타오가 그의 진행 자리를 대신해 13시간 연속으로 생방송을 했다. 유시펑윈 동료들은 모두 이 부지런한 동료를 좋아해서 자주 밥을 사 주었다. 그가 수당과 회사가 날마다 보태 주는 점심 말고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는 것을 다들 알았기 때문이다. 117과 BBC는 줄곧 그를 동생처럼 챙겼고, 하이타오는 지금도 그 일을 고맙게 여긴다.

하이타오는 유시펑윈에서 보낸 그 2년이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말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 그들이 나중에 거둔 성공을 시샘하지 말기 바란다. 욕하기 전에 먼저 자기에게 물어보자. 정말로 그들처럼 대가를 따지지 않고 먼저 쏟아부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2009년 세계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유시펑윈이 조직을 줄이고 조정하면서, 하이타오는 천젠수의 권유로 당시 우시(无锡)에 있던 PLU로 갔다.

그때의 PLU는 사람이 별로 없는 우시의 신도시로 옮겨 간 상태였지만, 이미 기계식 키보드 판매와 웹 게임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PLU의 CEO 천치둥(陈琦栋, Friend)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많은 좌절을 겪고도 그는 바깥에 기대지 않고 열몇 명을 이끌고 벼랑 끝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새로운 "자기 관심도의 수익화" 방식들을 과감하게 이것저것 시험했고, 지금까지 걸어와 결실을 맺었다. PLU라는 팀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뜻이다.

하이타오는 이런 팀에서 두 번째 배움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두 프로그램을 맡았다. 하나는 유쿠(优酷) 게임 채널과 함께 만든 《게임 화요일(游戏星期二)》이고, 다른 하나는 《도타 올스타의 밤(DOTA全明星之夜)》이었다. 그가 도타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그전까지 도타는 그에게 그저 오락거리였다.

바로 이때, 고향에서 여러 해 동안 묵묵히 하이타오를 기다려 온 대학 시절 여자친구 자오자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줄곧 하이타오의 일을 응원했지만 청춘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결혼인가 이별인가. 현실의 문제가 마침내 하이타오 앞에 놓였고, 하이타오는 망설임 없이 가정을 택해 돌아가서 결혼하기로 했다. 막 시작한 도타 프로그램은 포기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현지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 뉴스 앵커를 시작했고, 당시 월급은 2,000위안뿐이었다.

하이타오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여러 해를 기다려 주고 당시 그가 빈털터리인 것도 개의치 않은 여자 자오자와 결혼했다. 결혼반지는 하나만 샀고, 집은 부모가 계약금을 내주었으며 대출은 두 사람이 갚았다. 지금은 다 갚았다. 모든 것이 아주 단출했다. 그렇게 하이타오는 2010년 6월 자오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가정은 이루었지만 이때 하이타오는 일 쪽에서 즐겁지 않았다. 뉴스 앵커에서 기자로 옮긴 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체제 안에 있는 방송국에는 제약이 더 많았다. 그는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2010년 10월부터 그는 기자 일을 하면서 틈이 나면 도타 해설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은 그저 이 취미를 놓을 수 없어서 답답함이나 풀어 보자는 것이었는데, 한번 시작하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날마다 Replays.net, Sgamer, U9에서 도타 리플레이를 받아 와 해설했다. 유시펑윈과 PLU에서 배운 경험, 또렷한 푸퉁화, 여러 해에 걸쳐 다진 탄탄한 진행 기본기 덕분에 그는 아직 그리 번성하지 않았던 당시 도타 해설판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2010년은 마침 도타가 2007년에 일어선 뒤 세 번째 해였다. 이 해가 바로 도타가 스타를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이 게임은 앞선 몇 해의 보급을 거쳐 해외 유학생들의 손으로 중국 대학가에 들어와 있었고, 이 무렵 도타 프로 선수들도 대회를 통해 애호가들 앞에 계속 노출되기 시작했다. 신단에 오르기까지 남은 것은 미디어의 마지막 한 걸음뿐이었다.

하이타오는 마침 이 좋은 시기를 만났다. 게다가 그 자신이 비교적 정통적인 텔레비전 해설자의 인상을 갖고 있어서, 당시 도타판에 여러 쪽이 다 받아들이기 쉬운 해설 분위기를 가져왔다. 그래서 곧바로 수많은 도타 유저의 애정과 지지를 얻었다.

2011년 중반, 한 SNS 사이트가 하이타오를 찾아와 그의 영상에 광고를 싣고 싶다며 SNS 안에서 몇 가지 상호작용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보수는 6,000위안이었다. 하이타오의 첫 수입이었고 그는 이것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영상 해설이 해 볼 만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자리에서 자기를 그토록 답답하게 하던 방송국 일을 그만두고 영상 해설과 시청자 관리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하이타오는 그 뒤 수익 방식을 찾는 데서 아주 보수적이었다. 2011년 11월 1일 전까지 그는 타오바오 가게를 열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의 수익 구상은 남의 광고를 대신 실어 주는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 공동 구매라는 개념이 뜨던 때였고, 하이타오는 한편으로 자기 시청자들의 도타 상품 수요가 계속 오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체들에게 e스포츠의 거대한 상업적 가치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이타오는 TEE7의 사장 쉬커(许可)를 찾아가 도타를 주제로 한 옷의 공동 구매 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상품 하나를 정해 두고 손님이 하이타오의 이름을 대면 할인을 받는 방식이었다. 몇 차례 협력한 뒤 쉬커는 TEE7 옷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하이타오의 영상에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그 뒤 하이타오는 자페이옌(加菲盐)과 BBC가 직접 타오바오 가게를 연 것을 보고, 2011년 11월 1일 시험 삼아 자기 타오바오 가게를 열었다. TEE7이 여전히 주력 상품이었다. 상품 종류는 단순했지만 내가 알기로 당시 매출은 이미 월 30만 위안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미 일선 e스포츠 프로 선수 다수가 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하이타오가 e스포츠인 가운데 처음으로 타오바오 가게를 연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제자리에 갇혀 있던 e스포츠계의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정말로 부유해질 수 있는 길이며 자기 노력만으로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큰 자본도 큰 팀도 필요 없었다. 해설만 잘하고 시청자만 잘 챙겨서 관심을 충분히 모으면 곧바로 돈으로 바꿀 수 있었고, 게다가 관련된 모든 쪽이 즐거웠다. 오래 이어 갈 수 있는 장사였다.

이제 같은 시기의 2009를 보자.

2008년 ACG 우승 뒤 우성(2009)은 은퇴를 선언하고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 2009년 8월에는 FTD(For The Dream) 팀을 만들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 뒤 1년 동안 성적도 어느 정도 냈고 라오간뎨(老干爹) LGD와 성광톈이(圣光天翼) SGTY의 이중 후원도 받았지만, 관리 문제가 늘고 부유층 2세들의 선수 빼내기 경쟁이 시작되면서 2009는 물러날 마음을 품게 되었다.

2010년 8월 우성은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같은 해 11월에는 해설 생활을 시작했고, 2011년 11월 6일 자기 타오바오 가게를 열었다.

지금 하이타오와 2009는 둘 다 자기 사업을 일정한 규모로 굳혔다. 그런데 운영 방식에서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여럿 드러난다.

하이타오는 지금까지도 고객 응대 직원이 네 명뿐이고 상품은 전부 업체가 대신 발송한다. 반면 2009는 타오바오 가게를 연 뒤 거액을 들여 의류 프린팅 기계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 고객 응대와 포장 인력 50여 명을 뽑았다. 그의 사업은 지금 옷, 식품, 장식품, 웹 게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2009의 성격을 기억하는가.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끝까지 간다. 그것이 2009다. 이 말에는 좋고 나쁨의 뜻이 전혀 없다. 평탄하게 한평생을 사는 것과 큰 풍파 속에서 한평생을 사는 것은 사실 두 가지 선택일 뿐이고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1년 하이타오와 2009 사이의 이른바 "타오9 논쟁"도 결국은 두 인생관의 충돌일 뿐이었다. 완전히 다른 그들의 생각은 어려서부터 겪은 온갖 요인과 시간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래서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바꿀 수 없게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생각의 차이가 큰 틀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화해하고 마음을 풀었다. 그래서 2012년 StarsWar7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한 무대에 올라 현장 경기 해설을 함께 했다.

2012년 하이타오는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온갖 사업 협상에 싫증이 나서 영상 속 광고를 모두 중단하고 유시펑윈으로 돌아가 옛 동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09는 사업을 넓혀 항저우(杭州)에 두 개 층을 빌리고 자기 회사를 차렸다.

보라, 이것이 인생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택을 할 뿐이다.

이야기는 다 했다. 이제 마무리할 때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를 보면, 중국 e스포츠인의 생태 환경은 2010년 이후의 이 시기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큰 시대 배경을 돌아보면 다음 몇 가지가 눈여겨볼 만하다.

  1. 또 내 e스포츠 종목 흥망론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타는 해외에서 일찍 태어났지만 중국에서는 중국어 현지화와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려 2007년에야 정식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2010년과 2011년에 세 번째 해와 네 번째 해의 정점에 들어갔다. 도타의 스타들이 신단에 오르기 시작했고 각종 해설과 대회의 주목도가 정점까지 올라갔으며, 카메라 앞에 선 e스포츠인 다수가 좋은 시기를 만났다. 다섯 번째 해인 2012년에 이르러 도타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해 중반 이후 쇠퇴가 빨라졌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도타의 황금기는 지나갔다. 물론 이것은 모두 뒷날의 이야기다.

  2. 2010년 12월 8일 유쿠가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정식으로 상장했다. 2010년 이전에 게임은 유쿠의 강점이 아니라 투더우(土豆网)의 강점이었다. 유쿠는 상장 뒤 여러 방면에서 크게 손을 뻗기 시작했고, 유쿠가 네트워크 대역폭과 사용자 경험에서 나아지면서 많은 도타 해설자가 투더우에서 유쿠로 옮겨 갔다. 이것이 유쿠 게임이 판을 뒤집는 기반이 되었다. 유쿠 게임 채널도 아주 영리하게 그 시기에 실질적인 이익 분배가 있는 해설자 연맹을 꾸려 새로 들어온 해설자를 많이 도왔다. 크게 보면 이것은 유익한 일이었다.

  3. 2010년 이후 중국 e스포츠 애호가의 중요한 축인 대학생은 대체로 스무 살 안팎의 90년대생이 되었다. 이들은 80년대생보다 소비 능력이 강하고 게임을 받아들이는 정도도 높았다. 이것은 시대가 준 기회였다.

2011년 말의 이 시기를 나는 중국 e스포츠의 이정표라고 본다. e스포츠가 마침내 땅에 발을 붙이고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아냈다. 크고 실체 없는 업체 후원을 더는 쫓지 않았고, 국가의 지원이나 부유층 2세가 돈을 쏟아붓는 일에 더는 희망을 걸지 않았다. 마침내 중국 e스포츠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자기 능력을 분명히 파악하며,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관심도의 수익화"라는 길을 착실하게 걷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값으로 물건을 팔 수 있어야 남을 대신해 광고 모델이 되어 남의 물건을 팔아 주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남에게 돈을 벌어 줄 수 있어야 남도 우리에게 광고를 주고 후원 금액을 올려 준다. 사실 아주 간단한 이치인데, 중국 e스포츠는 10여 년을 비틀거리며 거꾸로 걸었다.

하이타오와 2009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e스포츠인이 이 이정표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나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러분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