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유쿠는 미디어가 아니다, 게임 편집장 시우차이(秀才)¶
저자 BBKinG(류양, 刘洋)이 계획했으나 끝내지 못한 두 번째 책 《중국 게임의 이면사》 중 한 장. 중국어 원문에서 번역: 二 优酷不是媒体 游戏主编 秀才
저자의 즈후(知乎) 칼럼에 2014년 9월 13일 처음 게재: https://zhuanlan.zhihu.com/p/19847893
이 번역은 2026년 8월 3일 중국어 원문과 대조해 검토했습니다. 오역, 잘못된 표기, 사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이슈를 열어 주시거나 풀 리퀘스트를 보내 주세요.
시우차이(秀才), 본명 저우예(周晔)는 현재 유쿠(优酷)의 게임 편집장이다. 1981년 7월 14일 장쑤성 우시(无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역사를 좋아했고 집에 책이 아주 많아 두루 읽었다. 특히 한문 고전을 읽는 데 능했고 《삼국지연의(三国演义)》를 몹시 좋아했다. '시우차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나왔다. 시우차이는 옛 과거 시험의 가장 낮은 단계에 합격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불쑥 떠오른 생각, 그리고 상하이 희극학원 연출과 합격¶
2000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시우차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한 편 봤다. 상하이 희극학원(上海戏剧学院)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는 푹 빠져서 봤고 문득 이 학교가 아주 재미있어 보인다고 느꼈다. 거기서 이 학교에 지원해 보자는 생각이 싹텄다.
그런데 희극학원에는 예술 전공밖에 없었고 그는 당시 이과생이었다. 이과생도 지원할 수 있는가? 이것이 부모를 설득한 뒤 그가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대학 입시 지원서에 '예술과 이과를 겸해 지원할 것인가'라는 항목이 하나 있어서, 거기에 표시만 하면 지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씨름한 끝에 시우차이는 우시의 그 중고등학교가 문을 연 지 100년 만에 처음으로 예술로 방향을 튼 이과생이 되었다.
예술 계열 시험은 어렵다.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은 문을 하나 찾아냈다는 뜻일 뿐이었다.
무슨 전공을 볼 것인가? 시우차이는 상하이 희극학원 모집 요강을 붙들고 보고 또 봤다.
예술 전공은 대부분 여러 해의 전문 훈련이 필요했다.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비교한 끝에 그는 자기에게 맞아 보이는 전공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연출과였다. 연출과의 지원 조건이 가장 두루뭉술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조금씩은 알아야 하지만 어느 하나에 통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시우차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연출과를 보러 가는 것이라고 자조하듯 말한다.
그런데 연출과가 들어가기 쉽다고 정말 여겼다면 큰 착각이다. 기준이 흐릴수록 가늠하기가 더 어렵다. 그해 전국에서 2000명 가까이가 상하이 희극학원 연출과에 지원했고 최종 합격자는 16명이었다. 게다가 연출과 지원자는 사회 경험과 영상 업계 경력이 풍부한 사람이 많았고 나이도 제법 많았다. 시우차이 같은 그해 고등학교 졸업생이 중년들 무리와 겨루자니 승산이 정말 낮았다.
게다가 연출과 시험은 3차까지 치러야 했다.
1차는 구체적인 제목을 주고 촌극을 연기하게 하는 시험이었다. 비교적 구체적인 제목 열 개를 주면 하나를 골라 15분 동안 준비해서 5분짜리 촌극을 한 편 연기한다. 예술 전공 학생에게는 비교적 쉽지만 시우차이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이쪽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는 간신히 통과했다.
2차는 추상적인 제목으로 촌극을 하는 시험이었고, 시우차이가 받은 제목은 '검은색'이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당신이라면 이 제목을 받았을 때 어떻게 연기할지 생각해 봐도 좋다.
2차에는 온갖 방향으로 뻗은 질문 열 개를 뽑아 답하게 하는 순서도 있었다. 지식의 폭과 사회 경험이 어떤지를 보는 것이다. 원래 이것은 시우차이에게 큰 시험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책을 두루 읽는 취미가 그를 크게 도왔다.
이제 시우차이가 '검은색'이라는 제목을 받고 어떻게 연기했는지 이야기하겠다.
그는 빠르게 준비를 마친 뒤 '고3 야간 자율 학습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는' 촌극을 연기했다. 정전 전에 반 전체가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써 내려가던 억눌린 분위기, 정전 뒤의 막막함과 어둠 속의 비명과 해방감, 전기가 들어온 뒤의 어색함, 그리고 다시 돌아온 바쁘고 억눌린 분위기를 5분이 안 되는 촌극 하나로 보여 줬다. 작지만 팽팽한 생활의 한순간을 빠르게 붙잡아 낸 것이다.
3차는 영화평 쓰기였다. 현장에서 영화를 한 편 틀어 줬는데 펑궁(冯巩)이 주연한 《매복(埋伏)》이었고, 다 보고 나서 바로 써야 했다. 이것도 그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시우차이는 전국 5등의 성적으로 상하이 희극학원 연출과에 합격했다. 지난 세기 40년대에 세워진 이 예술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많은 사람이 물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게임의 이면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접어 두겠다. 계속 읽어 보시라.
개학을 하고 시우차이는 상하이 희극학원 1학년이 되었다. 16명이 두 반으로 나뉘어 선생 한 명이 여덟 명씩 맡아 가르쳤고, 영상과 관련된 모든 전공을 배웠다. 다만 각 전공만큼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1, 2학년 때는 연기를 배우고 3, 4학년 때는 다른 전공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요구는 무엇이든 알되 깊이 파고들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연출 전공은 판 전체를 쥐는 사람이라면 한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가 아니라 두루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본다. 총경리와 장교를 길러 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출과를 나온 사람은 영상 쪽 어느 직군으로 가도 된다. 시우차이는 지금 실력파 배우 가운데 연출과 출신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꾸로 가기는 아주 어렵다. 사람은 때로 자기가 잘하는 것에 갇힌다.
상하이 희극학원은 해마다 4학년 졸업생들이 함께 졸업 공연을 올린다. 연출과와 연기과가 각각 하나씩 올리고, 양쪽이 같은 학년의 다른 전공 학생들을 데리고 함께 완성한다. 해마다 가장 큰 행사다.
4학년 졸업 공연을 마치고 나니 시우차이네 반 16명 가운데 12명만 남아 있었다. 탈락률이 아주 가혹했다.
게임과 맺은 인연¶
시우차이는 1학년 때 게임을 좋아한 덕에 한 학년 위인 장루이(张锐, 현 유시펑윈 프로그램 프로듀서)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그가 유시펑윈에 들어가는 복선이 되었다.
2002년, 시우차이는 조명 전공 동기에게 끌려가 《라그나로크 온라인(RO)》을 했고 이어서 《모젠(魔剑, 서구권 출시명 Shadowbane)》과 《울티마 온라인(UO)》을 하면서 게임 판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게임 판에 대해 시우차이는 이렇게 본다. 2003년 《울티마 온라인》이라는 게임에서 중국 최초의 길드 플레이어 무리가 나왔고, 《모젠》에서 두 번째 무리가 나왔으며, 《리니지 2》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함께 뭉친 이들이 세 번째 무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금 게임 업계를 이끄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앞의 두 시기에 이미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때가 영웅을 만드는 법이다.
Channel[G] 게임 채널¶
2004년 졸업한 뒤 시우차이는 밍르 테크놀로지(明日科技) 산하의 Channel[G] 게임 채널에 들어가 온라인 게임 뉴스와 e스포츠 프로그램을 맡았다. 당시 이 채널은 상하이 원광 인터랙티브 텔레비전(上海文广互动电视)의 유시펑윈(游戏风云) 채널에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시우차이는 야오모(妖魔, 전 유시펑윈 부총경리), 쑨쥔(孙俊, 유시펑윈 웹사이트부 책임자), 그리고 우창(吴强)과 원성커(文圣可) 등 뒷날 GamesTV를 세운 사람 몇 명을 알게 되었다.
GamesTV 합류¶
2005년 차이나조이(ChinaJoy) 뒤에 시우차이는 장루이의 소개로 GamesTV(뒷날 유시펑윈과 합병한다)에 들어가 온라인 게임 프로그램을 맡았다. 장루이는 싱글 플레이 게임 프로그램을, 야오모는 e스포츠 프로그램을 맡았다.
2007년 전까지 시우차이는 줄곧 연출을 맡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공략과 특집, 문화적 뿌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07년 이후에는 영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연출 출신이라 무엇이든 조금씩 알았고 게임에도 밝았기에 영업 쪽에서도 제법 잘했다.
이 시기에 생중계 기술은 이미 꽤 발전해 있었다. PPS와 PPLive 같은 생중계 플랫폼이 나왔고 MediaCode 스트리밍 생중계 기술이 여물기 시작했다. 콘텐츠 생산자는 방송 스트림을 PPS 같은 전문 생중계 플랫폼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었고, 그러면 대규모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보는 수요를 그쪽에서 감당해 줬다.
2006년 초, 영상 생중계 플랫폼이 중국 전역에 성공적으로 중계한 StarsWar2는 독립 IP 20만, 사용자 200만여 명이 지켜봤다. 바로 이런 기술 돌파를 배경으로 크게 성공한 사례다.
시우차이는 기술 혁명이 e스포츠의 몇 차례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고 본다.
1998년부터 2005년 전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중국에서는 큰 e스포츠 대회의 생중계 화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없었다. 기댈 것은 글과 사진으로 된 보도뿐이었다. 영상 생중계는 전 세계적으로도 기술의 병목이어서, 한때는 그 때문에 음성 생중계 사이트가 몇 개 생겨나기까지 했다.
시우차이는 말한다. 2004년에는 다들 마이크로소프트의 Mediaplay로 생중계를 했다고. 초기 영상 생중계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식이었다. 1M 스트림을 내보낼 때 보는 사람이 한 명이면 대역폭 1M이 필요하고, 두 명이면 2M, 100명이면 100M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역폭 보급 수준과 비싼 요금으로는 누구도 이런 규모의 영상 생중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기술 자체가 많은 사람의 동시 시청을 감당하지 못했다.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기술의 변혁을 밀어붙였고, 기술의 변혁은 콘텐츠의 영향력을 넓혔다. 게임의 역사는 거의 이 두 가지가 번갈아 가며 앞으로 밀어 온 것이다.
유쿠 게임의 기술 돌파¶
2006년 유쿠가 세워졌다. 이들이 CDN 네트워크 가속 기술을 유쿠에 적용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개선한 덕에 유쿠의 스트리밍 주문형 재생은 갈수록 매끄러워졌다. 바로 이런 큰 배경 아래에서 중국 게임의 판도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e스포츠의 판도가 모두 크게 달라졌다.
2008년, 유쿠가 상하이에 지사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시우차이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유쿠는 베이징에 있었다.
마침 이때 업계를 보는 시우차이의 생각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2008년 전까지 그는 영상 업계에서는 콘텐츠가 왕이라고, 곧 프로그램을 만드는 쪽이 주도권을 쥔다고 여겼다. 그런데 2008년 뒤로는 플랫폼이 왕이라고, 곧 방영 통로가 주도권을 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함께 일할 알맞은 플랫폼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투더우(土豆网)는 당시 아직 따로 정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쪽 게임 채널은 사용자가 올린 영상으로 자동 생성되는 것이었고, 유쿠는 이미 콘텐츠를 골라 내기 시작한 참이었다. 다만 투더우는 유쿠보다 먼저 시작했고 규모도 훨씬 컸으며 사용자는 이미 투더우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용자의 습관은 때로 옮기기 아주 어려운 큰 산이다.
유쿠 합류¶
2009년, 유쿠에 들어간 시우차이는 유쿠에서 게임 업계를 상대로 하는 마케팅 기획을 맡았다. 2009년 6월, 전임 유쿠 게임 편집장이 투더우에 스카우트되어 가면서 시우차이가 게임 채널 편집장이 되었다.
시우차이는 말한다. 막 자리를 맡았을 때 눈앞에 놓인 것은 폐허였다고. 당시의 투더우 앞에서 유쿠는 아무런 강점이 없었다. 경쟁 상대는 콘텐츠가 더 많은 데다 실력자들이 모여 있었고 유쿠 게임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게다가 원래 유쿠에 있던 사람들이 게임 자원을 한 무더기 들고 그쪽으로 옮겨 간 뒤였다. 시우차이는 다른 길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유쿠 게임, e스포츠 프로그램에서 다시 시작하다¶
시우차이는 유시펑윈에 있을 때 e스포츠 쪽과 자주 접촉했기에, 한참을 분석하고 따져 본 끝에 온라인 게임을 피해 e스포츠 프로그램부터 손대기로 했다. 특히 2009년은 도타(DOTA)가 한창 올라오던 때여서 강좌 영상 같은 것에 대한 사용자 수요가 계속 늘고 있었다.
그래서 시우차이는 기존 도타 영상 제작자들을 정리해 보고 수이리쯔(水离子)와 자페이옌(加菲盐)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사용자 기반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서 DZ, 하이타오(海涛) 같은 새 제작자를 발굴했고 게임 채널의 추천 자원을 전부 이들에게 쏟았다. 또 Replays.net 같은 사이트와 e스포츠 쪽 옛 인연을 이용해 공동 홍보를 했다. 이 눈덩이가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반년 뒤, 시우차이가 꾸린 유쿠 금메달 해설 팀은 처음의 5명에서 10명으로 늘었다. 이때가 바로 도타가 중국에서 차츰 일어서던 시기다. 게임이 영상을 밀어 준 것인지 영상이 게임을 밀어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010년에는 해설 영상의 조회수도 눈에 띄게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의 몇만에서 십몇만까지 갔고, 사용자는 차츰 경기 영상을 보는 습관을 들였다.
그래서 하이타오가 2010년 말 유쿠에서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서너 달 만에 30만에 이르렀고, 반년 뒤 해설자 2009는 아예 조회수 50만을 출발선으로 삼는 자리에 섰다. 이것은 모두 그전에 차근차근 깔아 놓은 바탕과 깊이 관련이 있다.
때와 자리와 사람이 맞았고, 운명이 등을 밀었다¶
2010년 12월 8일 유쿠가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넉넉해진 자금으로 유쿠의 성장에는 한층 더 힘이 붙었고 영상의 매끄러움과 사용자 경험도 계속 좋아졌다. 도타의 열기가 이어지는 동안 시우차이는 이미 남몰래 《리그 오브 레전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쿠 게임은 신인 해설자를 대거 끌어들였고, 그들도 유쿠라는 플랫폼을 통해 많은 관심을 얻었다. 타오바오 같은 해설자의 상업화 방식이 자리를 잡고 해설 수입이 안정되고 제작 문턱이 낮아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2010년부터 지금까지의 e스포츠 고속 성장이 있었다.
큰 시대를 배경으로, 많은 사람이 맞는 때에 맞는 자리에서 맞는 일을 해서 일어섰다. 시우차이 자신도 그중 하나다.
5년 동안 유쿠에서 자라난 이름난 해설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뛰어난 이들, 이를테면 하이타오, 2009, 샤오즈(小智), 샤오창(小苍), 샤오모(小漠) 같은 사람들은 시작할 때 시우차이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유쿠는 플랫폼이지 미디어가 아니다¶
영상에 대한 e스포츠의 거대한 수요와 유쿠가 쌓아 둔 영상 자원, 이 둘이 맞물려 e스포츠의 발전을 크게 밀어 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해설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직업이 이 플랫폼을 발판으로 새롭게 일어서면서 관중과 e스포츠 선수와 대회를 잇는 끈이 되었다. 이 고리가 뚫리면서 예전부터 있던 e스포츠 관심도의 수익화 문제도 차츰 풀렸고, 해설은 더 많은 프로 선수가 은퇴한 뒤 갈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시우차이는 유쿠가 미디어가 아니라 해설자 각자가 자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무대라고 본다. 다만 해설이라는 1인 미디어의 부상은 기존 미디어의 발언권을 상당 부분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미디어가 해설자가 만든 콘텐츠에 기대게 만들기도 한다. 큰 해설자의 영향력이 일부 e스포츠 사이트를 넘어선다는 것은 다툴 수 없는 사실이고, 수많은 e스포츠 전문 사이트가 이것을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미디어와 해설자와 플랫폼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 잡을 것인가? 이것이 이런 생태가 자라난 뒤에 생긴 새로운 숙제다.
새로운 기술의 병목¶
시우차이는 말한다. 1인 미디어라는 큰 흐름 앞에서 유쿠 게임은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고 모바일 단말기에서 터질 지점을 좋게 본다고.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 놓인 문제가 많다. 이를테면 모바일 네트워크의 속도를 어떻게 올릴 것인가, 데이터 요금이 비싸다는 것, 콘텐츠에 대한 관중의 수요가 더 가벼운 쪽으로 간다는 것, 뉴스 보도 속도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아졌다는 것 같은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다시 새로운 기술의 병목에 걸려 있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기술 변혁도 곧 모습을 드러낼 참인지 모른다.
누가 이 기술의 병목을 가장 먼저 풀어 이 기회를 다 가져갈까?
누가 될까?